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29화 (29/82)

29화. 다정의 경고

다정은 열심히 고기를 구웠다. 낯선 사람과 말을 섞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아서였다. 여진은 전투적으로 고기를 먹으며 떠들었고 승주는 진한과 다정의 안색을 놓치지 않고 살폈다.

“일 마치시고 바로 오신 거예요?”

진한이 먼저 다정에게 말을 붙였다. 조금은 딱딱해 보여도 단정한 다정의 인상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네.”

“간호사시라고 들었어요. 멋진 일을 하시는군요.”

진한이 한 번 더 말을 걸자, 엉뚱하게 승주의 가슴이 뛴다.

오오. 형…! 직진…! 싸나이…!

“안 훌륭한 일이 있나요.”

싱긋 웃는 다정의 미소. 예를 갖추되, 선을 그을 때 짓는 미소였다. 그것을 아는 승주가 다정에게 설명했다.

“이 형은 안무가야. 유명한 가수들이랑도 작업하고 해.”

“오옷…!”

눈을 반짝이는 건 여진이었다. 그녀의 리액션을 보며 다정이 피식 웃음 지었다.

“거봐요. 진한 씨도 멋진 일을 하시잖아요.”

“나는? 나는?”

승주가 물어왔다. 그러자 다정이 허물없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미래까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은 멋진 일 같더라.”

능숙한 손놀림으로 예쁜 빛깔의 칵테일을 만들던 승주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늘 철이 없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제법 자기 일에 긍지를 가지고 즐기는 모습은 그래, 꽤 멋있었다.

“오, 다정이한테 인정받았어!”

“다만 탈선의 여지가 크다는 것! …무슨 말인지 알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친구에게 잔소리하는 다정의 모습이 퍽 인간미 있게 느껴지는 진한이었다. 연이 이렇게 닿았으니 급하게 굴지 말자는 생각을 하면서 소주를 한 병 시킨다.

그리고 제 술잔을 채우고 있는데 다정이 술잔의 앞에다 소리가 나게 손가락을 부딪쳤다.

“…응?”

그것은 남자 친구들과 근 10년을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며 생긴 버릇이었다. 버릇은 독한 것이어서 생각보다 먼저 손이 나가버렸다.

“아, 자작은 재수가 없다길래……”

이게 웬 개 쪽인가, 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진한이 피식 웃었다. 마치 그런 다정이 귀엽다는 듯이.

어어?

묘한 분위기를 읽은 그녀가 빠르게 시선을 거두었다.

왠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꼭 불륜의 첫 시작점에 와있는 것처럼. 떡 줄 사람은 아무 생각도 없이 태평할 텐데, 홀로 성후를 떠올리는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잠시간 영혼이 성후에게 날아간 탓인지, 가방 속에 담겨있던 핸드폰이 진동으로 떨리는 걸 캐치했다.

“여보세요?”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습니까.

다짜고짜 묻는 까칠한 목소리가 반갑고 설렜다.

“무슨 일 있어요?”

-…네.

“뭔데요?”

다정의 얼굴에 희미한 긴장이 어리자, 친구들이 모두 그녀를 주목했다.

-……아픕니다.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다정. 그 바람에 동그란 의자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어디가 어떻게요? 다른 의료진들은요?”

-…….

“마성후 씨!”

-…빨리 좀 옵시다. 온 선생이.

“지금 갈게요!”

휴대폰을 가방에 찔러 넣고 다정이 다급하게 말했다.

“미안한데 나 지금 가봐야겠어. 맡은 환자가 지금…”

“환자가 간호사 번호를 알아?”

승주가 물었고, 진한이 덧붙였다.

“급해 보이는데 어서 가보세요.”

“그래 언니 어서 가봐!”

“만나서 반가웠어요. 너희들도. 나중에 연락할게!”

고깃집을 등지고 나와 택시를 잡으려는데, 급할 땐 꼭 택시가 잡히지 않는다. 발을 동동 굴리며 근무표 앱을 열어본다. 병동에 남아있을 간호사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되지 않는다.

