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나는 당장이 좋은데
“……젠장!”
피아노 건반에 손가락을 얹어 보았던 성후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제 눈을 손으로 가리며 울컥하는 마음을 가까스로 꾹 눌린다.
“후아… 이 정도는 예상했잖아…….”
그래, 했는데…
그의 입술이 바르르 떨려왔다. 이내 짓이겨지던 입술과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하는 턱.
정면 승부는 그 시작부터가 녹록지 않다.
성후는 젖은 얼굴을 쓸어내린 뒤 피아노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순간적으로 당연하게 다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최근 성후의 심적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는 유일한 진통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마음으로 이런 얼굴로 그녀를 찾을 순 없다.
그는 피아노 방에서 나와 제 방으로 들어왔다.
쓸데없이 넓고 풍성한 침대에 털썩 몸을 뉘었다. 눈을 감고 뜨기만 반복했을 뿐인데 며칠이 그냥 그렇게 흘려버렸다.
간간이 술도 마셨다. 연석의 얼굴이 얼핏 보이기도 했고. 핸드폰에 부재중 전화나 문자가 쌓이기도 했다.
머지않아 핸드폰 배터리마저 죽어버리자, 연석이 따뜻한 죽과 함께 정보를 배달했다.
“오랜만에 만난 한국 친구들이 유명한 클럽이 있다고 해서 저를 데려갔었습니다.”
뜬금없는 소리에 연석을 올려다보는 성후다. 침잠한 눈동자지만 그 속에 어떤 어둠이 깔려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연석이다.
성후는 그런 연석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스케줄과 별개로 슈트를 반듯이 차려입고 서 있는 비서는 마치 다른 세상 사람 같았다.
적어도, 자신의 비서 같지는 않았다.
그때 연석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거기서 익숙한 여성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성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여성?”
“이 얘기를 할까 말까 며칠간 많이 망설였는데 말입니다.”
서론만 듣는데 벌써 피로해진다. 그는 침대에 다시 풀썩 기대어 긴장감 없는 얼굴로 협탁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어제 마시다 남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다.
“거기서…”
미미한 결벽증이 있는 연석은 많은 사람과 부대끼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클럽에 갔던 날도 그랬다.
담배 연기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린 홀이 싫어, 2층 부스를 잡았을 때였다.
웬 건장한 남자의 보호를 받으며 미친 듯이 봉을 쥐고 흔드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세상은 넓고 별종은 많다고 여길 때 땀에 젖어 상쾌한 얼굴의 여성을 보게 되었다.
‘네 스타일이야?’
친구들이 물었지만, 연석의 귓가에 닿진 않았다.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상대를 확인했다.
역시나.
다정이었다.
이미 잔뜩 취해 보이는 그녀는 연신 웃음을 흘렸다. 간호사 정복에 갇혀 있던 온다정 선생님과 같은 인물이라고 여길 수 없을 만큼 열정이 넘쳐 보였다.
위험할 성싶어 따라붙었는데 함께 나간 자가 지나가는 남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그녀의 친한 친구.
그러나 연석은 남녀 간의 우정을 믿지 않았다.
혹시 잘되고 있는 건 아닐까. 무슨 상관이람.
방관자의 마음으로 며칠을 보내다 점점 망가져 가는 성후를 보자 다정의 존재가 절실하다고 느껴졌다.
“온다정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큽.
“푸훗-!!”
마시던 물을 뿜었던 성후가 연신 콜록콜록 기침을 해댔다. 연석은 깨끗한 폼으로 손수건을 척 건넸다.
“역시 은명 대학병원 마돈나는 다르더군요. 인기가 정말 많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연석이 딱딱한 손뼉을 쳤다.
“……그걸 왜 내게 말하는 거지?”
“어차피 한 가지에 빠질 거면, 술보단 사랑이 낫지 않겠습니까.”
연석의 눈이 새카맣게 죽어버린 핸드폰에게 향했다.
“두 분 마음이 같다면 온다정 씨도 형님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내버려 둬.”
말과는 달리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그분은 여태 형님 없이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야무지게 잘 살아갈 겁니다. 무척 매력 있는 분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형님이 시름으로 시간을 흘려보내기엔…… 그리 여유 있는 상대는 아닐 것 같습니다.”
남자는 때때로 술로 세월을 보내는 시기가 있다. 성후가 지금 딱 그럴 때다.
연석도 그것을 알지만, 며칠간 바라만 보자니 억장이 무너졌다. 일시적이라고는 해도 성후는 연석에게 있어 태산 같은 형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를 존경하고 좋아했다.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때문에 그가 무너지는 모습은, 연석에게도 치명적이었다.
절벽과 마주한 그를 구원해줄 사람은 오직 다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오랜 시간 성후의 곁을 지키며 그가 피아노가 아닌 대상에게 마음을 준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휘둘리거나, 그런 식으로 웃는 것을.
“어떡할까요. 핸드폰 배터리… 충전할까요.”
텅 비었던 성후의 눈동자에 강인한 영혼이 깃드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충전해.”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욕실로 직행했다.
* * *
며칠째 다정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잠적 중인 두 남자 때문이었다.
하나는 친구.
하나는 입술을 훔친 남자.
“하아…….”
화장실 비어있는 칸 안에 앉아, 핸드폰을 꼭 쥔 채 기도하듯 손을 모았다.
