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30화 (30/82)
  • 30화. 기 센 남자들

    회의실에 모인 병원 관계자들의 얼굴이 어둡다.

    ‘은명 대학병원’은 SNS에 퍼진 간호사의 불륜 사건으로, 며칠간 매스컴에 노출되고 있었다.

    금방 묻힐 것이라며 시답지 않게 여겼던 것이 오늘날의 불행을 자초한 것이었다.

    사태는 점점 커졌고 죄 없는 의사들의 사생활마저 노출되는 사건들까지 연이어 일어나면서 의료진들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역시 뚝 떨어진 병원의 위상으로 그것은 곧 수익과 연결되었다.

    “이 사태를 어떡하면 좋습니까.”

    근엄한 목소리를 내는 자는 은명 대학병원의 투자자이기도 하면서 운영진이었다.

    “대책을 강구해야겠지요.”

    병원장은 심각한 말투로 두루뭉술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니까 무슨 대책 말입니까?”

    투자자의 따가운 말투에, 병원장의 매운 눈초리도 기조실장에게로 향했다. 뭐든 어떻게든 해보라는 재촉이 담긴 눈빛이었다.

    “에… 저…”

    광대를 긁적이며 조심스레 입을 여는 기조실장.

    “생각을 해봤는데…”

    자신 없는 목소리였지만, 그럼에도 모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조실장을 주목했다.

    “저희 의료진 중에 모델을 하나 발탁해서 방송에 노출을 시키면 어떨까 싶거든요…. 요즘 그런 마케팅을 많이 쓰는 것 같더라고요. 그 김에 자연스레 의료 봉사활동 얘기도 흘리고…”

    머뭇머뭇 말을 끝내자 관계자들의 얼굴에 점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래 그거 괜찮겠구만!”

    “동감일세.”

    “내 생각도 같네!”

    여기저기서 같은 마음이 모였다. 그 바람에 살짝 들뜬 병원장이 다시 기조실장에게 물었다.

    “모델이라… 그래, 생각해둔 적임자는 있고?”

    위기를 넘겼다 싶어, 안도하고 있던 기조실장은 또다시 날아드는 질문에 깜짝 놀랐다. 이럴 때일수록 기지를 발휘해야 하는 법. 기조실장은 최대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요즘은 비주얼 시대인지라. 실력은 중상인데 인물 좋은 사람 중에 뽑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교수들은 보통 나이가 있으니 전문의라든지.”

    “인물이라…….”

    기조실장 말에 동의하면서도 모두 마땅히 떠오르는 인물은 없는 눈치였다. 찌푸려진 미간과 소음이 사라진 회의실 안은 몇몇 고개만 갸웃할 뿐이었다.

    “으음, 그러면 간호사는 어떻겠습니까?”

    이번에는 제법 자신감 있는 어투의 기조실장이다.

    “간호사??”

    “네. 서민들이 친근감을 느낄 수도 있고 해서, 좋을 것 같습니다.”

    “대학병원 대표로 간호사가 딱히 자문할 일도 없고. 업무도 어찌 보면 단순 노동이고. 요즘 태움이니, 뭐니 말들만 무성한데……. 방송 거리가 있을까?”

    “아니면 다큐도 괜찮고요.”

    “생각나는 인물은.”

    “……어렴풋이 있기는 한데, 이건 업무와는 별개의 일이니까.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기조실장은 용맹한 기사가 깃든 것처럼 제법 유능한 눈빛을 뽐내며 대꾸했다. 마치 계획을 다 세워뒀다는 듯. 덕분에 운영진들 앞에서 모처럼 기가 산 병원장이 입꼬리를 삐쭉 올리며 말했다.

    “자네가 책임지고 알아보게.”

    “네.”

    * * *

    우석의 목에 둘린 하얀 수건은 눅눅했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눈 안으로 들어온 땀을 훔쳐낸다. 땀 냄새가 밴 수건을 탁하고 털자 금방이라도 물기가 떨어질 것만 같았다.

    “하아, 하아…”

    격한 운동을 끝낸 그의 근육질 몸이 체육관 조명을 받아 번쩍거렸다.