초조한 마음에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누리다.

“신규 쌤. 지금 택시 타고 가는데 마성후 환자한테 좀 가보세요.”

그 순간 택시가 잡혔다.

-네?? 아…… 왜요?

“급해요, 빨리!”

다정을 태운 택시가 빠르게 그녀를 병원에 데려다주었다.

머릿속엔 걱정으로 가득했지만, 똑똑한 몸이 버릇처럼 움직여 그녀를 성후의 병실 앞으로 데려다주었다.

똑똑.

똑똑똑!

노크해도 기척이 없다.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문고리를 잡자, 때마침 지나가던 누리가 고개를 갸웃한다.

“아니, 어쩐 일이세요?”

“마성후 환자는요?”

다정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마성후 환자라면……”

누리는 아까의 일을 기억해냈다.

다정의 전화를 받고 있을 때 제 앞을 유유히 지나가던 성후의 손에는 초코 우유가 들려 있었다. 꽂은 빨대를 쪽쪽 빨면서.

그때 성후의 병실이 열렸다. 그가 잠시 누리와 다정을 번갈아 보더니 손을 쭉 뻗어 다정을 낚아채,

“…어!!”

병실 문을 닫았다. 깜짝 놀란 다정이 닫힌 병실 문에 등을 붙이고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

“아프다면서요.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요? 손가락이요? 몸이요? 아니면 머리?”

급하게 뛰어온 건지 흐트러진 긴 머리와 초조한 얼굴. 그리고 쫙 달라붙는 청남방과 청바지를 함께 입은 그녀가 유난히 관능적으로 보였다.

그런 분위기가 결코 아닌데 말이다.

성후는 다정의 손을 잡아 단단한 제 가슴에 붙였다. 너 때문에 애가 탄 가슴이 몹시 쓰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다정이 성후의 몸을 거침없이 더듬었다.

“…흡!”

막무가내로 더듬는 손길에, 도리어 성후가 당황한다.

“왜요? 가슴이 아프다고요?”

계속해서 터치하는 손길엔 막힘이 없었다. 이건 여자의 손길이 아니라, 의료진의 손길이다. 그럼에도 성후는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겨우 이성을 붙잡고서 속으로 자신을 나무랐다.

지금 흥분하면 너 진짜 미친놈 되는 거다, 마성후!

“의사 선생님 불러올까요? 가슴이 답답? 숨이 막 차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공황장애가 그를 급습한 건 아닌지 몹시 걱정스러운 다정이었다.

“지금 제 걱정에 가슴이 타들어 갑니까.”

성후가 바쁜 다정의 손을 턱 잡고서 말했다.

“당연하죠!”

“저도요. 저도 그렇습니다.”

다정이 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눈을 깜빡였다. 몇 초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니까 물리적으로 아픈 곳은 없다는 말이 아닌가. 그의 말을, 아마도 이해한 다정은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아프다는 거로 장난치지 마세요.”

그리고 성후의 병실에서 매몰차게 나와 버렸다. 속았다는 분함보다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안도감이 온몸에 퍼졌다. 곱씹으면 짜증이 날만도 하지만, 그녀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저를 향해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누리 때문에.

“선생님!”

그 순간 자신이 방금 닫았던 성후의 병실 문이 다시금 열렸다.

다정의 앞에는 누리가, 뒤로는 성후가 막고 있는 것이다. 마치 샌드위치처럼. 어디 한 구석 도망갈 곳이 없다.

그때 누리가 거의 울먹이면서 입을 열었다.

“사실은…… 온 선생님 이상한 소문 났을 때……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었거든요.”

소문?

다정이 미간을 찌푸린다.

“소문이라니요?”

“그렇게 생각하니 저도 휩쓸려 선생님을 오해한 것 같더라고요. 죄송해요.”

“나 지금 신규 쌤 말이 전혀 이해가 안 되는데요?”

