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25화 (25/82)
  • 25화. 자비 없는 수호신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왜, 왜 이러세요?! 이거 놓으세요!!”

    여자의 손에 잡힌 다정의 머리채가 이리저리로 흔들렸다. 다정은 볼품없이 끌려다니며 필사적으로 반항했지만, 막무가내인 상대에게 맞대응 없이 방어하기란 쉽지가 않다. 악 소리를 지르며 여자를 떼 보려고 했지만, 몰골만 엉망이 되었다. 머리는 산발에, 정복 단추도 두 알이나 뜯어졌다.

    급하게 달려온 보안팀 요원이 여자를 말려 보지만, 여성이기 때문에 함부로 터치하지 못했다. 조심스레 팔뚝 하나 붙잡고도 여자가 앙칼지게 노려보면 주춤하기 일쑤였다.

    간호사들 역시 사모님 고정하세요, 진정하세요, 이러지 마세요, 등 저마다 한 마디씩 붙이며 여자를 말렸지만, 역부족이었다.

    여자는 누구의 제압도 받지 않는, 무소불위에 존재처럼 굳건했다.

    “……이유나 알고 맞자고요!!”

    참다못한 다정이 여자를 밀쳤다.

    밀쳐진 여자가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더니,

    “네년이 우리 남편을 꼬셨잖아!! 이, 이…”

    무섭게 눈을 부라리고 다시 덤벼들었다.

    “더러운 년!”

    꽈악!

    다시 머리채를 잡은 손을 다정이 강하게 겹쳐 잡으며 대꾸했다.

    “아 글쎄, 아줌마 남편이 누군데요 대체!!”

    그때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그 손 놔.”

    순간 보안 요원, 간호사, 환자들이 사라진 듯 주변의 소음이 멎었다.

    정신없이 다정의 머리를 흔들던 여자도 사위가 고요해지자, 흠칫하며 얼굴을 들었다. 그러자 살의에 찬 커다란 남자가 눈빛으로 자신을 죽일 듯 내려 보고 있었다.

    “다, 당신이 누구…”

    여자가 말을 채 끝내기도 성후가 다정의 머리채를 쥐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여자를 내동댕이쳤다. 허무하게 떨어져 나간 여자가 비틀거리자, 보안 요원이 그녀를 척 받쳐 일으켜 세웠다.

    여자는 가자미눈을 뜨고 보안 요원을 노려보더니 이내 중심을 잡고 서서 성후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당신 뭐야? 내가 누구인지 알고…! 그러니까 방금 내 몸에 손댄 거… 맞지? 어?! 다들 봤지?!!”

    주변을 훑으며 여자가 소리쳤다.

    “당신이 누구인진 내 알 바 아니고, 내가 확실히 아는 건 그 천박한 손으로 내 여자의 머리채를 잡았다는 사실이야.”

    “허…!”

    여자가 헛웃음을 지었다.

    “……너. 진짜 죽고 싶구나?”

    여자의 노기가 이제는 성후를 향했다. 분노는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성후는 침착했다. 아니, 침착한 것처럼 보였다. 더러운 성질머리로 치면 저 여자를 능가하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성이 필요했다. 자신의 일이 아닌, 다정의 일이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곤란해질 수 있는 사람 역시 다정이기 때문에.

    낮게 심호흡하며 진정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다정이 성후의 앞을 가로막고서 입을 열었다.

    “저기 아줌마.”

    기어이 바짝 독이 오른 여자를 불렀다. 팽팽한 긴장감이 병동 안을 덮치는 순간. 그 무거운 공기를 가르고 성후가 다정의 몸을 제 쪽으로 빙글 돌렸다.

    숨죽인 사람들의 눈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다정의 모습을 정리해주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쓱쓱. 하필 가슴 부위에 뜯어진 정복을 보며 얼굴을 구긴다. 툭, 툭, 툭, 그도 환자복을 벗었다. 해외 잡지에서나 봤을 법한 크고 우람한 근육질 상체가 만인의 앞에서 드러난다.

    “성후 씨…!”

    성후는 개의치 않았다. 벗은 환자복으로 다정의 상체를 조심히 가려줄 뿐이다. 여기저기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진짜로 들린 건 아니지만, 들리는 것처럼, 여자 관객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상기되었다.

    “다 됐습니다.”

    행패 부리던 여자는 무시한 채, 다정을 귀하게 여기는 성후의 모습에 모두가 술렁이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간호사는 묘하게 흥분한 얼굴이었는데 부연의 입가만 경련으로 덜덜 떨려왔다.

    내,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저 둘이……?!

    “이봐요!!”

    여자가 다시금 소리를 질렀다. 이번엔 성후가 자신의 뒤로 다정을 숨기고서 여자에게 다가갔다.

