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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끔한 것이 좋아-26화 (26/82)

26화. 나만 느끼는 거 아닐 텐데

점심시간.

“교수님… 뭐예요, 제가 들은 얘기.”

동학이 자신의 비서 같은 전담 간호사와 나란히 차에 앉아 있다.

“무슨 얘기?”

그의 이마에서 볼품없는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혹시…”

간호사 가경은 시력이 나쁜 사람처럼 눈을 찌푸리며 이어 말했다.

“양다리였어요?”

“아니야. 나는 우리 가경이뿐이야…!”

“온다정 선생님이랑 데이트했다는 소문은 뭐예요?”

못 믿겠다는 눈을 하는 그녀다.

“왜 전에….”

동학이 미간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가경이가 가보고 싶다던 맛집있잖아….”

“……사골 파스타?”

“그래, 거길 온 선생이랑 갔었어. 마성후 환자 집에 방문하고 나서, 저녁에 들려 거기 인기 메뉴를 전부 시켜봤어.”

“그러니까 왜요!”

“가경이 너랑 가려고.”

“…네??”

앙칼졌던 표정이 일순 허물어진다.

“너한테 제일 맛있는 메뉴 추천해주려고… 간 거였다고.”

“교수님……!”

가경이 제 두 손을 꼬옥 모았다.

“그걸 하필 다른 간호사들이 본 거야. 오히려 잘 됐지. 안 그래도 마누라가 요즘 날 의심하고 있었는데. 완전히 딴 길로 들어섰잖아. 그리고 아까 그 소동이 있고 난 뒤에 잘 화해했어. 당분간은 마누라도 잠잠할 거야.”

“그냥 이혼하시면 안 돼요?”

동학은 속으로 움찔했다.

어린 여성은 모든 게 다 좋지만 딱 한 가지. 이런 열정이 부담스럽다.

그 역시 가경을 좋아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연인으로서였다. 연애가 결혼이 되어버리면 이 감정도 다 먼지처럼 사라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내와 이혼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아내의 집안은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제약회사 <우일한양>으로, 그녀로 인해 자신이 누리는 부가 막대했기 때문이었다. 대학병원 의사가 감히 만날 수 없는 세상을 아내를 통해 들어섰고 이젠 거기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말했잖아. 애가 아직 수험생이고. 남편임을 떠나, 아버지의 역할도 있다고. 그리고 내가 먼저 그녀를 내치면…… 우린 무사하지 못해. 마누라가 천천히 내게 등을 돌리도록 만들어야 해.”

늘 듣는 그럴듯한 변명에 가경이 입술을 짓이겼다.

“교수님은 몰라도… 저도 이제 나이가 들어가고, 시집도 가야 하는데……. 언제까지 사랑하는 이 마음 하나로 이렇게 교수님을 붙잡고 있어야 하는지……. 저 너무 지쳐요.”

“미안해. 조금만 더 기다려줘. 나도 널 사랑해.”

“칫. 그러면서 이혼은 꿈도 안 꾸면서!”

“인생은 길어. 시간은 금방 흐르고. 결국, 남는 건 우리 둘일 거야.”

가경이 한숨을 쉰 뒤 다음 말을 꺼냈다.

“이번에 학회 가시는 거요……”

“어. 뭐, 갖고 싶은 거라도 있어? 사 올게.”

돈으로 가경의 마음을 풀 수 있다면 그건 가장 쉬운 일이다.

“아니요. 저 그때 오프예요.”

“음?”

동학이 두 눈을 깜빡거렸다.

“같이 가요.”

“같이…?”

아니 얘가 점점.

“그렇게 긴장하지 마세요. 따로 가되, 거기서 만나자는 뜻이니까.”

덧붙인 가경의 말에 긴장이 확 누그러진 건 사실이지만, 그는 티 내지 않기 위해 헛기침으로 시간을 벌었다.

“그러니까 홍콩에서 밀회를 즐기자는… 그 말이지?”

어찌 이리 기특한 발상을 했을까. 동학의 만면에 미소가 떠올랐다.

“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어때요?”

