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34화 (34/82)

34화. 키스만으로는 부족해

“가지 맙시다.”

“…네?”

성후는 생각했다. 이 여자를 제 바운더리 안에서 지켜주고 싶다고. 지켜주겠노라고.

“옥상에. 가지 마시라고요.”

그렇게 말하는 성후의 눈빛이 너무 진지해 다정도 이유를 모르고 멈칫했다. 이런저런 심란한 일들로 인해, 답답한 마음을 풀고 싶어 찾아 왔던 옥상이었는데. 그가 만류하자 왠지 거역이 어렵다.

다정에게 끼치는 성후의 영향이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강자에 대한 복종이 아닌, 남자에 대한 순종 그 비슷한 감정이었다. 머뭇거리는데, 성후가 먼저 다정의 손목을 잡았다. 그대로 아래로 끈다. 비상구 계단엔 두 사람분의 발소리가 크게도 울렸다.

“온다정 씨.”

그가 걸음을 멈추었고, 바삐 쫓던 다정의 걸음도 함께 멈췄다.

성큼성큼 빠른 남자 걸음이어서 조금은 숨이 찼다. 옅게 흐트러진 숨을 고르며 성후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새까만 동공이 무거운 얼굴에 비해 뜨거운 열기를 품고 있다.

“…대체 왜 그러시는데요?”

“할 얘기가 있습니다.”

분위기가 묵직해졌다. 대체로 유쾌하고 강인한 분위기를 아우르고 있던 성후가, 진지한 얼굴이 되자, 다정의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말씀하세요.”

다정도 조금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

“전 그쪽이…”

그 순간, 아래층으로부터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왁자지껄한 소음의 내용은 여전히 뜨거운 ‘불륜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기자 무리라는 직감이 들자, 두 사람은 불안한 눈빛을 교환했다.

성후가 상체를 조금 낮추고 다정의 팔을 꾹 잡았다. 단박에 그에게 집중되었다.

“오늘 밤, 내 병실로 와요.”

같은 눈높이에서 쳐다보는 성후의 눈빛은 그 여느 때보다 호소력이 짙었다.

“심각한 거예요?”

“몹시, 그렇습니다.”

점점 기자들이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알았으니까, 어서 가세요.”

소리가 울리는 방향으로 힐끔 내려다보던 다정이 성후에게 은밀히 소리쳤다.

“어서요…!”

이제 기자 여럿의 머리가 희끗희끗 보였다. 몇 초 뒤면, 환자복을 입고 있는 피아니스트 마성후의 모습과 맞닥뜨려질 테다.

“…밤에. 잊지 마세요.”

성후가 입술을 꽉 깨물고 등 뒤에 있던 비상구 문을 열었다. 때마침 계단 코너를 꺾던 기자들이 급하게 닫힌 비상구 문을 바라보았다. 다음 시선은 자연스레 다정에게 향했다. 다정은 서둘렀다. 바쁜 척 무리를 지나친다.

“방금 분명 대화 소리 들리지 않았어?”

“나는 사람 목소리 자체를 못 들었는데…….”

“잘못 들은 건가. 흐음….”

간호사 스테이션에 도착하자, 다른 간호사들이 동경 어린 눈빛으로 다정을 바라보았다.

“모델로 발탁되셨다면서요!”

들뜬 간호사의 말에 다정이 차분하게 정정했다.

“발탁이 아니라 지목입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차분함 그 이상의 냉기를 머금고 있어 연차가 얼마 되지 않은 간호사들끼리 주눅이 든 눈빛을 교환했다.

“보너스 있대요?”

노골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부연이었다. 평소에 비하면 낮은 목소리. 표정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말, 해야 하나요?”

부연이 자주 툴툴거려도 크게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다정이었는데. 오늘은 다르다.

그러자, 부연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냥… 궁금하잖아요. 그 특혜가 뭐 얼마나 대단한 건지. 온 선생님 반응 보니 보너스는 있는 듯하고. 휴가도 있대요?”