    “죽고 싶냐고 물었지?”

    여자의 낡은 협박을 잊지 않았다.

    “아니, 나이도 어린놈이 어디서 반말을!!”

    여자가 허공으로 날렵하게 손을 올리자, 성후가 그 손목을 제지하고서 무섭게 으르렁 짖었다.

    “입 닥치고 잘 들어. 한 번만 더 이 여자한테 손 올렸다간, 가만 안 둬.”

    “하. 가만 안 두면? 팰 거야? 죽일 거야?! 어!”

    성후의 송곳 같은 눈빛이 여자의 눈동자에 잠시 머무른다. 1초. 2초. 3초. 성후는 큰 손을 뻗어 여자의 작은 턱을 우악스럽게 쥐었다. 그 강도가 세다는 건, 그의 팔에 꿈틀거리는 근육들로 인해 쉬이 파악되었다.

    성후는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죽여달라고 빌게끔 만들어 주지.”

    가만히 마주하고 있자, 여자는 뒤늦게 성후의 얼굴을 읽었다. 그의 정체를 파악한 여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천재 피아니스트 마성후……?

    알아보자마자, 눈동자에 경악이 비치고 굳은 턱이 잔약하게 떨려왔다.

    얼마 전, <가르니크> 장남으로 밝혀진……!

    “……여보!!!”

    그 순간, 문제의 남편이 등장했다. 남편은 바로 성후의 주치의 김동학 교수였다.

    “헉…!”

    뒤늦게 사태 파악이 된 다정이 반사적으로 헉 소리를 냈다.

    “내가 설명한다니까 왜 그럽니까… 대체!”

    성후의 싸늘한 눈도 동학에게 잠깐 머물렀다 이내 여자의 턱을 버리듯 놓아주었다.

    “당신의 불륜 상대가 정형외과 온다정이란 얘기를 들었어!”

    여자는 태연하게 굴려 애썼지만, 목소리가 떨리며 나왔다.

    “아니,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온 선생, 정말 미안하네.”

    “아니 지금 당신이 사과할 상대는 나야!”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소?”

    “간호사들이 술술 불던데! 두 사람…… 식당에서 단둘이 오붓하게 밥 먹는 걸 봤다고!”

    “하….”

    암담한 심정이 된 동학이 제 두 눈을 잠시 덮었다. 그러다 이내 입을 열었다.

    “내가 다 잘못했어. 가서 얘기합시다. 보는 눈들이 많아요.”

    “허, 보는 눈들이 많다니까 잘됐네. 가진 건 잘난 머리 하나가 전부인 당신이 언감생심 우리 집안에 장가와서! 상류층 반열에 턱 하니 올려줬으면! 당신이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바람? 바아라암? 진짜 바람처럼 귀싸대기를 날려버릴까 보다!”

    주제를 모르고 여자와 바람을 핀 것도, 이런 수모를 겪게 만든 것도 모두 남편이란 생각에 여자가 다시 광분하기에 이르렀다.

    여자의 천박한 언행에 성후가 다정의 귀를 살포시 막았다. 다정은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평이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듣지 맙시다. 예쁜 귀는 예쁜 말만 들읍시다.”

    아무도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유일하게 알아들은 다정의 얼굴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잠깐만 있어요.”

    성후가 여자와 동학에게 다가가 말했다.

    “사과하세요.”

    남편에게 격분한 채로 부들부들 떨던 여자가 다시 앙칼진 눈으로 성후를 올려다보았다.

    “저… 마성후 님. 저를 봐서라도, 한 번만 넘어가 주면 안 되겠습니까.”

    동학이 매우 불쌍한 얼굴로 애원했다. 그의 복잡한 심경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상대는 마성후다. 흐지부지 당한 채로 지나가는 건, 용납할 수 없는 마성후.

    “네. 안 됩니다.”

    자비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 가지 방법이 있겠군요. 굳이 사과를 못 하겠다면, 내가 똑같이 선생님 아내의 머리채를 잡으면 될 터이니.”

    성후는 정말로 실행할 것처럼, 굳은 얼굴로 성큼성큼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사색이 된 건 동학이었다. 동학이 급하게 아내 앞을 가로막고서 다시 부탁했다.

    “……제발.”

    성후는 잠시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왔다. 그는 쫙 폈던 손을 꽉 말아 쥔 다음 천천히 눈을 떴다.

    소름 끼치도록 서늘한 시선이 여자에게로 향한다.

    충분히 경고했다는 건 알지만, 분이 풀리지 않는다. 감히. 감히.

