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양심의 유무
부연의 마음이 초조하다. 가슴은 벅차게 뛴다.
마치 꿈에서 조상이 로또 번호를 희미하게 알려준 것처럼, 어쩌면 내가 당첨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고약한 희망이 그녀의 가슴을 이토록 뜨겁게 달구었다.
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그녀다.
“일단 움직여 보고 결정하자.”
“뭘요?”
묻는 누리의 눈에 순수한 궁금증이 어렸다.
“우, 운동. 서른 줄에 들어섰더니, 관리 좀 할까 싶어서. 하하.”
“지금도 충분히 훌륭하신데. 자기 관리하면 신 선생님이세요.”
누리가 앙증맞은 검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부연의 콧대가 우뚝 솟아오른다.
“이쯤이야 뭐. 잠깐 라운딩 돌고 올게.”
“같이 갈까요?”
“아니 아니, 됐어.”
간호사 스테이션을 등지고 조용히 복도를 걷는다. 걷는 동안 신분 상승의 희망 때문인지 가슴이 다시금 쿵쿵 뛴다.
암만 생각해도 내가 온다정보다 꿀리는 게 없어. 심지어 몸매 사이즈도, 내가 더 날씬할걸?
자기세뇌를 다지며 성후의 병실 앞에 다다랐다.
똑똑.
문을 열자, 침대에 앉아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책을 보는 성후가 눈에 들어왔다. 짐승처럼 남자답게 생긴 외모에 책이라니. 지적인 소양까지 고루 갖춘 듯해 부연의 가슴이 심하게 떨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책장을 덮지 않고서 냉랭한 얼굴로 물어오는 성후다. 한 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러나 부연은 기죽지 않고서 입을 열었다.
“전에 제가 간호 담당을 맡기도 했었는데…… 재입원하게 되셔서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성후가 설핏 미간을 움찔한다.
“…굳이?”
그러자 부연의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하잖아요. 제가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편이라서….”
“…그렇군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성후의 눈빛이 네 마음은 모두 들통났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부연의 정신이 혼곤해진다. 역시.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그러나 꿈은 클수록 좋은 법! 이 남자를 가지면 온 세상을 가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다.
“그리고 긴밀히 전하고 싶은 내용도 있어서요.”
마침 그의 곁에 늘 붙어있던 냉정한 눈초리의 비서도 자리에 없으니 지금이야말로 기회란 생각이 들었다.
“하세요, 말씀.”
전혀 기대감 없는 눈빛으로 그가 말했다.
“온다정 선생님에 관한 얘긴데요……”
다정의 이야기가 나오자, 성후가 책을 덮고 협탁에 툭 올려두었다. 이번엔 제대로 듣겠다는 얼굴로 부연을 바라본다.
“두 분 사이가 조금 특별해 보여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이에요….”
‘드리는 말씀’.
서론만 들어도 인상이 팍 구겨지는 성후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자 부연의 심장이 철렁했다.
후아, 후아. 괜찮아, 신부연. 지르자! 내가 이 남자를 지키는 인어공주가 되는 거야!
“온다정 선생님…… 김동학 교수님의 애인이라는 소문이 있어요. 그 외에도 구설이 많은 선생님이거든요.”
성후는 가만히 부연을 쳐다보았다.
긴장감에 토할 것 같지만, 부연은 꾸역꾸역 말을 이었다.
“그래서…… 걱정이 돼서요.”
“걱정이라.”
그가 실소를 터트렸다. 너무도 냉랭해, 사람을 얼릴 듯한 그런 비소였다.
“네??”
“저를 걱정해서 말씀하셨다고 하니 저도 충고 하나 하겠습니다. 새겨들으세요.”
그가 명령조로 말했다.
부연이 미세하게 떨리는 턱을 주억인다.
“경솔한 입은…”
다음을 강조하기 위해 잠시 침묵하던 그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반드시 그 죄가 자기한테 돌아오더라고요. 저는 그런 경우 숱하게 봤습니다. 해서.”
…꿀꺽.
“온다정 씨에 관한 건, 앞으로 제가 돌려줄까 하는데.”
“…헙!”
성후가 차가운 미소를 짓더니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저도 신 선생님이 심히 걱정되어서 하는 말입니다.”
“그,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후다닥 사라지는 부연. 성후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착하게 살아도, 사방이 다 적이군. 바보 같은 여자.
