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24화 (24/82)
  • 24화. 거부할 수 없는

    “자기. 잡지 없어?”

    “없기는 왜 없어요~ 기다려 봐요!”

    발랄하게 말하며 돌아서는 명정. 이윽고 수납형 소파 뚜껑을 열어 몇 달 지난 잡지를 들고 돌아왔다. 은밀히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잉? 최신 거 없어?”

    머리에 소라 빵을 얹은 듯 구르프가 일렬로 말린 여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도 엄~청 재미있던데요?”

    으이그. 이놈의 아줌시 올 때마다 까다롭구만!

    명정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무심하게 잡지 속을 넘기던 여성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어머… 마성후 인터뷰가 실린 호였잖아.”

    “마성후?”

    “원장님 마성후 몰라요? 왜, 천재 피아니스트!”

    손님의 말에 명정의 눈이 잡지 속지로 향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의 얼굴은 신사적인 옷차림에 비해 꽤나 도발적이었다.

    “오호…… 젊은 청년이 엄청 남자답네요?”

    “자기 모르는구나.”

    손님은 거의 울먹이면서 말을 이었다.

    “연주도 끝내줘. 인터넷 찾아봐. 빙판 위에 김연아가 있었다면 건반 위는 마성후라니까! 강심장! 끝내주는 연주! 특히 피아노를 두드리는 그 손길이 어마~어마하게 섹시하다고!”

    “어허허. 그 정도예요?”

    연주하는 것을 못 봐서 그런지, 젊은 사내에게 열 올리는 중년 손님이 주책이라 생각되었다. 우리 나이에 조용필도 아니고 무슨.

    “그뿐만 아니야. 이 남자가 <가르니크> 아들이래, 글쎄.”

    “<가르니크>면…… 그 화장품 회사?”

    명정의 눈도 눈에 띄게 커졌다. 재벌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막장 드라마라면 빼놓지 않고 봤던 명정의 머릿속에 근사한 재벌 2세들의 삶이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호기심이었다.

    “그래! 그 회사! 이렇게 완벽한 남자는 대체 어떤 처녀가 데려가려나…… 내 젊어져도 넘볼 수 없는 남자니, 진짜 한탄스러워.”

    “흐응……”

    입꼬리가 비틀린 성후의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명정이다.

    우리 다정이도 이 남자의 반의반에 반만 한 놈만 데려왔으면…….

    * * *

    두 번째 키스.

    “…흐읍!”

    그의 혀와 얽힌 다정의 혀가 입안에서 뜨겁게 녹아내렸다. 깊게 교접된 입술은 닿고 떨어질 때마다 연신 젖은 소리를 냈다.

    한동안 밤잠을 설치게 했던 성후의 두 번째 키스는 처음보다 더 강렬했다.

    전에는 심장에 각인을 시켰다면, 이번엔 뼈에 새겨질 듯 아찔하다. 그때와 같은 건 몹시도 적극적이란 점이다.

    다정의 혀가 뒤로 밀리면 그것을 기어기 꺼내 들어 맛있게 옭아맸다. 그녀의 혀를 단숨에 지배할 만큼 강하면서도 촉감은 어쩐지 구름 사탕만큼이나 부드럽고 달았다.

    그래서일까.

    온몸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나이 서른에 키스 하나로 바들바들 떤다는 건, 어쩐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아니, 조금 더 상스러운 표현이 딱 맞을 것이다.

    쪽팔린다.

    그에게서 멀어져야 한다. 연애의 ‘연’자도 모르는 서투른 여자로 비치는 건 싫다. 농익지는 못해도 촌스러워 보이는 건 질색이다.

    그러나 몸은 언제나 그랬듯 의지를 배신한다. 조금도 저항하지 못하고 키스를 당하다 척주 끝까지 번지는 짜릿함에 기어이 다리가 풀리고야 말았다.

    다정은 허물어지듯 잡혀 있던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자 성후가 그녀의 팔을 내리고 제 품에 가두듯 감싸 안았다. 덕분에 그의 단단한 몸이 다정의 몸과 바짝 밀착되었다. 와중에도 입술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혀가 끝을 모르고 집요하다.