    “듣자 하니, 당신 돈으로 하는 건 뭐든 잘하지? 여태 무탈했을 거고. 그런데 어쩌지. 그거… 내가 더 잘하거든. 갑질이 취미라. 그쪽 머리털 다 뽑고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지나갈 수 있어. 알잖아. 돈으로 바르면 쉬운 거.”

    불구경에 신이 난 수많은 시선이 여자를 주목했다. 여자의 위장이 바짝 조여들었고 이내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가르니크> 장남의 여자라고? 저 간호사가?

    계산해볼 것도 없다. 냉정히 말해, 그런 여자가 자신의 늙은 남편을 만날 리 없으니까. 허나, 사과라는 것을 해보고 살아본 적 없어 입술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마지막 기회야. 당장 사과해.”

    “성후 씨……”

    다정이 심각한 얼굴로 성후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그러자 성후가 다정의 손을 잡고 꽉 눌렀다.

    가만히 있어요. 내가 용서할 수 없으니까.

    모두의 시선이 날아든 중심. 끝나지 않는 분쟁. 강자와 약자가 명백하게 구분된 상황. 지루하게 흐르는 시간. 그 모든 것들이 여자의 등을 떠밀었고, 쭈뼛쭈뼛 행동하게끔 했다.

    “아, 아가씨한텐 미안하게 됐어.”

    “존중받고 싶으면 똑바로 합니다.”

    그가 처음으로 여자에게 높임말을 썼다.

    “……내가 잘못했어요.”

    여자는 신음처럼 겨우겨우 사과를 뱉어냈다.

    진심이 담겼을 리 만무하지만, 이 자리에서 다정의 머리채를 잡은 죄목에 대한 벌은 단단히 주었다. 이 이상의 단죄는 이 자리가 불편할 다정을 위해서라도 그만두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내려가오. 내려가서 얘기합시다.”

    태어나 처음 맛본 모욕감에 여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동학은 쩔쩔매며 여자의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난처한 기색으로 성후에게 짧게 묵례했다.

    부부가 사라지자 넋 놓고 구경만 하던 사람들도 점점 흩어지기 시작했다.

    “……저 정말 괜찮은데.”

    다정이 멋쩍은 목소리로 조그맣게 말했다.

    “확실히 괜찮게 할 겁니다.”

    “아니, 제 수호신이세요?”

    “네.”

    “……허.”

    “당신한테 함부로 하는 사람, 그게 누가 되었든 이제 내가 용서 못 합니다.”

    이곳은 다정이 수천 번, 수만 번 오갔던 정형외과 병동이 아닌, 두 사람만이 남은 무인도 같았다.

    그녀는 어이없는 눈으로 성후를 바라보다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마성후 씨 마음 진짜 유난스럽네요.”

    “앞으로 더 유난스러워질 거니까 각오, 단단히 하세요.”

    다정이 설렘으로 가슴이 떨렸을 때, 훔쳐 듣던 부연은 질투로 몸을 떨었다.

    내가 온다정보다 뭐가 못해? 학벌이며, 경력이며, 미모며, ……별 볼 일 없는 집안까지 똑같은데. 쟤가 가진 남잘, 나라고 못 가지겠어?

    부연의 속에 자리 잡은 신분 상승에 대한 욕심이 다시금 꿈틀거리는 순간이었다.

    그때.

    “다정아?”

    조심스럽게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토끼 같은 표정의 엄마가 서 있었다.

    “엄마!”

    다정의 부름에 성후가 일순 경직되었다.

    엄마? 그러니까 그녀의 어머니…?

    얼떨떨한 얼굴로 다가온 엄마가 물었다.

    “머리는 왜 그래? 다 풀어헤쳐선. 그 환자복은 또 뭐야…”

    엄마의 시선이 벗고 있는 성후의 맨몸을 흘끔 보다 거둔다.

    “아, 어디에 걸려서 푸, 풀렸어.”

    다행이다……. 쥐어뜯길 때 엄마가 안 와서.

    “근데…”

    가느다래진 엄마의 눈이 이젠 완전히 성후에게 붙박인다.

    “이 분은… 환자니? 아니면 친구?”

    “그게…”

    그가 자신의 남자친구 역할을 자처했지만, 마음의 준비도 없이 맞닥뜨린 상황에 말문이 막혔다. 그때 성후가 깊게 허리를 숙여 명정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다정 씨 남자친구, 마성후라고 합니다.”

    “마성후… 흠. 어디서 들어 봤……”

    그의 잘생긴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뜯어보던 명정이 이내 성후를 척 가리킨 검지를 흔들며 흥분했다.

    “…이, 이 사람은!!! 그, 그, 하, 뭐더라. 무슨 연주자…… 아!! 피아니스트!! 그러니까 그쪽이 우리 다정이가 숨겼던 그 남자란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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