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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끔한 것이 좋아-31화 (31/82)
  • 31화. 당신에게 키스한 세 가지 이유

    성후와 다정, 우석이 나란히 콩나물 국밥집에 앉아 있다.

    반가운 음식을 앞에 두고 숟가락부터 드는 다정과 우석에 반해, 성후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우석은 자연스레 다정의 뚝배기 속으로 날계란을 톡 깨서 넣어주었다.

    “오, 땡큐.”

    그 장면을 목격한 성후의 얼굴이 미묘하게 찌푸려진다. 친구라는 남자가, 다정을 챙겨서가 아니다. 그들의 먹거리 문화를 따라가기가 어려워서다. 이를테면 소외감이라 부르는 그것.

    국밥도 낯선데 날계란까지? 그, 그렇게 먹으면 맛있는 건가?

    따라 넣고 싶지만, 괜한 자존심에 뚝배기 속을 숟가락으로 휘휘 저을 뿐이다.

    그러자 다정이 성후를 바라보며 혀끝을 찼다.

    “복 떨어지게시리…….”

    눈빛도 냉엄하다.

    “음?”

    그때 우석이 국밥을 한술 떠 후후 분 다음 한입 크게 밀어 넣었다. 뜨거운지 흐허흐허, 거렸는데 그때마다 입속에서 뜨거운 김이 펄펄 번져 나왔다. 그의 수저질은 무한 반복되었다. 맛있게도 먹는다.

    그때였다.

    다정이 흡사 엄마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우석에게 물었다.

    “맛있어?”

    마치 뜨신 밥을 챙겨준 것이 자신이라도 되는 양.

    우석이 다정을 챙기는 거 보다, 다정이 우석을 챙기는 게, 성후는 훨씬 기분 나빴다. 날계란의 조합까진 모르겠고 휘휘 젓던 숟가락을 남자답게 쥐고서 크게 한술 떴다.

    다정의 친구처럼 경박스러운 입 모양을 하고 싶지 않으니 애초에,

    “후-! 후-!”

    미리미리 불어 식혔다.

    성후의 볼이 빵빵해진 모습이 웃기고도 귀여워, 다정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방심했다간 바보 같은 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재벌가의 아들이라고 하니 서민적인 음식이 낯선 것이 분명했다. 다정은 그런 그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꼭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어른의 세계를 알려주는 것처럼 뿌듯한 우월감도 따라 들었다.

    “흡.”

    미묘하게 눈썹을 꿈틀거리며 오물오물 씹는 성후의 입을, 다정이 노골적으로 쳐다보았다.

    “맛이 어때요?”

    그가 꿀꺽 삼킨 뒤 대꾸했다.

    “…뜨겁고, 아삭하면서, 얼큰합니다.”

    “그렇죠? 아아-, 어제 술 한잔했어야 했는데.”

    다정의 말에 우석이 무심하게 맞장구쳤다.

    “그러니까.”

    그들의 대화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성후의 마음이 조급증으로 바빠졌다.

    “먹고 싶으면 말하세요. 당장이라도 사줄 테니까. 어차피 퇴근도 했겠다. 뭐가 좋습니까? 저는 코냑을 즐기는 편입니다.”

    성후의 말에 다정이 빵하고 웃음이 터졌다. 우석은 조용히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뭐가 웃긴 거죠?”

    전날 술을 마셨어야, 이 국밥이 해장으로 더욱 값진 역할을 했을 거란 뜻이었는데. 그것을 이해 못 한 성후가 온실 속 도련님으로 전락하는 건 정말이지 한순간이었다.

    “쿡쿡. 코냑이라니요.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부잣집 아들답네, 다워. 뭐. 좋아요. 내친김에 한번 달려보죠. 요즘 가뜩이나 기분도 울적했는데. 아. 아쉽게도 국밥집엔 코냑이 없으니, 소주로 대체하죠.”

    다정이 익살스럽게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

    “이모! 여기 소주 한 병이요~!”

    주문과 동시에 술이 나왔다.

    소주를 따기 전에 돌리고 흔들며 부산을 떠는 다정이다. 다음으로 끼릭끼릭 소주 뚜껑을 딴 다음,

    “찹!”