    “하앗…”

    거부할 수 없다. 입술이 빨릴 때마다 머릿속은 점점 하얗게 비워졌다. 이내 사고도 멈췄다. 결국, 그에게 완전히 취해 나른해진 순간,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그 순간 공기가 와장창 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성후는 재빨리 제 뒤로 다정을 숨겼다. 그리고 손등으로 입술을 훔쳐 닦았다. 두근두근. 그의 등 뒤에 숨겨진 다정의 심장이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요란한 굉음을 냈다.

    “……잘 지냈느냐?”

    “선생님…!”

    그의 목소리에 묘한 존경이 어려 있다는 것을, 단박에 눈치챈 다정이다. 그에게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그 뒤에 숨긴 작은 여인은 누구냐? 애인이냐?”

    웃음기를 머금은 중년 남성의 목소리에 다정이 바짝 얼어붙었다.

    그러자 성후가 몸을 돌리고서 다정을 내려다보았다. 긴장으로 떨고 있는 다정이 작은 새처럼 안쓰럽고 사랑스럽다.

    때문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저, 나가 보겠습니다. 마성후 환자님.”

    목소리가 바보처럼 완전히 떨리며 나왔다.

    “잠깐.”

    다정의 손목을 잡고 적극적으로 제지하는 성후다. 덕분에 중년 남성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확실히 꽂혔다. 그 눈엔 묘한 흥미가 일었다.

    “이거 좀…”

    성후가 다정의 입가에 번진 립스틱 자국을 검지로 야무지게 닦아냈다.

    “닦고.”

    그리고 씩 웃는다. 자신이 엉망으로 만든 입술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그럼.”

    붉어진 얼굴로 성후에게 묵례를 한 뒤 발걸음을 재촉한다. 특이하게도 꽃중년 외모의 남성은 백발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지금 다정의 눈에 담길 리가 없었다. 민망해 시선을 바닥에 붙이고 도망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다정히 급하게 물러나고, 남자가 물어왔다.

    “……진짜 애인?”

    “그럴까 싶습니다. …헌데 선생님이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성후의 반문에 명호가 껄껄껄 웃음 짓는다. 명호는 성후의 피아노 스승이었다.

    그리고,

    “네 놈 손가락이 고장 났다던데 스승이 돼서 얼굴을 비춰야 하지 않겠냐??”

    못 말리는 괴짜다.

    “……어쩐지 재미있어 보이시는데요.”

    “재미있고말고. 성깔 더러운 네 녀석이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지 기대돼!”

    성후의 눈이 묘하게 가늘어진다. 그러다 이내 전의를 상실하고 피식 웃어버린다.

    “부드러워졌구나.”

    “착각입니다. 일단 앉으시죠.”

    자리를 권하며 표정을 굳히는 성후다.

    “하지만 여인의 마음을 가지려면 더욱 부드러워져야 할 것이야.”

    “그런 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여전하구나.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하지 않는 것이.”

    “백발의 신사에게 연애 강의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만?”

    “나이가 듦에 따라 때마다 익어가는 연애라는 것이 있지. 너는 나를 따라오려면 한참 멀었다.”

    “별로 따라가고 싶지 않습니다.”

    명호가 밉지 않게 성후를 노려본다.

    “……따박따박. 그 입도 여전하구나.”

    “입이라도 한결같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명호의 시선이 성후의 손가락에 닿는다. 그리고 말한다.

    “걱정 마라. 세상에 없는 길은 없으니까. 만약 없다손 쳐도 개척하면 돼.”

    아주 단호한 눈빛에 강인한 미소를 머금고서.

    성후는 명후의 이런 점이 좋았다. 정신 승리의 대가. 그리고 자신감 넘치는 확언. 뿐인가. 그의 자신감은 늘 이백 퍼센트의 결과물을 보여줬다.

    이번에도 명호의 발언에 희망을 걸고 싶어진다. 그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든든함이 온몸에 퍼진다.

    “선생님도 여전하십니다.”

    성후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 미소에 소년 성후가 겹쳐 보였다.

    “껄껄껄.”

    희미한 슬픔이 가슴 속으로부터 천천히 피어오르지만, 웃음으로 무마하는 그다. 하지만 성후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 * *

    탈의실에 들어와 캐비넷에 머리를 콩 찧는 다정.

    “온다정… 정신 차려… 그는 지금 환자라고……!”

    이렇게 외쳐본들 무엇하리.

