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32화 (32/82)
  • 32화. 달콤한 편애

    “불륜 문제로 이슈화돼서 그런가. 요즘 도는 말들이 많습니다.”

    다소곳이 앉아 참하게 사과를 깎던 연석이 말했다. 하나를 조각내면 성후의 입으로 쏙, 또 하나를 조각내면 다시 쏙. 사과가 사라지는 마술을 보며 깨끗한 폼의 칼질은 계속되었다.

    “도는 말?”

    아삭아삭. 경쾌한 소리를 내며 사과를 씹어 먹던 성후가 되물었다.

    “네. 병원 이미지 쇄신한다고 모델을 한 명 뽑아, 홍보할 생각인 거 같더라고요.”

    “모델이라. 하긴. 병원도 이익이 창출되어야 먹고 살 테니.”

    인술만으로 버티기엔 각박한 것이 현실이긴 했다. 특히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적으로 받으며 살았던 성후는 그 섭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남들이 보기엔 자유롭고 거친 피아니스트였을지 몰라도, 그 역시도 대중의 평가를 받는 공인으로서 사람들의 공분을 사지 않을 정도의 기준은 늘 의식하고 지켜왔다.

    “어떻게 홍보하려나.”

    “그게…… 모이는 의견으론 비주얼 담당으로 뽑는다는 말이.”

    “비주얼?”

    성후의 남자다운 눈썹이 꿈틀거린다. 이 병원을 수없이 오가며 제 눈에 가장 예뻤던 건, 오직 다정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세워도 의사겠지, 설마.

    그리고 피식 웃었다.

    “아 그 모델이…”

    그런데 연석이 다음 말을 꺼내는 순간, 성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간호사 중에 뽑는다는 말도.”

    “설마.”

    “네, 저도 온 선생님이 바로 떠오르더라고요. 뭐. 끝까지 가 봐야 알겠지만.”

    매스컴에 얼굴이 노출된다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성후는 직업 특성상 어쩔 수 없었지만, 다정의 경우는 다르다. 그녀는 그저 따뜻하고 평범한 일개 간호사일 뿐이니까.

    “…한번 알아봐.”

    어금니를 은밀히 깨물고서 말했다.

    “계속 알아보고 있습니다.”

    “더 확실히. 자세히. 꼼꼼히. 면밀히!”

    성후가 눈을 부라리며 말하는 통에,

    “아얏!”

    놀란 연석이 과도에 손을 베이고 말았다. 헉. 움찔한 성후가 슬쩍 손끝에 맺힌 피를 힐끔 인다.

    “그러게 조심 좀 하…”

    찌릿. 노려보는 연석의 눈빛에 얼굴이 따끔거린다.

    “아, 알았어, 산재 처리해 줄게.”

    “고용인에게 모욕당한 정신적 피해보상도 신청하는 바입니다.”

    “아니, 이 새끼ㄱ…”

    끼이익- 쿵!

    “꺄아아악!!!”

    밤하늘을 가득 메우는 날카로운 비명에 연석이 창가로 달려갔다.

    “뭐야?!”

    성후가 물었고, 연석이 창밖에 시선을 그대로 둔 채 인상을 찌푸렸다.

    “…윽. 사고가 난 거 같은데요?”

    그제야 성후도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로 향했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짧게나마 터지는 비명과 개미 떼처럼 몰려든 사람들, 급히 뛰쳐나온 의료진들과 그 광경을 핸드폰에 담는 몇몇.

    깨진 전조등에서 나오는 불빛이 까만 바닥을 깜빡깜빡 밝히고 있었다. 검은 피가 번지는 것이 희미하게 보인다. 끔찍한 광경이다. 사고 이후 웅성거리느라 여념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 날 것의 호기심이.

    들것에 실려 가는 여자를 내려다보는 두 남자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 * *

    뭐지?

    이른 아침 출근하던 다정이 병원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을 발견하고서 움찔한다. 연청바지 속에 갇혀 있는 다리가 주춤하며 느려졌다. 그런 그녀를 발견한 기자의 눈이 기민하게 다정의 얼굴 훑는다.