똑똑.
“환자님~ 영양제 맞을 시간입니다~~”
타이밍이 기가 막힌다. 완벽한 간호사 톤으로 말하며 들어오는 다정을 보며 성후가 환하게 웃었다.
“뭡니까.”
그런 성후를 아리송한 얼굴로 보며 이내 고개를 갸웃하는 다정.
“왜 웃어요?”
“좋아서.”
“네? 하, 참. 또 제가 너무 예뻤나요?”
가져온 링거를 익숙하게 고리에 매다는 다정.
“네, 너무 예쁩니다. 여기서 조금만 놀다 가세요.”
성후의 유혹에 피식 웃음 짓는다. 링거 라인을 연결한 다정이 예쁘게 눈을 접으며 말했다.
“그럴까요?”
두 사람은 서로의 눈빛에 스며들며 안온한 감정에 휩싸였다.
* * *
-문디 손아. 이제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라. 내가 니 발라당 까졌을 때부터 알아봤다, 마!
기봉의 말에 승주가 코를 슥 훔치며 웃었다.
“이제 안 그래. 조심할 거야.”
-지 버릇 개 주겠나! 내사마 걱정이다! 걱정이야! 다정이가 며칠 네 걱정으로 음청 앓았다카드만.
“그래서 말인데…… 다정이 남친 소개해주면 어떨까 싶거든.”
-……남친? 하, 지랄 똥 때리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갸 은~~근히 눈 높다. 아무한테나 쉽게 맘 안 준다. 그리고 네 주위 놈들은 죄다 날라리들 아이가?
“아니야! 능력 있고 멋진 형들도 많아!”
-큭큭큭. 웃기시네.
“진짜래도! 아무튼, 다정이도 이제 슬슬 시집갈 나이기도 하니까! 이 오라버니가 보내 버리겠어!”
-빙신. 그러다 네가 골로 간다. 그래도 이왕 추진하는 거, 진짜 개안은 놈만 소개시켜 줘야 한데이. 갸가 우리 사총사 오야아이가~
정봉의 푸근한 목소리에서도 다정을 향한 깊은 우정이 느껴졌다.
그 순간. 승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헛! 갑자기 생각난 형이 있어. 일단 끊어 봐!”
통화를 끝낸 승주가 곧바로 진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오, 승주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잠깐 활동 쉴 땐데 어떻게 알고 전화했네.
그는 프리랜서 안무가다.
“드디어 한가해졌구나. 어떻게. 연애는 하고 있어?”
-이번 생엔 글렀나 보다. 일복만 터졌어.
그렇게 말하며 웃는 진한의 낮은 웃음소리가 참 매력적이다.
“나한테 진짜 소중한 사람이 있거든.”
-음? 너야말로 연애해? 애인?
“아니, 내 친구 얘기야.”
-아아.
“근데 걔가 진짜 괜찮은 여자거든.”
-……썸?
“아니! 끝까지 들어봐.”
-서론 그만 깔고 말해, 인마.
“나한테 진짜 진짜 소중한 녀석인데, 형한테 소개해주면 어떨까 해. 형처럼 속 깊고 따뜻한 사람이랑 만났으면 좋겠거든.”
-요컨대 네가 날 괜찮은 놈으로 봤다는 거 아니야.
“물론이지. 요즘 형 같은 남자 드물잖아.”
-흐음. …근데 그거 아냐? 남자가 보는 괜찮은 남자랑 여자가 보는 괜찮은 남자는 상당히 다르다?
“형이 인물이 빠져, 인성이 빠져, 직업이 빠져.”
-직업은 빠지지. 프리랜선데.
“그러지 말고 내가 조만간 시간 맞춰볼 테니 한 번 나와.”
-……어떤 분이신데?
승주는 입안을 혀로 굴리며 잠깐 다정을 떠올렸다. 그러다 이내 씩 웃는다.
“의리 있는 여자!”
-의리. 큭큭. 마음에 드네. 알았어.
“진짜지?? 나 날 잡는다?!”
-어. 미리만 말해줘.
전화를 끊고 나서 승주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외쳤다.
“다정아! 오빠가 너 시집보내 줄게! 움하하하!”
행인들이 힐끔힐끔 그를 노려본다. 그 눈빛이 가히 곱지만은 않다.
* * *
“홍콩이라니……. 너무 근사하네요.”
