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33화 (33/82)
  • 33화. 그녀를 가질 시간

    “거창하게 생각할 건 없네. 방송에 얼굴 몇 번 비추는 건데 그냥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돼.”

    병원장의 말에 기조실장이 힘을 보탰다.

    “다큐멘터리 같은 거라 전문적인 조언 같은 게 필요 없으니 따로 준비할 건 없어요. 방송에 출연한다는 점이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출연료도 받으실 테고, 병원 내부적으로도 따로 보너스가 지급될 겁니다.”

    다정은 조용히 썩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불 지른 사람 따로. 불 끄는 사람 따로? 나보고 맨몸으로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소방관이 되란 말이잖아? 누굴 바보로 아나.

    “혹시 아나요. 최초의 간호사 출신 톱스타가 될지.”

    “허허허. 그럴 수도 있겠군. 연속극에서 온다정 선생을 보는 날이 있을지도!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니까! 허허허.”

    다정이 별 대답이 없자, 기조실장이 병원장의 눈치를 보며 이어 말했다.

    “고민할 것도 없어요. 이건 좋은 기회란 말입니다. 아까 언뜻 들어보니 다른 간호사들은 하고 싶어서 안달이라던데.”

    “잘됐네요. 그럼 다른 간호사 선생님께 부탁해주세요.”

    침묵하던 입에서 나오는 대답에 순간적으로 공기가 얼어붙는다.

    “아니 그 쟁쟁한 선생님들 사이에 우리가 굳이 왜 온 선생님에게 부탁하겠습니까?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유요?”

    “거야 방송하시기에 미모도 적합하시고…”

    다정의 눈초리가 몹시 가늘어졌다. 기조실장은 헛기침한 뒤 말을 이었다.

    “그 누구보다 일도 잘하시니까.”

    “…….”

    불쾌했다. 안 그래도 방송에서 비추는 간호사의 이미지가 썩 좋지 못했는데. 가령 타이트한 정복 차림에 섹시미를 발산하거나, 기계적인 톤으로 의무만을 겨우 하거나. 또는 실수투성이로 매번 의사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방송에서 비추는 이미지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시민들의 인식 또한 다르지 않은 듯했다. 의료진으로서 충분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많은 환자가 간호사를 무시했다. 걸핏하면 의사를 찾았고, 불만만을 간호사에게 쏟아냈다.

    신규 간호사였을 때는 회의감을 느끼곤 했었다. 물론 지금도 아니라곤 말할 순 없었다. VVIP 병동에 차출될 때마다 상업의 노예가 된 기분이 들었던 까닭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희생까지 강요하다니.

    자신의 행동이 모든 간호사의 모습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면… 그건 정말이지 무거운 짐이다. 아니. 과연 대변이나 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에 수많은 훌륭한 간호사에게 폐만 끼치지 않을까?

    침묵하는 다정이 답답했는지, 기조실장이 작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론이 좀 바뀌면 플래카드도 걸고 할 겁니다. 생각 좀 해보세요. 우리 은명 대학병원이 땅 파서 진료하는 곳입니까? 의사들 간호사들 월급에, 시설 유지비, 세금, 때때마다 장비도 갖춰야 하고. 이번 일…, 들어 아시겠지만, 보통 일 아닙니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하지 마시고. 같은 식구끼리 힘내서 일단 위기부터 넘겨봅시다. 막말로, 병원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온 선생도 실직자 되는 거 아닙니까!”

    세게도 나온다. 잡생각이 다정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지만, 자신은 현저한 을의 처지다. 아니. 병, 아니, 정의 처지다.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녀의 모호한 대답을 들은 병원장의 뒷골이 급격히 당겨져 왔다.

    “온 선생.”

    그가 참는 듯한 음성으로 호명했다.

    “네, 원장님.”

    다음으로 들리는 병원장의 말엔 일개 간호사가 감당하기엔 묵직한 권력이 실려 있었다.

    “내 듣자 듣자 하니, 우리가 부탁이란 말을 꺼냈다고 해서 온 선생이 무슨 선택권이 있는 줄 착각하는 모양인데. 이건 부탁이 아니고 상사로서의 명령일세. 업무의 연장선이라고. 왜 잘난 교수들도 불철주야 수술방에서 사는지 아나? 그건 바로 병원의 이윤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서지. 그렇다면 간호사는? 간호사들은 의사와 다른가?”

    “…….”

    “잊지 말게. 병원이 있어야 환자도 있다는 것을.”