    “저 혹시 이 병원 관계…”

    “자기야.”

    기자를 등지고 불쑥 나타난 자는 환자복 차림의 성후다.

    “음?”

    자, 자기? 허… 허….

    “초밥 사 왔어?”

    친밀한 반말에 어쩐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다정의 눈빛이 금세 영리하게 빛났다. 이번엔 격의 없는 현 여친 역할이군요!

    “이를 어째. 깜빡했지 뭐야!”

    그녀의 흰자위에 의심 많은 기자의 얼굴이 비쳤다. 그 기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성후의 뒷모습을 빤히 올려다본다. 마치 눈에 익는다는 듯이.

    다정이 불안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자, 성후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끌었다.

    “지금 사 먹으러 가자. 병원 밥 도저히 지겨워서 안 되겠어.”

    그대로 빠르게 지하 주차장에 들어선 두 사람. 성후는 자신의 차 트렁크를 열며 말했다.

    “뉴스 못 봤습니까.”

    목소리가 급격하게 낮아졌다.

    “아, 네…”

    능숙하게 짐가방을 열어 꺼낸 챙 모자를 푹 눌러쓰는 그다. 왜 쓰는진 모르겠으나, 눈까지 푹 가린 모자가 그가 감추고 싶은 것을 더욱 만연하게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여기, 톱스타가 있다고.

    “간밤에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요?”

    “바로 병원 앞에서 일어난 교통사곤데 운전자가 김동학 교수 아내고, 피해자가 문제의 내연녀라 하더군요.”

    다정의 입이 쩍 벌어졌다.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손으로 가려본다.

    “그 소식을 누가 흘렸는지, 사고 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기자들이 득실득실해졌습니다. 병원 관계자라면, 청소부라도 잡고 물고 넘어지는 판국이에요.”

    “왜 그렇게까지……”

    그가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최근 SNS를 뜨겁게 달궜던 불륜 사건의 당사자들이 결국 치정 문제로 피를 봤다, 자극적인 기사 뽑기 좋지 않겠습니까.”

    “…….”

    타인의 고통을 먹잇감으로 삼는 자들이라니. 바늘을 삼킨 듯 목과 위가 아파졌다.

    “일단 들어가죠.”

    지하로 연결된 비상구로 들어가자, 수첩을 들고 정보를 교류 중인 몇몇 기자가 보였다. 누가 봐도 확 눈에 띄는 남녀가 동시에 비상구로 들어오니 그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성후와 다정에게로 옮겨졌다.

    그 순간 다정의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망각했다. 자신이 곤란할까 봐 달려온 이 남자는, 사실 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대학병원에 입원한 천재 피아니스트 마성후.’

    글귀 하나가 떠오르자 눈앞이 캄캄해지는 다정이다. 그때 성후가 부드럽게 깍지 손을 꼈다.

    “가자, 자기야.”

    낮고 다정한 목소리는 그 여느 때보다 태연했다.

    성후와 함께 계단을 오르며 점점 멀어지는 기자들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그들은 금세 흥미를 거둬갔다. 정형외과 병동에 들어서자마자 다정이 말했다.

    “다시는 이런 위험, 감수하지 말아요. 저보단 성후 씨가 곤란해지잖아요.”

    “또. 또.”

    “뭐가요?”

    비상구를 오르는 시간은 찰나였지만, 상상은 멀리까지 나갔다. 두려웠다. 성후를 알아본 기자가 갑자기 쫓아올까 봐. 기자의 집요한 열정에, 성후의 병명이 전국에 까발려질까 봐. 세상이 시끄러워질까 봐. 때문에 성후가 곤욕을 치르고, 어딘가에 있을 그의 소중한 사람들이 상처받을까 봐. 그것이 곧… 자기 일이 될까 봐.

    생명이 십 년은 단축된 것만 같았다.

    “남 생각 말고 자기 생각하라고요.”