“그래 그러자. 우리 가경이 생일도 다 되어 가는데, 내 근사한 선물 사줄게. 뭐가 좋겠어? 가방? 신발?”

그러자 그녀가 동학을 확 끌어안았다.

“정말이죠? 예에!”

동학은 흘러내린 갈색 안경을 슥 올리며 미소지었다.

* * *

비어있던 성후의 병실로 들어온 성후와 다정 그리고 명정. 성후는 새로 받은 환자복을 갖춰 입은 채였고, 다정은 정복이 아닌 활동복으로 갈아입고서 병실로 모였다. 유명인사인 데다가, 환자복 차림의 성후니 그들에게 허락된 공간은 병실이 전부여서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마침 성후의 스승 명호도 언제 갔는지 메모 한 장만 남기고 사라진 다음이었다.

성후의 권유에 명정이 침대에 앉고 그 앞에 의자를 가지고 와 성후와 다정이 나란히 앉았다. 명정이 딸을 보며 말했다.

“얘기해 봐. 이게 다 어떻게 된 건지.”

남자친구만 데려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 같더니 엄마의 얼굴이 의외로 딱딱하다.

“다정 씨와… 만나고 있습니다. 먼저 찾아 봬야 했는데, 기회가 좀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정이 아닌 성후가 진심 어린 눈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다정이 선 자리에 나타난 사람이 마…성후 씨, 맞나요?”

명정의 질문에 다정이 움찔한다. 그에 반해 성후는 흔들림 없이 대답한다.

“네.”

“그럼 그 이상한 취미를 가졌다는…?”

“그건 절대 오해입니다!”

다시금 ‘망가 마니아’라는 아픈 오욕이 떠오른다.

“엄마, 그건 있지, 내가 그 맞선 상대가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헛소리를…… 미안해. 엄마 체면이 있는데.”

흠칫 놀란 다정도 빠르게 변명을 해본다.

“그땐 다정 씰 만나고 있을 때가 아니고, 저 혼자 좋아할 때였는데…”

“혼자 다정일 좋아했다고?”

명정은 깔끔하게 딸의 말을 무시했고 성후의 말도 가로챘다.

“네. 그래서 그날 선 자리를 망쳤고 쫓아가 말했습니다. 남자친구가 되고 싶다고요.”

다정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정확히는, ‘남자친구 역할’이니까.

그리고 그것을 지금 성실히 이행하고 있는 그다.

“아픈 건…… 괜찮은 거예요?”

명정의 물음에 성후가 웃었지만,

“별거 아닙니다. 손가락에 작은 염증이 생겨서요. 얼마 전에 건강검진 해봤는데 몸은 아주 건강하다고 나왔습니다.”

어쩐지 슬퍼 보이는 미소였다. 물론 다정의 눈에만.

“…저런.”

명정의 눈에도 애잔함이 깃들었다.

“지금도 그냥 입원했습니다. 다정 씨 곁에 있고 싶어서요.”

그의 대답에 어쩐지 명정의 얼굴에 잔잔한 화색이 돌았다.

“우리 다정이가 그렇게나 좋아요?”

“네, 좋습니다.”

“어디가 어떻게 좋아요? 난 내 딸이라 당연히 좋지만…… 남자가 봤을 때 어디가 그리 예쁜지 궁금해서 그래요.”

명정의 목소리는 한층 누그러졌다. 성후의 진솔한 고백이 통한 모양이었다.

“착해서요.”

망설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음? 우리 딸은 착한 것보단… 좀 매운 편인데.”

“매운 듯해도 심성이 착합니다. 자신보다 남을 더 생각해서 답답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야무져서 끌려다니는 법이 없는 여자죠. 아주 똑똑해요. 다정 씨의 그 올곧은 심성은…”

성후의 눈이 다정에게 머물렀다.

“신이 정성을 다해 빚어 놓은 듯 반듯하기도 하고요.”

두근두근.

