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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끔한 것이 좋아-28화 (28/82)
  • 28화. 허니허니 눈빛

    “언제 쉽니까.”

    타닥타닥. 성큼성큼. 타닥타닥. 성큼성큼. 다정과 성후의 엉킨 발소리가 복도를 울린다.

    “언제 쉬냐고요.”

    걸음을 멈추고 성후를 노려보는 다정.

    “일하는 중입니다, 마성후 환자님.”

    “압니다. 담당 간호사한테 언제 쉬냐고 묻지도 못합니까? 선생님이 주사 놔주지 않으면 심적으로 불안해서 그런 건데.”

    “하.”

    그의 말발에 픽 웃음이 터졌다.

    “그런 걱정은 마시죠. 이 병원엔 훌륭한 간호사 선생님들이 정~말 많거든요.”

    그리고 다시 발길을 재촉하는 그녀.

    질세라 따라붙는 성후.

    “그러지 말고 말씀해보세요.”

    다정은 속으로 웃음이 나왔지만, 끝까지 도도한 표정을 유지했을 때였다. 다음으로 들려오는 성후의 발칙한 대사에,

    “하게.”

    저도 모르게 흠칫하는 다정이다. 놀란 다정이 주변을 빠르게 훑다 은밀하고도 무서운 얼굴로 성후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성후가 목을 살짝 뒤로 빼며 미간을 찌푸린다.

    “무슨 생각 하십니까.”

    폭탄이 달린 저 입은 항상 위험하다. 다정이 복화술로 말했다.

    “음담패설은 거기까지 하시죠.”

    “네? 음담패설요?”

    성후의 목소리가 크다.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꽂혔고 다정은 허둥지둥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아, 아니, 목소리 좀.”

    당황한 얼굴로 허공에 손을 휘젓는 그녀가 몹시 귀여운 성후다.

    “목소리 좀?”

    반면, 말꼬리를 잡는 잘생긴 입꼬리가 미치게 얄미운 다정이었다. 복어 같은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성후는 장난은 이쯤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트, 하자고요. 선생님이 기대하시는 거 말고 말입니다.”

    데, 데이트?

    일순 벙진다. 다정은 볼 안을 혀로 훑다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따진다.

    혹시 복수하는 건가요? 망가 마니아로 만들어서?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은 성후가 양 눈썹을 까딱 올렸다.

    “뭐든 받은 건 꼭 돌려주고 싶더라고요….”

    낮게 긁혀져 나오는 목소리는 왜 또 뇌쇄적인가. 다정은 붉어진 얼굴로 그를 스쳐 지나갔다.

    “도망가시는 겁니까?”

    그의 말이 다정의 발목을 잡았고 그녀가 소리쳤다.

    “근무표 보고요!”

    반사적으로 외치는 그녀를 보며 지나가는 중년의 환자가 쿡쿡 웃었다. 속으로 좋을 때라고 생각하면서.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들어온 다정이 눈에 띄지 않게끔, 쑥 쪼그리고 앉아 앱으로 간단히 근무표를 확인했다.

    “헉.”

    “왜요? 쉬는 날이 금방입니까?”

    스테이션 안으로 몸을 기울인 성후가 묻는다.

    “흐익!”

    성후 때문에 더 놀랐다.

    “정답?”

    그가 낮게 키들거렸다. 다정은 정답을 맞힌 그에게 쉽사리 대답을 못 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가 곧 대답이 되었다.

    “그날 뭐할까요? 뭐 먹고 싶어요? 어디 가고 싶습니까?”

    연타로 쏟아지는 저돌적인 물음에 다정이 쪼그려 앉은 채로 올려다보았다. 어서 대답하라는 듯 턱짓하는 그가 무척 뻔뻔하게 느껴져 다시 어이없는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웃지 맙시다.”

    정색하는 그를 보는 다정의 눈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떨리니까.”

    훔쳐 듣던 다른 간호사들의 귀가 빨개졌다. 마침 병동을 돌고 돌아왔던 부연의 눈이 상체를 한껏 엎드린 성후의 등에 꽂혔다. 난리 났네, 아주?

    숨은 듯 쪼그려 앉아 있는 다정과 그조차도 기어이 찾아낸 듯 내려다보는 성후의 눈길이 뜨거워 몹시 배가 아파하지는 부연이었다.

    * * *

    “여진아?”

    -다정이 언니! 오랜만이야!

    “그래. 너 서울 왔다며. 언니가 먼저 전화해봐야 했는데. 늦어서 미안하다.”

    -우리 모두 현생이 너무 바쁘지 않습니까!