다정도 비릿한 미소를 입에 걸고 부연을 쳐다보았다.

“신 선생님.”

말하라는 뜻에서 양 눈썹을 까딱 올리는 부연이다.

“부러우시면 일을 좀 잘하시던지. 그랬다면 제가 아니라 신 선생님이 모델로 발, 탁, 되지 않았겠어요? 듣자 하니 다큐 팀에서 온다던데, 그 말이 무슨 뜻이겠어요?”

“그게 능력으로 결정되었단 말인가요?”

부연도 코웃음을 쳤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네! 대놓고 자기 자랑이라니! 그간 얼마나 우월감에 쩔어 살았니? 이 가식적인!

눈에는 노골적인 경멸이 어렸다. 시원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질타도 담겨 있었다.

“아.”

다정이 무언가를 깨우쳤다는 듯 살짝 놀란 얼굴로 꾸미며 대꾸했다.

“능력이 아니면…”

시력이 나쁜 사람처럼 눈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외모, 때문이라는 뜻인가요? 고로 이 병동에서 제가 제일 예쁘다는 뜻이 되는 거네요? 그것도 못지않게 영광스러운 일이군요.”

이 병동에서 가장 예쁜 사람은 늘 자신이라 믿었고 은근히 떠들고 다녔던 부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다정의 말에 약이 제대로 오른 것이다.

실제로 다정에게 왜 모델 제의가 들어온 건지, 정확한 이유를 모르기에 더욱 분한 부연이었다. 겨뤄도 보기 전에 진 기분. 패배감은 잔인할 정도로 부연의 몸을 휘감았다.

“…….”

제대로 맞붙은 부연과 다정을 처음 본 간호사들이 드디어 터질 것이 터졌단 생각에 이르렀고 서서히 흩어졌다. 선배 간호사들의 팽팽한 기 싸움을 도저히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텅 빈 간호사 스테이션.

노려보는 두 여자의 눈빛이 송곳만큼이나 날카롭다.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방송, 하고 싶니?”

“내가 언제 하고 싶다고 했어??”

다정의 눈이 탁상 캘린더에 잠깐 머무른다.

“음- 다큐 팀은 내일부터 온다고 했으니까…”

그러다 다시 부연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정 방송에 나가고 싶다면 내 일 좀 거들어줘.”

씩 웃는 다정이다. 하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그 또렷하고 깊은 눈동자 속에 부들부들 떨리는 부연을 거울처럼 비쳐 낼 뿐이었다.

* * *

“와… 은명대 병원 또 터졌어.”

라면을 먹으며 핸드폰 화면을 보던 승주가 말했다.

“또 뭐가?”

맞은편에 앉은 우석이 젓가락을 내려두고 물었다.

“왜 인스타에 올라온 불륜 사진 사건… 몰라?”

“나 그런 거 안 하잖아.”

“지독한 아웃사이더 같으니… 맨날 그놈의 체육관이랑…”

승주의 눈이 딱 있을 것만 있는 우석의 옥탑방 안을 훑으며 말을 이었다.

“이놈의 집만 왔다 갔다 하니 뭘 알겠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돈 좀 봐라.”

“세상 돌아가는 걸 SNS로 배우는 놈이 잘난 척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제일 빠른 뉴스를 보는 그여서, 거드름 피우는 승주에게 짤막한 쓴소리를 날렸다.

“흠흠.”

멋쩍어진 승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다정이네 병원 의사랑 간호사 불륜 사건이 터졌거든. 내연녀 간호사가 자기 인스타에 자랑 샷을 올렸는데, 그 사진을 찍어주던 의사가 유리창에 희미하게 비쳤나 봐. 거기가 홍콩 레스토랑이고, 올린 건 어떤 호텔에서 올렸으니까. 완전 빼박이지.”

“아아.”