진심 여부는 모르겠지만, 그가 이런 식으로 부드럽게 자신을 칭찬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서 다정은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성후가 다정의 손을 꾹 겹쳐 잡았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꽉 잡는 그의 악력과 온기가 명정에게까지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좋아요. 그리고 성후 씨 암만 대단한 남자라고 해도……”

세게 나가자. 괜히 평범한 집안의 딸이라고 굽신거려선 안 돼! 우리 다정이 뒤에 호락호락하지 않은 성질의 엄마가 있다는 걸 보여줘야지!

“우리 딸 마음고생 시키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강한 멘트를 날렸지만, 어쩐지 가슴이 조마조마해지는 명정이었다. 태연한 척 입을 꼭 다물어보아도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다정은 몹시 의아한 눈으로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엄마… 이 남자가…… 그 맞선 상대보다 천만 배는 나아.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도도한 얼굴인가요…?

“물론이죠. 진중한 만남 이어가겠습니다. 믿고 지켜봐 주세요.”

명정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오르려는 걸 가까스로 눌렀다. 쉽게 보여선 안 돼! 그녀의 이중적인 마음이 속에서 외쳤다.

“알았어요. 가짜든 진짜든, 입원했으니 푹 쉬고 몸 관리 잘해요. 손가락도 어서 낫길 바랄게요.”

“엄마! 행여라도 이 사람 손가락에 관한 얘긴…”

“온다정. 엄마 그렇게 아둔한 사람 아니다? 얘가 엄마를 뭐로 보고.”

다음 맞선 얘기를 하려고 왔던 명정은 깨끗하게 마음을 털고 일어섰다. 다정이 따라나서자 엄마가 고개를 저었다.

“일하는 척하고 잠깐만 쉬어. 그래도 되죠?”

성후에게 넌지시 물음을 던지자, 성후가 씩 웃어 보였다.

“저야 좋습니다.”

웃는 모습이 생각보다 맑아, 명정은 그런 성후가 쏙 마음에 들었다.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나쁜 사람 같진 않네.

“여기에 있어.”

“으응…. 근데 오늘 병원엔 왜 온 거야?”

“왜 오긴 왜 와. 갑자기 딸내미 얼굴 보고 싶어서 왔지.”

그러자 다정의 눈이 다 안다는 듯 가늘어졌다. 명정도 딸의 눈빛을 읽고서 윙크를 날렸다. 없던 일로 하자 딸?

명정이 병실 문 뒤로 사라진 뒤, 성후가 다정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마치 정말로 사랑하는 것처럼.

그래서 설레고, 그래서 조금… 섭섭했다.

“이리 옵시다, 여친.”

성후의 말에 다정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말대로 애매해서 더 설레는 걸까.

“수작은 관둬요.”

서 있는 자리에서 팔짱을 끼고 대꾸하는 다정. 그녀의 눈이 말했다.

더 깊어져서 어쩌려고요? 당신은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전 그 여파가 좀 클 것 같거든요?

“흔들리면 그냥 흔들립시다. 지금도 주체 못 하는 거 같은데.”

“가만 보면… 넘겨짚는 덴 선수라니까요.”

다정이 가벼운 분위기를 끌고 가며 말했다.

“넘겨짚는 거 아닌데……”

성후가 웃음기를 지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 마음이 같잖아요. 그거, 나만 느끼는 거 아닐 텐데.”

다정이 속으로 뜨끔한다.

같은 마음을 느꼈다고 해도, 그것을 그대로 시인할 여유가 없다. 어쩌면 이런 마음이야말로 세상이 만든 신분 차이에서 기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칫국 한 사발을 마시고 앓기엔, 다정도 그리 어리숙하지 않았다.

“넵, 일단 그런 거로 치고-”

“치고?”

성후의 잘생긴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간다.

“저는 일하러 나가보겠습니다. 이 방에 오래 있었더니 이달 월급 받기가 부끄러워질 것 같거든요. 그럼.”

다정이 생글 웃으며 자리를 피했다. 홀로 남은 조용한 병실. 성후가 혀로 볼 안을 훑는다. 딱딱한가 싶으면 부드럽고 마음을 교환했나 싶다가도 매정한 여자.

“쉽지 않아, 결코.”

성후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쉽지 않아도, 이 길을 가리라 마음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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