누리가 입을 움찔움찔하다 다시 무겁게 입을 열었다.

“김동학 교수님 사모님이 얼마 전에 찾아왔었잖아요. 그 이후로도 계속 온 선생님이랑 김 교수님 사이가 그렇고 그렇다고……”

성후는 다정이 걱정되어 그녀의 어깨를 잡아 몸을 돌렸다.

자신이 앞서 그녀의 기분을 망쳤건만, 연타로 쏟아지는 얘기들로 혹여나 그녀가 견디기 힘들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상외로 다정의 얼굴은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녀는 성후를 잠깐 올려다보며 제 어깨에 놓여있던 그의 손을 치웠고 다시 누리를 바라보았다.

“근데 그게 왜 이제 오해라고 믿는 건데요? 방금까진 그런 말 없었잖아요.”

마치 익숙한 상황인 듯 침착한 다정의 목소리에, 성후의 가슴이 미어졌다.

이 여자도 아는 거야. 자신이 얼마나 많이 구설에 오르는지.

“왜, 김동학 교수님 전담 간호사 선생님 있잖아요. 가경 쌤이라든가.”

“네.”

“그분이 어젯밤 인스타에 사진을 한 장 올렸는데… 홍콩이라고 테크되어 있던 레스토랑 유리창에…… 사진을 찍어주는 김 교수님 모습이 비쳤어요.”

근래 들었던 얘기 중, 가장 충격적인 얘기다.

“그, 그 말은?”

“네. 김 교수님 불륜녀가…… 가경 쌤 같아요.”

그 순간 다정의 뇌리를 스치는 기억.

무수하게 울리는 김 교수의 전화벨. 앙칼지게 쏟아져 나오던 젊은 여자 목소리. 그리고 ‘좋은 아빠’ 가면을 쓴 그의 연기와,

‘딸아이 입맛이 너무 까다로워서 말이야. 미리 고증의 절차를 밟아두려고 왔네. 수험생이라 스트레스가 많거든.’

‘교수님 정말 좋은 아버지시군요.’

맞장구치던 자신의 순진한 목소리도. 다정은 암담한 심정이 되어, 핑글 도는 머리를 받쳤다.

“나도 들었어. 네가 마음고생 많이 했겠다.”

걱정하는 목소리로 다가온 사람은 부연이었다. 다분히 성후를 의식한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하이톤의 목소리 때문인지 욱신거리는 다정의 머리가 더욱 강렬하게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성후는 염려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 빌어먹을 병원, 진짜 다 부숴버리든가 해야지!

허나 당장은 무력하다.

“그런데 말이야, 진짜 김 교수님 대박이지 않니?”

“그러게요…”

부연의 말에 누리가 작은 목소리로 맞장구쳤다.

“그 사모님도 무식하고 그 간호사도 천박해. 어쩜. 사람들이… 괜히 온 선생만 피해 봤잖아.”

“피해 봤다고 생각했으면 넌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좀처럼 선을 잘 지키는 다정의 입에서 아주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움찔한 부연이 말했다.

“어떻게 말해, 너랑 김 교수님이 밥 먹는 걸 버젓이 봤다는 증인들이… 헙. 아무튼, 네가 아니면 됐잖아. 넌 당당하잖아. 마음 풀어~.”

남 일이라고 말이 참 쉽다.

“진짜 가경 쌤 그렇게 안 봤는데,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르긴 하네. 그치?”

부연이 흥미로운 얼굴로 쫑알거렸다. 생각 없이 떠들기를 좋아하는 저 입이 말이다. 누리는 무서운 표정의 성후와 상처받았을 다정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맞장구는 후임의 사회생활이다. 누리는 난처한 기색으로 조그맣게 대답했다.

“하하… 네에…”

그때.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다정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제발 남 일에 입들 대지 마. 내가 저승사자라면, 지옥에 데려가자마자 그 세 치 혀들부터 뽑을 거야.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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