    여진은 오래된 기억 속처럼, 여전히 유쾌했다. 소 같은 기봉과는 다르다. 개구쟁이 표 여진의 미소도 덩달아 떠올랐다.

    “나 이제 마쳤는데, 혹시 지금 시간 돼?”

    동생과 연락이 안 된다며 걱정하던 기봉이 마음에 쓰였던 다정이다.

    -물론!

    “네가 있는 동네로 갈게. 어디니?”

    늘 타던 버스가 아닌, 낯선 버스에 몸을 실었다. 새카맣게 칠해진 서울과 형형색색 간판들이 뒤로 밀려난다. 무심히 던진 시선 속에 딱히 머리에 남는 건 없다.

    버스에서 내리자 미리 마중 나와 있던 여진이 거세게 손을 흔들었다. 사람들이 힐끔힐끔 볼 정도로 밝고 호쾌한 마중이었다.

    “여진아!”

    “언니!!”

    친자매 상봉처럼 격렬한 만남이다.

    “너 이 녀석. 뭐 하고 지냈어?!”

    “하하, 맨날 아르바이트하고 극단 오디션 보러 다니고 바빴지이!”

    “그러고 보니 사투리 거의 고쳤네, 벌써?”

    “아 연기한다는 사람이 사투리를 쓰면 되나! 특히 여배우는 아니 됩니다!”

    성격은 달라도 동글동글한 외모가 기봉과 몹시 닮았다.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아주 극명했다.

    “너희 집이 이 근처니?”

    “헤헤. 나 아직 고시원에 살아.”

    기봉에게 들었지만, 모르는 척하고 재차 묻는 다정이다.

    “오호, 그래? 언니 초대 좀 해줘 봐.”

    “집들이 선물 있나요~~~?”

    “그럼 라면이라도 끓여주나요?!”

    “쿡쿡쿡. 거래 완료!”

    “하하하.”

    동네에서 함께 커서 그런지 죽이 척척 잘 맞는다.

    타박타박 걸어, 조금은 낡은 고시원 앞에 섰다. 음산한 분위기까진 아니지만,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다정의 표정을 읽었는지 여진이 쾌활하게 말했다.

    “여기가 이 근방에서 제일 싸!”

    “으음. 들어가자!”

    오는 길에 슈퍼에 들렀던 다정의 손에는 세제와 먹거리가 잔뜩 들려 있었다. 모두 신난 여진이 고른 것들이었다.

    여성들이 거주하는 층이라던 삼 층으로 올라오니 언제 고장 났는지 모를 깜빡이는 센서 등이 두 사람을 반겼다. 그것을 쳐다보는 다정의 표정이 역시나 좋지 않다.

    여진은 멋쩍은 웃음을 머금으며 제 방으로 다정을 안내했다. 개인 욕실은커녕 창문 하나 없는 방을 보자 다정의 가슴이 따끔거렸다.

    “자꾸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라? 원래 배우의 시작은 고달픈 법이니까!”

    “같이 살자.”

    다정의 말투가 비장했다.

    “음? 내가 방금 청혼 비슷한 걸 들은 거 같은데?”

    “농담 말고.”

    다정이 정색하며 덧붙였다. 그러자 여진도 찰나의 침묵 이후 생각을 꺼내 놓는다.

    “나 괜찮아. 혼자서도 잘하고 싶어.”

    “굳이 혼자서 잘할 필욘 없어. 아니, 혼자이기도 하겠네. 그냥 내 집에서 같이 살기만 하자는 거야.”

    “싫어.”

    “왜 싫어??”

    답답한 다정이 조금은 신경질적인 말투로 물었다.

    “나 서울 온 거 집에서 반대해. 그래서 언니 도움받으면서 편하게 있고 싶지 않아. 처음부터 내 힘으로 이겨내는 거 반드시 보여줄 거야.”

    “……오기하고는.”

    “흥! 오기래도 그렇게 할 거라고! 정 불쌍하면 자주 밥이나 사줘! 지갑을 자주 열란 말이야!”

    여진의 농담에 다정이 피식 웃음 지었다. 그때 옆방에서 벽을 쿵 하고 쳤다. 두 사람은 놀란 눈빛을 교환하며 각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여진이 조곤조곤 말했다.

    “주방으로 가자. 라면 끓여줄게.”

    다정이 고개를 끄덕이는 찰나 핸드폰 벨이 크게 울렸다.

    “허억! …여보세요…!”

    허둥지둥 전화를 받는 다정을 보며 쿡쿡 웃는 여진이다.

    -어디셈?

    승주다.

    “밖. 왜?”

    -밥 사줄게. 나와.

    “밥?”

    다정의 되물음에 여진의 얼굴에도 순수한 호기심이 어린다. 그런 여진에게 다정이 피식 웃으며 “승주야.”라고 알려주었다.