    그때 버려둔 듯 던져놓은 가방 속에서 멋없는 기본 벨소리가 울렸다.

    오늘 분 단련을 끝낸 우석이 뻐근한 다리를 움직여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어.”

    -운동 끝났어?

    “그렇지, 왜.”

    -들어봐.

    참새와 다른 바 없는 승주의 수다가 시작되려는 모양이다.

    우석은 어깨와 머리 사이에 핸드폰을 끼워두고 맨몸에 바람막이 집업을 걸쳤다. 눈으로 관장님에게 인사한 뒤 체육관 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훅 불어 닥친다. 바람처럼 기분도 상쾌해졌다.

    -얼마 전에 다정이랑 여진이랑 고깃집을 갔었거든.

    “아, 여진이.”

    서울에 왔다던 기봉의 여동생을 미처 챙겨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근데 너희끼리만?”

    우석이 미간을 설핏 구긴다.

    -널 데려갈 수가 없는 자리였어.

    “그게 무슨 말이야?”

    철근 계단을 내려가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던 우석이 승주의 다음 말에 발걸음이 멈췄다.

    -그날, 다정이 좋은 형 소개해주려고 만든 자리였거든.

    “좋은 형?”

    하아…….

    속에서부터 한숨이 끓어오른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바짝 날이 선 말투가 되고야 말았다. 다행히 승주는 그리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니어서 쉼 없이 수다를 이어갔다.

    -그런데 다정이가… 웬 환자의 전화를 받고 사색이 되어서 쫓아나가더라고.

    “환자? 환자가 어떻게 간호사한테 직접 전화를 해?”

    -그러니까 말이야. 다정이가 음청 걱정하는 눈치였거든. 그래서 말인데, 다정이한테 남친 생겼단 얘기들은 적 있나 해서. 아무래도 진한이 형이 다정이한테 관심 있는 거 같아. 정말 좋은 남자라 두 사람 꼭 이어주고 싶어.

    답답한 마음에 제 얼굴을 연신 쓸어내리는 우석이다.

    “…….”

    막을 수 없는 감정을 인정한 순간부터 언젠가 다정에게 고백해야겠단 다짐을 했던 터였다. 그 언제는, 그녀를 책임질 수 있는 기반을 갖출 때여야 한다고 믿었기에 오랫동안 미뤘었다.

    앞서는 마음 하나로 덤비기엔, 그 마음이 독할 정도로 깊었고, 지르고 깨트리기엔 친구로서의 관계도 남자로서의 마음도 이미 한계치를 넘은 지 오래다.

    “…나중에 얘기하자. 전화 들어온다.”

    전화를 끊은 우석이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몇 번의 터치로 다정의 연락처가 찍힌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그러다 이내 결의에 찬 표정으로 통화키를 눌렸다.

    * * *

    며칠의 밤을 병원에서 보냈다. 교대 근무로 바이오리듬이 깨진 지 몇 년. 고단함 같은 건 망각할 정도로 일상적이다.

    대개의 간호사가 그렇듯 불면과 위장장애를 안고 살아가지만, 승강기를 거의 이용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녀의 삶은 매일이 운동의 연속이었다. 때문에 여타 간호사들 보단 체력이 좋아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수고하셨습니다!”

    인수인계를 받은 누리가 활기차게 인사를 해주었다.

    “고생해요.”

    마지막 야간 근무를 마치고 비상구 계단으로 향하는 다정. 이틀을 쉬고 돌아오면, 다시 아침반 생활이 시작된다.

    솔직히 요즘 같은 경우는 조금 두렵다.

    병원 사람들 사이에서 여전히 김 교수와 전담 간호사의 불륜은 식지 않는 화젯거리였고 덩달아 다정도 옵션처럼 언급되었다. 그래서 많은 이의 주목을 받는 데이(낮) 근무보다는 차라리 나이트(야간) 근무가 더 좋았던 며칠이었다.

    “하아….”

    묵직한 마음으로 비상구 계단을 내려가는데 통창 유리를 통해 아스라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어두운 마음을 조롱하듯 눈이 부신 햇빛이 말이다.