우석이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치정 문제라니. 눈곱만큼도 관심 없다.

“그런데 어젯밤에 사건이 하나 터졌잖아.”

“무슨 사건.”

묻는 얼굴에 아무런 호기심도 어려 있지 않았지만, 승주는 개의치 않고 이어 떠들었다.

“의사 사모가 내연녀를 차로 들이박았대.”

“미쳤구만.”

“근데 그게 의문이야. 사모가 들이받은 건지, 내연녀가 뛰어든 건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대. 마침 블랙박스 화면도 돌아가 있었고 밤이라 CCTV에도 정확히 안 보인대.”

“뛰어들긴 왜 뛰어들어? 죽으면 사랑도 쟁취 못 할 텐데. 다 음모론이야.”

승주가 젓가락으로 콕, 우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딱 사이즈 나오지 않냐?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소설 쓴다.”

“그리고 그 의사가 정형외과 교수라던데. 그러면 다정이도 아는 사람 아닐까? 병동 분위기 살벌하겠지?”

그 말에 다시 입맛이 뚝 떨어지는 우석이다. 지난번 다정의 남자친구를 조우한 뒤로 끓었던 감정을 식히려 한동안 애썼다.

허나 결과는 대실패.

“…다 금방 지나가겠지.”

꼭 자신에게 하는 말인 것처럼 읊조려 본다.

그 순간 승주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는 얼굴이 밝아진다.

“어 기봉이냐? 다정이? 너도 봤구나. 가까이 사는 우석이 놈보다 네가 훨씬 낫네.”

밉지 않게 우석을 노려본 뒤 이어 재잘거리는 그다.

“괜찮을 거야. 직접 전화해보지. 아아. 하긴 지금 전화 받을 상황은 아니겠다. 어, 어. 그래 또 다른 소식 들으면 전화할게. 들어가~!”

* * *

밤이 찾아들 때까지 성후의 뇌는 몹시 바빴다. 어둠에 익은 눈이 실내를 틀어막은 커튼을 바라본다. 답답하지만, 저 커튼을 걷어낼 의지는 없다. 다정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에너지 소진이 다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아…”

다정에게 어떻게 고백을 하면 좋을까.

당신이 좋다고. 좀 더 많이 알아가고 싶고, 보다 깊은 사이가 되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면 될까.

그런데 꼭… 말로 해야 할까.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다정이다!

그러자 사고를 할 겨를도 없이 몸이 먼저 나갔다.

“저…”

단아한 정복 차림의 그녀를 낚아챘고,

“…흡!”

허리를 굽혀 능숙하게 입술을 막았다.

떨리는 마음에 비해, 움직이는 입술과 혀는 자유자재다. 언뜻 전투적인 것처럼 느껴지나 사실은 흠모하는 마음이 잔뜩 묻어나는 키스였다.

야릇한 숨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성후는 급한 마음에 그녀를 끌고 비어있는 침대에 눕혔다. 다음으론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손목을 포박했다. 그때처럼.

그리고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키스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낮게 울리는 허스키한 목소리는 비밀스러운 고백과 퍽 잘 어울렸다. 그의 가슴이 흥분으로 오르락내리락한다.

“더 많이 친해지고 싶고 더 깊이 알고 싶습니다. 당신을.”

진심이 전해지길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성후다. 그때, 예정에 없던 노크 소리가 다시 울렸고 문이 열렸다.

희미하게 들어오는 복도 불빛이 성후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 순간 청량하면서도 고아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지금…… 뭐 하세요?”

사복을 입은 다정이었다.

“?!”

아차. 그녀는 퇴근하고 이리로 온 것이었다.

꼭 붙잡았던 낯선 여자에게서 다급히 손을 뗐다. 새어 들어오는 불빛에 의지해 제 밑에 깔린 여자의 이목구비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여자는 손을 뻗어 성후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제 립스틱 묻었어요.”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부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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