    별안간 들려온 묵직한 목소리가 다정을 무서운 상상에서 구출해냈다.

    “그러는 마성후 씨도 제 생각 말고 당신 생각이나 하세요.”

    “아니 나는, 온다정 씨 생각만 할 겁니다.”

    황당하다. 다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본인이 한결같이 모순적인 거, 알고는 있죠?”

    “이건 모순이 아니고 편애입니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린다.

    “저 원래 제멋대로인 놈입니다. 저의 한결은, 그런 것입니다. 헌데 당신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저라는 인간이 모순투성이여서가 아니라, 그쪽이 나한테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왜 저를…”

    그가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직시하며 말했다.

    “시시한 거래도, 온다정 씨 힘들게 하는 건 모든… 제가 막고 싶습니다.”

    “…….”

    말이라면, 어디서든 잘했다. 따박따박. 어려서부터 그랬다. 그런 다정의 말문을 막게 만드는 건 주변을 보지 않고 무쇠처럼 돌진하는 이 남자가 유일하다.

    다정이 입을 꾹 다물고 성후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그가 무거운 얼굴을 풀고 소년처럼 웃었다.

    “지각, 아닙니까?”

    “…헙!”

    그녀에게 기꺼이 도망갈 길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머, 먼저 가볼게요.”

    고맙다는 말은 생략한다. 그의 배려는 이제 감사의 말 한마디 말로 상쇄시키기엔, 그 덩치가 너무나 크다.

    착한 여자다. 성후는, 다정의 진심을 눈치채고 가늘게 웃었다. 이미 당황으로 말을 더듬을 때부터, 그녀가 감사의 인사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그 이상을 받았다.

    그래, 그렇게 계속 흔들리고 흔들리고 또 흔들리세요.

    “그러세요.”

    후다닥 뛰어가는 뒷모습까지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보면 이기적인 여자이기도 하지. 이 세상 모든 사랑스러움은 혼자 독차지했으니까.

    * * *

    탈의실로 들어와 가쁜 심장을 진정하며 옷을 갈아입는데, 누리가 들어왔다.

    “저 선생님, 밖에서 다른 선생님들이 기다리시는데요.”

    “왜?”

    정복 블라우스 단추를 채우던 다정이 물었다.

    “직접 들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럼.”

    턱을 야무지게 당겨 말한 뒤 사라지는 누리다. 다정도 금세 탈의실에서 나와,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응?

    다정을 발견한 몇몇 의사 표정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밝다.

    간호사들은?

    의사완 달리 석연치 않아 보였다.

    “무슨 일들이세요?”

    그 중심에 있던 수간호사 정희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지금 병원장실에 좀 가봐야겠어.”

    다정은 보는 눈이 많아서, 연유를 묻지 못하고 병원장실로 올라왔다. 무수한 계단을 오른 덕에 숨이 흐트러졌다. 호흡을 가다듬은 뒤 노크했다.

    방주인의 허락이 들렸다. 문을 열자 환한 미소로 저를 쳐다보는 병원장이 보였다. 그 옆으로는 방긋 웃는 기조실장과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김동학 교수가 눈에 들어왔다.

    “네, 부르셨다고요.”

    병원장실은 처음 들어오는 것이어서 몹시 낯설고 또 어렵게 느껴졌지만, 그녀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존경했던 김동학의 처참한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를 미워하는 데 감정 낭비를 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기도 했다.

    “아- 어서 와! 어서 와요! 일단 앉지.”

    다정은 소파 남은 자리에 앉아 다시금 병원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듣던 대로 인상이 참 좋군.”

    “뭐, 온 선생님이 우리 은명 대학병원 간판인 건 모르는 사람들이 없지요. 모른다면 그건 우리 병원 식구들이 아닙니다!”

    기조실장이 병원장의 말을 적극 동의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말이야, 내 온 선생에게 따로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부탁이요?”

    그 순간 우연히 마주친 동학의 눈이 수치심에 일그러지는 것을, 다정은 보았고 불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우리 병원 간판 모델로 활동을 좀 해줬으면 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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