    마지막 일 층에까지 내려오자 익숙한 인영이 불쑥 제 앞에 나타났다.

    “여.”

    아까 저녁에 전화를 주었던, 우석이었다.

    “응?”

    다정은 잘못 본 게 아닐까 하고 두 눈을 비벼보았다. 건강미 넘치는 까만 피부에 푹 눌러쓴 야구모자와 계절을 잊은 바람막이 트레이닝복. 모두 다정의 눈에 익은 것들이었다.

    “고생했다.”

    새하얀 치아를 고르게 드러내며 우석이 말했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웬일이야?”

    인사를 생략하고 의문부터 꺼내 놓는 다정이었다.

    “운동 삼아 와봤어. 마침 네가 아침에 마친다고 하길래, 같이 밥이나 먹을까 하고.”

    “배 별로 안 고픈데….”

    우석의 눈에 다정의 볼이 조금 꺼진 듯 보였다.

    “무슨 일 있었냐.”

    “일은 무슨. 하루가 매일 똑같아 지루해 죽겠어.”

    그때 다정의 등 뒤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비상구 계단에서 사람이 나오려는 모양이었다. 반사적으로 길을 텄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온 또 다른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며칠 내내 저만큼이나 침묵을 지키던 사람, 성후였다. 그것도 환자복이 아닌 깔끔한 사복으로.

    “걱정했습니다. 집에 갔을까 봐.”

    그가 다짜고짜 그렇게 말하자, 우석이 설핏 미간을 구겼다.

    누구지?

    음악은커녕 온갖 문화와 담쌓고 우석이 성후를 알아볼 리 만무했다.

    “무슨 용건이라도?”

    다정의 깊은 눈 속에 초조한 성후의 기색이 비쳤다.

    낮에는 너무 바쁘고 치열하게 사는 다정이 툭 치면 깨질까 추근거리지 못했고, 요 며칠의 밤에는 마음을 다독일 시간이 필요할 듯하여 욕심을 꾹 참고 내버려 두었다.

    오직 다정을 보기 위해 입원한 병원에서 그녀에게 제한적으로 굴기란 절대 쉽지 않았다. 그 모든 인내가 다정을 귀히 여기는 고귀한 마음에서 기인하였다.

    “네. 선생님 마음이 허기진 것 같아, 같이 밥이라도 먹었으면 해서요.”

    다정의 눈이 우석에게 향했다.

    “저… 친구가 와서.”

    며칠을 참았던 성후는 더 이상 그녀를 누군가에게 양보할 인내심 같은 건 남아있지 않았다.

    “저는 남자친구이지 않습니까.”

    성후의 말에 우석의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둔중한 통증을 온전히 느끼며 낯선 남자가 했던 말을 곱씹어보았다.

    남자… 친구?

    그 순간 돌변한 우석의 눈빛을 읽어버린 성후다. 다정을 바라보는 친구라는 사내의 눈. 그건 필시 자신의 마음과 같았다.

    아니.

    간직한 마음을 오래 삭였는지, 애틋함의 깊이가 남달라 보였다.

    순간 남자들의 마음속에 한줄기 불꽃이 점화되었다.

    연유는 모르나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다정도 읽었다.

    “성후 씨, 그건…”

    위기를 느낀 성후가 다정의 말을 재빨리 잘랐다.

    “저랑 밥부터 먹읍시다. 그러고 나서 친구분과 시간 보내요.”

    다정이 거리를 두도록 손 놓고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그러자 우석이 다정의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겠습니다. 보아하니 선약하신 것도 아닌 것 같네요. 다정이한테 식사 제안은 제가 먼저 했으니 오늘은 남자친구라도 양보해주시죠.”

    그가 몇 초의 시간을 흘려보낸 뒤 매섭게 강조했다.

    “매너있게.”

    강인한 정신세계를 보여주듯, 흔들림 없는 우석의 눈빛이 무척이나 꼿꼿하다.

    …이것 봐라?

    성후의 잘생긴 오른쪽 눈썹이 치켜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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