    그의 야만적인 몸매가 시야를, 긁혀 나오는 목소리가 청각을, 그리고 생생한 입술의 감촉이 촉각을 장악한 것을. 게다가 심장 역시 그의 손아귀에서 노는 것처럼 쉼 없이 뛰고 또 뛰었다.

    ♩♪-

    무음으로 하는 것도 깜빡 잊은 벨소리가 갑자기 울렸다. 다정은 소리 없는 경기를 일으키다 이내 허둥지둥 발신자를 확인했다. 고향 친구 기봉이다.

    “여, 여보세요?”

    바보처럼 더듬어 나오는 목소리가 볼품없다.

    -바뿌나, 우리 다정이!

    “잠깐은 괜찮아. 말해.”

    기봉아 잘됐다. 네가 내 열기를 좀 확! 식혀줘!

    -다름이 아니고 여진이가…

    여진은 기봉의 여동생이다.

    “아 맞다! 여진이! 서울에 올라온다고 했었지?”

    -어, 금마가 고시원에 혼자 산다 카든데 연락이 잘 안 된다.

    “어떡해. 미안해. 내가 신경 쓴다는 게 요즘 나도 정신이 없어서……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져 거듭 사과를 하는 다정이다.

    -안다. 승주 때문에 네가 애썼다미.

    “나한텐 끝까지 비밀로 해달라고 하더니…….”

    -우짜다 알게 됐다.

    “아무튼, 여진이는 걱정 마. 혹 고시원 주소 알면 얘기해줘. 가볼게.”

    -고맙데이!

    기봉과 전화를 끝내자, 정말로 달떴던 열기가 쑥 가라앉았다. 역시 이성이라고 해도 친구와 남자는 엄연히 다르다. 평온까지는 아니지만, 혼란의 파도는 잠재웠으니 말이다.

    해서 침착하게 휴대폰을 무음 상태로 바꾼 뒤 주머니에 찔러 넣을 수 있었다. 그렇게 탈의실을 문고리를 잡아끄는데 웬 여자의 고함이 들려왔다.

    “나오라니까?! 이 중에 없어?! 너야?!! 아님 너야?!!!”

    날카로운 목소리에 다정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수라장이 된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향하자, 당황과 두려움으로 떠는 간호사들과 호기심에 어슬렁어슬렁 나와 있는 환자들, 그리고 보안팀까지 몰려 있었다.

    이상한 건 보안팀이 무력이 아닌 말로 조곤조곤 여자를 말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않은 게 아니라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지? 의료 사고가 있었나?

    병원에서 목소리가 높아지는 경우는 대개, 오진이나 의료 사고 혹은 가족의 상태를 받아들이기 힘든 배우자의 책임 전가 등이 있었다.

    그때 신규 간호사인 누리가 급하게 다정에게 다가왔다.

    “저 선생님, 잠깐 저 좀…!”

    그리고 다급하게 다정의 팔을 잡아끌었다.

    “음? 무슨 일인데?”

    연유를 모르는 다정은 정색하고 자리에서 버텼다. 무슨 말이든 은밀하게 듣기보단 빠르게 듣고 싶었다. 주변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속닥거리는 건, 그녀의 체질과 맞지 않았다.

    “아 그러니까 이쪽으로…”

    그때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던 여자의 찢어진 눈이 다정에게 닿았다. 다정도 무감한 얼굴로 중년 여성을 쳐다보았다.

    미용 주사를 많이 맞은 것인지 팽팽하고 볼륨감 넘치는 얼굴을 덮고 있는 보브 컷에 고풍스러운 블라우스와 가죽으로 된 블랙진. 그리고 킬힐. 돈 향기와 함께 위압감이 넘쳐흘렀다.

    소시지처럼 통통한 여자의 입술이 열렸다.

    “……너니?”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한 다정이 검지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네가 온다정이란 년이냐고.”

    녀, 년? 이건 또 뭐지?

    다정도 상당히 불쾌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런데요?”

    “오호라- 네가! 네가 그 불여우란 말이지?!!”

    네 배속쯤으로 울리는 또각또각 킬힐 마찰음과 함께 여자가 다정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덥석 다정의 머리채를 잡았다.

    “너 오늘 딱 걸렸어, 이 나쁜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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