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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끔한 것이 좋아-22화 (22/82)
  • 22화. 오지 않겠다면, 내가 가겠습니다

    “갑자기 인터뷰라니? 스케줄은 전부 취소되었다고 했잖아.”

    습기를 머금고 욕실을 나온 성후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랬는데, 이번 건 회장님께서 미리 잡아 두신 거라서. 중국 기자입니다.”

    연석 역시, 하필이면 이럴 때,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의 힘은 강해서 합쳐지면 거세진다. 때문에 연석은 말을 아꼈다.

    “중국 기자가 왜??”

    “저… <가르니크>에 관한 인터뷰입니다. 피아니스트로서가 아니라. 창립일 기념 인터뷰라고, 가족 인터뷰를 모두 따는 모양입니다.”

    거절하고 싶다. 하려면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랬을 시 곤란해질 것은 분명 연석이리라.

    “기자는.”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불편하시면 밖에서 보자고 하겠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성후는 마지못해 허락했다.

    “네.”

    깍듯하게 대답한 연석이 다음 스케줄을 읊었다.

    “그리고 이후 주치의 방문이 있을 예정입니다.”

    “시간은.”

    “거의 겹칠 듯합니다. …미룰까요?”

    주치의와 함께 올 다정이 떠오른다. 자신을 버젓이 보고도 웬 남자의 손을 꼭 잡고 있던 그녀의 모습이.

    환자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누가 되었던 자신에게서 그녀가 시선을 거둬간 순간, 성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차선으로 미뤄진 쪽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아직 그녀에겐 그 정도의 사람이라는 사실도. 때문에 심장이 으깨지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할까요?”

    미운데…… 미워할 수가 없다. 그래서 더욱 곤혹스럽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고 대답했다.

    “미루지 마.”

    나는 이미 이 싸움에서 졌다.

    그녀를 밀어내는 건, 스스로 독약을 마시는 꼴일 테니.

    “나가 있겠습니다.”

    그는 말 대신 눈으로 대답했다.

    얼마 뒤 말끔하게 차려입은 성후가 거실로 나왔다.

    깨끗하게 올린 머리와 파란색 셔츠에 베이지 슬랙스. 완전히 정장 차림은 아니지만 역시 폼 나게 차려입은 모습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자랑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일 보던 모습이었는데…….

    연석의 마음이 엉뚱하게 북받쳐 올랐다. 모처럼 울컥하는 감정을 삼키고 연석이 대답했다.

    “중국에서 방금 막 도착했답니다. 지금 정원을 통과하고 계실…”

    말이 떨어지기 전에 초인종이 울렸다.

    이내 불에 익은 듯 새카만 피부에 어울리지 않은 연노란 하와이 남방을 입은 기자와 몇몇 스텝이 등장했다.

    성후는 편안하게 소파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이했고 중국에서 온 외신 기자가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십니까. 중국에서 온 장안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통역으로 함께 온…」

    「어서 오세요. <가르니크>의 장남, 마성후라고 합니다.」

    그의 유창한 중국어 실력에 스텝들은 감탄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 어렵다는 성조까지 완벽해, 낯선 사람이었다면 중국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오호… 중국어를 하신다고 듣기는 했는데. 통역까지 필요 없을 정도로 수준급이실 줄은. 더욱 진솔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어 몹시 기쁩니다.」

    기자가 한참이나 목을 뒤로 젖혀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내 흠뻑 빠진 미소를 짓는다.

    「어려서부터 중국에 오래 있었는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앉으시죠.」

    인터뷰는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사진 몇 장과 무난한 질문지가 구성을 이루고 있어 성후도 별 거부감 없이 곧잘 대답했다.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기자가 물었다.

    「그런데 가업을 잇지 않으시고 피아노를 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사실 저희 중국 내에서도 마성후 씨를 궁금해하는 팬들이 아주 많습니다.」

    기자의 쾌활한 말투에 성후가 속으로 움찔했다.

    그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약속한 듯 현관으로 날아들었다.

    연석이 잠시 묵례를 하고 현관문을 열자 주치의 김동학과 웬 낯선 간호사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다정이 아니어서 잠시 멈칫한 연석이 그들에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지금 인터뷰 중이시라.”

    이를 어쩌지. 속으로 성후의 눈치가 보여 은근히 떨기도 했다.

    “아, 그러지요.”

    두 사람은 거실이 훤히 보이는 다이닝 룸 식탁에 앉아 눈인사했다. 퍽 불쾌해진 성후는 차가운 표정으로 기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질문 계속 드려도 될까요?」

    「네. 말씀하시죠.」

    「피아노를 하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마치 처음 하는 질문인 양 기자의 목소리는 다시금 유쾌했다.

    「글쎄요. 해야지, 하고 생각해서 한 게 아니라 어느 날 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작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해 기억엔 없습니다.」

    그의 대답에 기자가 눈을 번뜩이며 대꾸했다.

    「사랑처럼 말이군요?」

    돌아오는 기자의 대답에 성후의 눈동자가 새까맣게 가라앉는다.

    「…그렇다고 볼 수 있겠네요.」

    사랑.

    가슴이 시큰시큰 울린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그녀에게 사로잡혀 있는 걸까.

    「꽤 오랫동안 쉬지 않고 공연을 하시더니 최근엔 모든 공연을 취소하셨다는 말이 돌더라고요. 아, 이건 인터뷰와 상관없는 질문입니다. 저희 내부에서 들리는 소문이기도 하고요. 저- 녹음 꺼주세요! …말씀 편하게 하시면 됩니다.」

    아무리 서글서글한 인상의 기자라도, 다 믿어선 안 된다. 녹음기 같은 기계가 다 무슨 소용인가. 이 자가 귀로 듣고 있거늘. 또 사실은, 어딘가에 녹음기나 초소형 카메라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복잡한 마음을 누르고서 대답했다.