    -너한테 신세도 졌고. 월급도 탔고. 고기 파티 어때?

    “오호. 그러시다면야. 마음껏 먹어도 되는 거야?”

    -당연한 말씀을.

    “여진이도 같이 간다?”

    -여진이랑 같이 있어? 좋지! 빨리 와. 여기가 어디냐면……

    여진이를 데리고 고시원을 나온 다정은 제일 가까운 택시를 잡아탔다.

    “진짜 나까지 가도 되는 거야?”

    여진이 아이처럼 상기된 얼굴로 물어온다.

    “제대로 못 먹고 살았을 거 아니야.”

    “아닌데. 잘 먹었는데.”

    “후후. 무슨 라면이 그렇게 맛있든?”

    농담 삼아 던진 질문에 여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비장해졌다.

    “묻는다니 알려주지. 비빔면에 송송 썬 김치와 고추 참치를 넣어 먹으면 존맛탱이거든. 그리고 불닭볶음면에 치즈를…”

    “됐습니다. 라면 박사님. 오늘은 고기 파티로 가죠. 너도 승주 오랜만에 보는 거 아니야?”

    “맞아, 울 귀염둥이 승주 오빤 잘 있지?”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다정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SNS 보니까 많이 맵시 있던데~”

    “개뿔.”

    제대로 된 인간이 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어!

    하지만 그런 말까진 뱉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해 식당에 들어서니, 동그란 양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승주와 낯선 남자 얼굴이 보였다. 음? 누구지?

    다정과 여진이 다가가자, 승주가 과하게 두 사람을 반겼다.

    “오오오. 왔어? 앉아, 앉아.”

    “아, 어….”

    낯을 가리는 다정의 표정이 급속도로 차분해졌다. 여진의 눈은 세련된 ‘오빠들’에게 콕 박혔다.

    “음 이 형은… 내가 신세 진 게 많아서 시간 되는 김에, 같이 밥 먹자고 했어. 괜찮지?”

    면전에 대고 묻는데 안 괜찮다고 할 리가 있나.

    “응.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고진한이라고 합니다.”

    울리는 목소리가 침착하다. 사람은 끼리끼리라고 하던데. 그 선입견을, 신사적인 분위기의 남자가 깨트렸다. 그의 속까진 알 수 없겠지만, 일단 첫인상은 그랬다. 이승주와는 완전히 다른 기운의 남자.

    “온다정이에요.”

    “전 정여진입니당~”

    여진도 20대 초반의 풋풋함이 담긴 인사를 건넸다. 동시에 승주의 속에서 여진이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리란 기대감이 들었다.

    여진아. 오늘 고기 잔~뜩 먹고 열일해라! 오빠가 맘껏 사줄게!

    * * *

    “아니, 집에 갔으면 갔다… 말이 없어?”

    조용한 핸드폰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성후.

    “먼저 전화해보시죠.”

    연석이 말했다.

    그 말을 기다린 사람처럼 성후가,

    “그럴까?”

    라고 되물었다.

    그런 그의 반응이 재미있어 연석이 무심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한다.

    “형님이 애가 타 죽겠다면 말이에요.”

    불과 두 시간 전쯤에 마지막으로 봤는데 벌써 애간장이 녹은 티를 낼 순 없었다. 보는 눈이 없다면 모를까. 성후는 휴대폰을 무심히 던져놓았다.

    “오호라, 나는 별로 당신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 이대로 끌려가지 않겠다…? 밀당 중이시군요.”

    성후는 팔짱을 끼고 눈을 질끈 감았다.

    “딱 한 시간. 한 시간만 더 기다려 보고.”

    “왜요? 그냥 지금 당장…”

    그때 성후가 감은 눈을 부릅뜨고 연석을 쳐다보았다.

    “너무 질척대다 도망가면 어떡해.”

    그의 말에 연석의 속에 다정의 영혼이 깃든 것처럼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더러운 미소는 뭐지?”

    “아닙니다.”

    “앞으로 더욱 조심해, 그런 미소는.”

    “네, 알겠습니다.”

    “나가 봐.”

    “왜요?”

    기다리는 동안 그녀의 프로필 사진이나 맘껏 보게. 활짝 웃는 사진이 무지하게 귀엽더라고.

    속에 있는 말을 뱉지 못하고서 성후가 인상을 썼다.

    “나가라면 좀 나가.”

    “성질은…… 아아, 또 속마음이 말로. 나가보겠습니다. 쉬세요.”

    주둥이가 깃털인 비서가 나가고 성후가 다정의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사진 속 그녀를 쳐다보는 성후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지나치게 예쁘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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