    소리와 함께 브이 자로 만든 손가락으로 소주 입구를 치자, 소주병 밖으로 술이 찍 흘러나왔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성후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 해야 맛이 있다고요.”

    태연하게 제 소주잔에 술을 채우는 다정이다. 그때 우석이 숟가락을 입에 문 채, 손을 뻗었다. 다정의 소주잔 앞에서 소리가 나도록 손가락을 부딪쳤다. 그들만의 문화. 혼술을 외롭게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 담긴 손짓.

    “땡큐.”

    “?”

    암만 봐도 두 사람의 언행이 이해가 되지 않는 성후다. 소외감은 질투심 못지않은 비릿한 감정에 휩싸이도록 만들었다.

    “마실래?”

    다정이 물었고,

    “줘 봐.”

    우석이 답했다.

    낯선 음식을 꾸역꾸역 먹던 성후가 숟가락을 소리 나게 테이블 위로 내려친 뒤 말했다.

    “나도 좀 마셔봅시다. 그… 소주라는 거.”

    그렇게 술판이 벌어졌다.

    국밥이 비워지는 동안 소주도 성실하게 비워졌다. 벌써 다섯 병째다. 모두 어마어마한 말술인지 살짝 불그스름해진 얼굴에 비해 정신은 멀쩡한 편이었다.

    달라진 건, 다정의 웃음이 헤퍼졌고 우석 역시 줄기차게 맞장구를 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맨정신엔 차분해 보이던 두 사람이 다소 격앙되어 새로운 인격체로 거듭난 것이다.

    성후는 입이 없는 전봇대처럼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는 참을성이 많은 남자가 아니었다.

    과거 회상이 길어지자, 슬슬 짜증이 밀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거, 저도 아는 얘기 좀 합시다. 도랑에서 고동인지 뭔지 잡은 얘기 말고요.”

    그러자 느른한 눈빛의 다정이 꺄르르 웃으며 말했다.

    “아 맞다, 내 남친 마성후 씨도 여기에 있었지~ 푸힛!”

    “그런데 정말 네 남자친구 분이셔?”

    “응? 으흐흐흐흐흐. 그렇게 됐어.”

    다정이 재미있다는 듯 입을 막으며 낄낄 웃었다. 소녀와 원숭이 사이쯤으로 보이는 해괴한 웃음이었다.

    “언제 연애를 다 했대?”

    가벼운 투로 물었지만, 우석의 마음이 절대 가볍지 않다는 것을 성후는 느낄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술을 적게 마시기도 했고 온정신을 다정에게만 집중했던 터라, 애초에 취하지도 않았다.

    “아뉘~ 엄청 갑작스럽게 생겨 버렸어~”

    “갑작스럽다니??”

    우석이 때를 놓치지 않고 몰아붙였다.

    “그래! 말 나온 김에 나도 한번 물어보자!”

    다정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 성후를 쳐다본다.

    “저기, 마성후 씨!”

    노려보는 것 같기도 했고 유혹하는 것 같기도 한 눈빛이었다.

    젠장. 하다 하다 이제 술주정까지 귀엽다니.

    두 남자를 곁에 끼고 있는 다정이 괘씸해, 성후가 냉정한 얼굴을 유지한 채 대답했다.

    “왜요.”

    “처음 저한테 키스한 그 날…”

    여전히 풀린 눈이었지만, 묻는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낮았고,

    “왜 했어요?”

    단 하나의 질문으로 두 남자의 심장을 동시에 움켜쥐었다. 특히나 가슴이 철렁한 우석이 초조한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것을 의식한 성후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지금 말해도 됩니까.”

    “네, 말하세요.”

    망설임 없이 당당하게 뱉는 말에 우석의 마음이 쓰라렸다. 지금 이 순간 다정의 안중에 우석이 없다는 건, 바꿔 말하면 그가 남자로 보이지 않다는 말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못되게 구는 그 입을 틀어막고 싶었습니다. 굴복, 시키고 싶었달까.”

    “아.”

    무슨 기대를 했던 걸까. 다정도 가슴이 쩍 갈라지는 고통을 느꼈다.

    “두 번째는.”