    * * *

    “이 정도면 전생에 나라를 하나 세운 거 아니야? 어떻게 하는 것마다 온다정! 온다정! 온다정!”

    작게 투덜거리지만, 몹시 언짢은 기색을 감출 수 없는 부연이다.

    마성후를 차지한 것만으로도 모자라, 모델이라니? 모델이라니!

    더욱 열 받는 건,

    “표정이 안 좋네요, 선생님.”

    이 태연한 얼굴!!

    다정이 지나가며 말을 붙여왔다. 부연의 눈엔 모든 걸 다 가진 온다정이 말이다. 그것도 걱정하는 얼굴이다. 가진 자의 위선. 그도 그럴 것이, 온갖 구설이 다정을 겨냥했지만, 결국엔 모두가 그녀를 사랑하고 아꼈다. 그러니 얼마나 오만하겠는가.

    물론 모두 부연의 뇌피셜일 뿐이다.

    “생리통입니다!”

    시기로 심사가 뒤틀린 부연이 날카롭게 대꾸했다. 움찔한 다정은 동공을 굴리며 주변을 슥 살폈고 이내 작게 속삭였다.

    “약 먹고 좀 쉬어. 나머진 내가 할게. 지금 5-2번 환자한테 가면 돼? 드레싱?”

    늘 이런 식이다. 다정이 조금만 못됐더라면 마음껏 미워하기라도 할 텐데. 그조차도 못하게 만들어 끓던 분노가 천천히, 그리고 찝찝하게 식어가는 느낌.

    “신경 꺼…. 내 환자야.”

    할 수 있는 건 겨우 어린애 같은 반항이 전부였고 그래서 더욱 스스로가 볼품없게 느껴지는 부연이었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은 절대, 다정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걸.

    그럼에도 그녀보다 저가 낫다는 자기 세뇌를 오랜 시간 다져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소용없는 일이 되었다.

    씩씩거리며 다정을 지나쳐, 복도 코너를 도는데 커다란 형체에 그대로 코를 박았다. 퍽!

    “앗…!”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코를 매만졌다. 수술한 코여서 문제가 생기면 큰일이다. 제 코에 집중하고 있을 때 공기를 긁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저 위에서 울렸다.

    “조심 좀 합시다.”

    천천히 고개를 올리자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린 성후의 얼굴이 보였다. 엉뚱한 순간 북받쳐 올랐다. 부연은 글썽거리는 눈으로 조그맣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비참한 기분에, 바보처럼 울먹거렸다.

    못난 모습만 보여주고! 난 정말 구제 불능이야!

    그때 성후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코… 많이 아픕니까?”

    혹 검사나 치료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책임져줄 마음으로 묻는 그다.

    그의 호의는 책임감에서 비롯된다. 엄밀히 말하자면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을 위해서다. 추후에 일어날지도 모를 문제들을 생각하면, 미리미리 깔끔하게 해결을 보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그렇게 살아왔다.

    의도와 달리 와전되거나 휘말리던 사건 사고들. 그건 부유하게 태어나 유명인이 된 죄로 지긋지긋하게 겪어야 하는 숙명과도 같았다.

    “아, 아니에요! 그럼!”

    부연은 후다닥 화장실로 들어왔다. 거울 앞에 서서야 코를 덮던 손을 내릴 수 있었다. 다행히 수술받은 코는 별 이상이 없어 보였다.

    “후…….”

    안심하던 찰나, 저를 걱정하던 성후의 얼굴과 목소리가 다시금 떠오른다.

    진짜 너무…… 가지고 싶다.

    * * *

    “결국, 그녀가….”

    “네.”

    연석이 말에 의하면 결국 다정이 은명 대학병원의 모델로 발탁되었다고 한다. 특별한 기준도, 공정한 심사도 없이 기어이 약자를 방패로 내세운 것이다. 부아가 치밀면서도 동시에 무능한 기분에 괴롭다.

    “온다정 씨 의견은.”

    “들리기론 수락했다고 하던데요.”

    “그 과정에서 강압은 없었고?”

    “거기까진 저도 잘…….”

    직접 다정을 만나 확인하는 편이 빠를 듯하다. 그녀의 생각에 따라 자신이 해야 할 것도 달라질 것이다. 칼자루는 성후가 아닌, 다정이 쥔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판이든 죄다 덮기 바쁘군.”

    “그렇죠. 그런데 어쩌면 온다정 선생님 인생에서 터닝 포인트가 되어 줄지도 모릅니다.”

    “터닝 포인트?”