“가경이 설마, 홍콩 처음 와?”
동학이 귀엽다는 듯 가경을 쳐다보며 웃었다.
“해외가 처음인 건 아니거든요? 홍콩이 처음이지…”
머뭇거리며 입술을 삐쭉거리는 그녀가 귀여워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동학이다. 학회도 끝났고 아내의 의심도 거두어졌으니 아주 살맛이 난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더 갖고 싶은 건?”
늘 돈으로 자신의 기를 죽였던 아내의 곁에선 기를 펴지 못했다.
하지만 가경은 다르다.
그녀는 약소한 밥이나 작은 선물 등에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해 주었다. 똑같은 돈을 써도 아내는 비웃음을 흘렸고 가경은 함박웃음을 짓는 것이다.
“엥.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이 가방도 비싼 거 같던데.”
가경의 눈이 명품 로고가 박힌 종이가방에 머물렀다.
“아까 선글라스도 유심히 보던데, 내일 그거 사러 갈까?”
“……교수님. 어쩜 그렇게 섬세하세요? 진짜 사모님이 부러워요. 이렇게 자상하고 섬세한 남편을 만나서. 내가 조금만 더 일찍 태어나 교수님을 만났더라면…….”
동학이 속으로 말했다.
와이프 같은 여자와 살아보니 가경이 너처럼 평범한 여자가 한없이 예뻐 보이는 거야.
“집사람 얘기는 안 하고 싶어.”
“앗…. 죄송해요.”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아니야. 내가 미안하지.”
“으음, 그럼 저…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요?”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건 뭐든.”
“쿡쿡. 아주 쉬워요!”
“갖고 싶은 거야?”
“아 설마요! 제가 뭐 교수님 돈 보고 만나는 줄 아세요? 자꾸 갖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그런 거만 물어보면 저 삐질 거예요!”
토라진 듯 팔짱을 끼고 고개를 획 돌리는 가경이다. 동학이 점잖게 웃으며 어린 그녀를 달랬다.
“하하, 미안해. 그래 어디 한번 말해봐.”
그러자 금세 씩 웃는 가경이다. 그리고 불쑥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음?”
“사진 찍어주세요! 세상에서 가장 예쁘게요!”
아직 어려서 그런가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꽃내음이 나는 것만 같다.
“그래, 자, 여기 봐.”
동학은 가로로 휴대폰을 들고 화면 안에 잡히는 가경을 쳐다보았다.
홍콩의 밤이 내려다보이는 고층 레스토랑. 레드 와인이 담긴 잔. 이곳에서만 판매하는 특제 양고기 스테이크와 그것을 써는 시늉을 하는 귀여운 가경.
찰칵. 찰칵. 찰칵.
몇 장을 찍어도 예쁘지만, 그래도 어딘지 부족하게 느껴지는 동학이다.
“…음, 홍콩 하면 야경이 빠질 수 없지.”
동학은 기꺼이 자리에서 일어나 야경과 가경을 함께 사진에 담았다. 그런 그의 재치에 가경은 웃음이 터졌다. 행복한 감정이 만면에 떠오른다.
동학이 휴대폰을 가경에게 건네며 묻는다.
“어때?”
핸드폰 앨범 속 사진을 검지로 슥슥 넘겨보던 가경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대박. 교수님 사진작가 하셔도 되겠어요! 진짜, 못 하는 게 없는 남자야~.”
가경의 칭찬에, 동학이 어깨를 으쓱했다. 말도 참 예쁘게 한다 생각하면서.
“뭘. 하하.”
“호텔에 돌아가면 인스타에 올려야징~”
“응? SNS?”
“네!”
살짝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혼자 나온 사진을 올린다니 신경을 끄기로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파릇파릇한 그녀의 나이는 그게 뭐든 자랑으로 삼고 싶을 때가 아닌가.
돌이켜보면 자신도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이해가 되자, 주름지게 눈웃음을 지으며 가경을 바라보는 동학이다.
“그렇게 해. 분명 친구들이 부러워할 거야.”
“그렇겠죠? 포인트는 명품 백과 홍콩 야경이에요! 저는 거들 뿐. 꺄- 암만 봐도 완전 잘 나왔어요!”
신나서 어린애처럼 들뜬 가경에게 휩쓸려선 안 되었었는데.
찝찝함을 삼킨 대가는 머지않아 벼락이 되어 두 사람에게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