    「들으신 바대로 오랫동안 쉬지 않고 달려왔던 터라, 잠깐 휴식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건강상에 문제가 있으신 건 아니겠지요?」

    염려스러운 말투지만 낚시성 질문이 틀림없다.

    「그럴 리가요.」

    「저분들은… 의료진이 아닌가요?」

    미소 뒤에 날카로운 기자의 눈이 동학과 낯선 간호사에게로 날아들었다.

    그 순간 성후의 속에서 인내심이 뚝 하고 끊어졌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싸늘한 눈으로 기자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뭐 하는 거지?」

    가능한 한 가장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기자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걱정에…」

    사실 이 질문은 이 남자뿐만 아닌 다정에게 던지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어디서 무얼 하길래, 왜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 거냐고.

    「걱정?」

    그래. 나를 걱정하는 눈빛을 해놓고선, 나에게 빠져든 눈빛을 해놓고선…! 클럽에 가질 않나. 다른 남자의 손을 꼭 붙잡질 않나. 그렇게 내가 돌아왔는데도, 연락 한 통 없지를 않나!!

    성후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인터뷰도 마쳤으니 사적인 질문은 삼가겠습니다.」

    「피곤하니 이만 돌아가세요.」

    급격히 냉랭해진 성후의 눈길에 기자가 바짝 주눅이 들었다.

    혹 그가 불쾌한 심정을 <가르니크> 회장에게 전달한다면 고생스럽게 타국까지 와서 진행한 인터뷰는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결례했습니다.」

    기자가 최대한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질문지에 없던 사적인 질문도, 사적인 대답도, 모두 없었던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성후가 단단히 못을 박았다. 이럴 때 그는 자비란 없다.

    「알다마다요.」

    꽁지에 불이라도 붙은 듯 외신 기자와 그의 팀원들이 물러났다.

    성후는 성큼성큼 식탁으로 다가와 다짜고짜 말했다.

    “교수님. 저 다시 입원하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질문이 아니라 평서문이었다. 그가 원하면 모든 것이 이뤄지니까.

    그의 확고한 말투에 동학은 안경을 고쳐 쓰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다시 병원으로 가죠.”

    그렇게 성후는 망설임 없이 병원으로 향했다. 온다정, 당신. 이렇게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말이지? 오지 않겠다면, 내가 가겠습니다. 딱 기다리세요.

    * * *

    “거봐… 아무것도 아니었잖아.”

    며칠 내 같이 긴장했던 다정이 승주의 검사 결과를 듣고서 친구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래도 불안해.”

    공포는 심리적인 데서 출발하므로 단박에 사라지지 않았다.

    “불안하면 이제 처신 좀 잘해!”

    이 망할 놈의 자식아!

    주변에 사람들만 없었다면, 아니, 자신이 이 병원 간호사만 아니었다면 분명 걸쭉한 욕을 시원하게 날려줬을 것이다. 어렸을 때처럼.

    그때 결과를 기다리는 며칠 동안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졌던 승주가 의기소침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 이제 진짜 조심할 거야……”

    “조심이 아니라…”

    그녀는 목소리를 최대한 죽여 질타했다.

    “원나잇 같은 거는 이제 절대 하지 마. 나중에 사랑하는 여자를 만날 때까지 제발 아껴두라고.”

    “그럴 거야. 이번에 네가 진짜 많이 의지 됐어.”

    착 가라앉은 승주의 목소리가 평소의 그답지 않다. 철없이 발랄하고 귀여운 게 승주의 트레이드 마크였는데.

    이대로 완전히 기가 죽어버린 건 아니겠지?

    “지켜볼 거야.”

    다정은 장난스럽게 레이저를 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러자 승주가 피식 웃었다.

    “…응. 헉! 우…와…!”

    다정의 뒤로 시선을 던졌던 승주의 감탄사에 그녀의 시선도 자연스레 돌아갔다.

    헉…!

    머리를 말끔하게 올린 성후가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더욱이 오늘따라 귀티가 줄줄 흘렀다. 안 그래도 멋진 남잔데 이 세상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홀려버릴 작정인가보다.

    다정의 눈빛이 흔들린다. 그것을 보지 못한 승주는 방금까지 앓던 시름을 잊고서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어나서 저렇게 잘생긴 사람은 처음 봐. 마스크가 미쳤어. 저 정도면 거의 남신 아니냐? 클럽에서도 한 번도 못 봤는데, 저런 얼굴. 한 번만 저 남자로 살아보고 싶다.”

    그래, 가능하다면 나도 한 번만 저 남자로 살아보고 싶어. 그가 요즘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내 생각은 했는지…… 궁금하거든.

    “배웅해줄게. 가자.”

    성후는 자신을 못 봤을 거라 생각하며 등을 돌리는 다정이다.

    “이제 정말 정말 조심할게.”

    여전히 남동생 같은 어조로 말하는 승주를 보며 다정이 슬프게 웃는다.

    한 시름을 넘긴 탓일까. 승주의 말소리가 바람결에 흩어지는 듯했다.

    “늘 미안하다야…”

    “괜찮아.”

    사실 괜찮지 않다. 마음이 황량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인연이 아닌 것을.

    다정의 나이쯤 되면 연애는 등가교환의 법칙이 적용되는 링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 그 링 위에서 이탈한 자는 욕심 낼 자격이 없다.

    “언제 한 번 연락해. 보답으로 소개팅이라도 해줄게.”

    “얘가, 얘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너 마중 나오고 배웅한 거 말고 내가 한 게 뭐 있니?”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면 즐거워지리라 믿으며 다정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저를 쳐다보고 있는 성후의 완벽한 미간이 좁아지는 것도 모르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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