    연석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그의 눈이 가히 짐승과 다를 게 없다. 연석은 움찔한 마음을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 끝이 천국일지 지옥일지 모르나, 분명 온다정 씨 인생은 많이 달라질 겁니다.”

    “그런 건……!”

    원치 않아, 난.

    그리고 갑자기 드는 생각.

    그녀의 인생에 낄 자격, 있는 걸까?

    “나가보겠습니다.”

    기분이 몹시 저조해 보이는 성후를 피해 병실을 등지는 연석이다. 성후도 답답한 기분전환을 위해 병원 옥상으로 향했다.

    처음 올라와 본 옥상은 인공적이지만 평범한 정원처럼 꾸며져 있었다. 옥상에 내린 햇살은 눈 부실 만큼 환해 귀를 기울이면 쨍하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여러 개의 벤치 중 남는 의자에 앉는다.

    “하아…….”

    어쩌면 좋을까. 우리 둘 사이…. 아니, 우리 둘 사이의 애매한 거리. 이제 더 바짝 좁혀야 할 때가 아닌가.

    한동안 힘들어 보였던 다정을 그저 바라만 보는 데서 그쳤다. 오직 그녀를 위해 자제했던 것이 지금 성후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설령 배려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완전히 그녀에게 뿌리내리지 못한 결과는 암울하다.

    바로 그녀의 인생에 개입할 자격이 없다는 것.

    다정에게 완전히 파고들고자 다짐했을 때, 흰 가운을 입은 무리가 옥상으로 올라왔다. 무리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짝다리를 짚고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계 선생님 요즘 시름시름 앓는다면서요?”

    성후가 있던 자리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화단에 둘러싸인 웬 동물 조각상이 그를 완벽히 가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본의 아니게 관심 없는 수다를 듣게 되었다.

    “하하. 그렇죠? 온 선생님께 완전 제대로 빠진 거 같더라고요?”

    독특한 성이 거론되자, 성후의 귀가 바짝 섰다.

    “그렇게 빠질… 정도로 예쁜가?”

    “예쁜 편이긴 하죠.”

    “쯧쯧. 이래서 안 돼. 병원 밖에도 좀 나가들 봐요! 강남 한복판만 쭉- 걸어도 어마무시한 미인들이 쫙~ 깔렸어요. 맨날 이 건물에 갇혀 있으니까 모르지. 이 불쌍한 중생들!”

    “큭큭. 김 선생이 그걸 어떻게 압니까? 오늘 아침에도 당직실에서 일어나신 분이!”

    “윽… 뼈를 강력하게 때리시는군요. 소인이 혹여라도 당직실에서 눈을 뜨지 못한다면, 부디 저의 외장 하드를 불태워주십시오…!”

    “이런 대단하신 분! 그것을 볼 시간이 있더이까?!”

    “아하하하. 그만들 하세요. 배 아파 죽겠네.”

    “그건 그렇고 온 선생님 남친이 재벌이라면서요?”

    “잉? 난 피아니스트라고 들었는데?”

    “정확히는 세계적인 재벌의 아들이자 본업이 피아니스트랍니다. 유명해요. 마성후라고. 다들 모르셨어요?”

    “아아! 들어봤던 거 같다! 왜 1004호실 입원했었다던!”

    “이야~~! 온 선생님 진짜 능력자네!”

    “뿐입니까. 그 남자 인물이 연예인 뺨도 후려치는……”

    무의미한 수다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성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흐어억!”

    말을 하던 의사가 성후를 발견하고 기겁을 한다.

    “뭐, 뭐야? 박 선생 왜 그래요?!”

    성후의 냉랭한 눈빛이 가벼운 의사들의 얼굴을 훑는다.

    꿀꺽.

    그를 알아본 박 선생이란 의사가 볼품없는 마른 침을 삼켰다. 성후는 희미한 비소를 지었다. 이내 성큼성큼 옥상 문을 열었다. 계단을 채 몇 발자국도 내려가지 못해 익숙한 인영을 만나버렸다.

    “음? 옥상에 있었어요?”

    묻는 얼굴이 방금 마주했던 햇살만큼이나 눈 부셨다. 성후가 대답이 없자, 다정이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환히 웃는다. 올라간 광대와 시원한 입매. 성후의 가슴이 무섭도록 뛰기 시작했다. 다정에게만 반응하는 심장이 엄격하게 경고한다.

    더는 시간을 허비할 권리가 없다고.

    이제는 정말, 그녀를 가질 시간이 되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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