    다시금 그의 입이 열렸고 다정의 눈이 성후의 눈동자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 야릇하고 새카만 눈동자에 푹 빠질 것만 같았다.

    “두려워하는 게 안쓰러웠습니다. 바들바들 떠는 것이 나뭇가지에 걸린 아기 새 같았거든요.”

    그 말에 다시금 술이 확 오른 듯, 얼굴이 뜨거워지는 다정이다.

    “또.”

    또?!

    “아아. 그만! 이제 괜찮아요….”

    그렇게 말한 뒤 차가운 맥주를 벌컥벌컥 넘기는 다정이다. 뜨겁게 타올랐던 심장이 조금은 식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처음부터 당신한테 끌렸던 것 같습니다. 못된 말을 따박따박 하는 그 입이 미울 만도 한데, 만나야 할 상대를 만난 것처럼 어딘지 모르게 친숙했습니다. 뿐입니까. 점점 가물거려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직설적인 고백이 연타로 쏟아지자, 다정이 두 눈을 가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술 너무 마셨다. 일어나자.”

    침착한 목소리로 우석이 말했다. 깜빡 잊고 있었던 우석의 존재가 갑자기 묵직하게 와 닿았다. 다정도 얼떨결에 대답했다.

    “아아 그래야지.”

    친구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다니, 조금 머쓱하기도 했다.

    “데려다줄게요.”

    성후도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고 다정에게 손을 뻗었다. 이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라는 뜻에서.

    “아니, 제가 데려다주겠습니다.”

    우석은 다정의 코앞까지 다가가 먼저 손목을 잡았다.

    “가자.”

    성후의 혈압이 치솟는다.

    “……잠깐. 술 취한 여자를 아무 남자와 보낼 순 없습니다.”

    우석의 목덜미도 뻐근해졌다.

    “…아무 남자? 내 눈엔 당신이 ‘아무 남자’입니다. 다정이는 저와 어릴 때부터 봐왔던 가족 같은 사이라고요.”

    “가족이라.”

    너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성후가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살벌한 분위기에 다정이,

    “저기…”

    라고 입을 열었지만, 아무도 그녀를 주목하지 않았다. 그저 남자 둘이서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볼 뿐이었다.

    “그리고 아까 분명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밥 먹고 친구 만나라고. 남자가 치졸하게 한 입 갖고 두말하는 겁니까?”

    남자다운 외모완 달리 평소 공격적인 말투를 쓰지 않는 우석이었다. 해서 따지듯 말하는 모습은 다정에게도 낯설었다.

    “아아.”

    성후가 자신이 했던 말이 이제야 기억이 났다는 듯, 피식 웃었다.

    “제가 그런 말을 했었죠. 그러세요. 생각해보니 그편이 낫겠습니다.”

    허락하는 말투가 상당히 거슬렸지만, 우석은 다정을 생각해 꾹 참았다. 하지만 오늘로써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술 취한 여자에게 남자보단, 친구가 안전할 것 같으니.”

    내일부터 체육관 샌드백 이름은, ‘마성후’가 되리란 걸.

    * * *

    서류들이 잔뜩 쌓인 은밀한 방엔 알싸한 소독약 냄새와 함께 무거운 공기가 가라앉아 있다.

    “등잔 밑이 어두웠네.”

    이곳엔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매끈한 다리를 꼬고 있는 여자와,

    “사모님, 한 번만. 한 번만 살려 주세요…!”

    바로 앞에 무릎을 꿇고 싹싹 빌고 있는 가경.

    그녀는 공포에 질렸고 얼굴은 젖어 엉망이었다.

    “더러운 년.”

    김동학 교수의 아내는 높은 하이힐로 남편의 불륜 상대 허벅다리를 쿡 찔렀다.

    “네가 감히,”

    꾸욱.

    “내 남편이랑 놀아나고도,”

    꾸욱.

    “그간 날 보고 웃었어……?”

    그리고 하이힐로 허벅지를 뚫을 듯 비틀었다.

    “꺄악…!”

    가경이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여자의 손이 날렵하게 뺨을 내리쳤다. 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소름 끼치도록 냉랭한 목소리가 따라 들렸다.

    “그 입 닥쳐. 확 찢어버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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