“제발 승주야…”
떨리던 승주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여자가 섬뜩하게 웃었어. 병원에 가보라 하더라고. 그 여자가 나갈 때까지 한참이나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어.’
‘일단 병원에 와.’
‘나 지금 심각한 일이 생긴 거 아니겠지?’
날라리처럼 자랐다고 해도, 다정이 기억하는 승주는 여려 터진 꼬마였다. 툭하면 동네 친구들에게 치여 눈물을 짜내던 것이 바로 승주였던 것이다.
‘심각한 일인지 아닌지 와서 확인해.’
‘무서워……’
‘무서우면 뭐. 그래서 어쩌자고?!’
‘다른 애들한텐 말하지 마.’
자책감에 잔뜩 긁혀서 나오는 목소리엔 두려움과 치졸함이 섞여 있었다.
‘대학병원까진 정 그러면 근처 병원 어디라도 가 봐.’
어떤 형태의 승주래도 승주는 숭주였고, 또 그는 이토록 무거운 형벌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
‘어?! 이승주! 대답해!’
‘알았어.’
‘다녀와서 말해줘.’
그때, 핸드폰이 떨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여.
성후였다. 문자에 대꾸도 없고 며칠간 뜸하던 그가 먼저 연락해온 것이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다정의 정신이 빠르게 성후에게로 향한다. 승주에 대한 걱정은 잠깐 뒷전이 되었다.
-멍청하게 지냈습니다.
예상대로 홀로 앓았던 모양이다. 주변이 온통 암흑이다.
“…힘든 시간을 보내셨군요.”
나는 걱정하느라 힘들었어요.
-얼굴, 보러 가도 됩니까.
“…네?”
-언제가 좋겠습니까. 나는 당장이 좋은데.
며칠 잠잠하다 갑자기 몰아치다니. 그답다. 깜빡이 없는 급습에 미워질 만도 한데, 가슴이 바람 앞 나뭇잎처럼 속절없이 흔들린다.
나 진짜… 이 남자 되게 좋나 봐. 이렇게 제멋대로 구는 남자에게 화는커녕, 안심돼. 멀쩡한 목소리 하나만으로…….
“지금. 지금이 좋겠어요.”
전화를 끊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몇 걸음 걷자, 비어있는 병실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난감한 남자의 목소리도.
“저 그냥 가지고 논 거예요?”
울먹이는 간호사는 신경외과 간호사였다. 그런데 왜? 여기서?
“아니, 가지고 놀긴 뭘 가지고 놀아. 나랑 선생님이랑 뭘 했다고요.”
대답하는 상대는 계태풍. 요즘 따라 다정의 주변을 맴도는 인물이었다.
“지난번에… 입 맞추셨잖아요! 전화도 하시고! 밥도 같이 먹고! 언제는 제가 막 귀엽다고도 하셨잖아요!”
“하, 진짜 답답하네. 입은! 진짜 실수였다고 그때도 분명히 말했고! 전화도 밥도 선생님이랑 친해졌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건데. 저희 과까지 찾아와 이러는 거는…… 좀 아니지 않습니까?”
‘실수’.
태풍의 말인데, 다른 이에게 들은 것처럼 다정에 심장을 관통한다.
입을 맞추는 게 실수가 될 수도 있구나.
다정이 냉랭한 눈으로 병실 안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던 태풍과 눈이 딱 마주친 것이.
“온 간호사…?”
태풍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다정은 정말로 그를 상대하기 싫었다. 동료끼리 나누는 껍데기뿐인 인사조차 내키지 않았다. 그녀는 빠르게 비상구로 들어갔고 익숙하게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온 선생님!”
왜인지 저를 쫓아와 부르는 태풍의 목소리가 비상구 계단 안에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싫었다. 무조건 싫었다. 헉헉거리는 숨을 고르고 로비로 다시 발걸음을 뗐다.
이제 곧 성후가 이곳에 온다.
만나면 흘러간 그의 며칠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깊은 공감과 위로를 건네고 싶다. 그건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이다. 가장 잘하는 일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보탬이 된다면!
가슴이 터지라 뛸 때 로비에서부터 당당히 걸어오는 성후의 모습이 보였다.
언뜻 보아도 조금 수척해진 얼굴이었지만, 말끔하게 차려입은 탓인지 세상의 모든 빛을 흡수한 듯 후광으로 번쩍였다.
아마 없는 빛도 보이게끔 이 사랑에 빠진 눈이 마술을 부렸으리라.
다정이 금세 밝아진 얼굴로 걸음을 떼자,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손을 턱 잡았다.
“……승주야??”
“다정아… 나……”
언제부터 와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협소한 벤치에 앉아 있던 승주의 무너진 얼굴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다정의 심장이 조각조각 깨지는 것만 같았다.
다정은 바로 한쪽 무릎을 바닥에 붙이고서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떨고 있는 승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나 봐. 왜 이제 나타난 거야? 병원은… 갔다 왔니?”
어릴 적부터 늘 누나처럼 굴었던 다정의 얼굴을 보자, 승주의 눈에서 주륵 눈물이 나왔다. 다정은 승주의 손을 꼭 잡았다.
“겁쟁이. 너 안 갔지? 내가 접수 도와줄까? 응?”
그 순간 흰자위로 저 멀리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성후가 걸렸다. 아니, 아른거렸다.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 달려가기엔, 동생 같은 친구의 절망을 등질 자신이 없다.
다정은 언제나 그랬다. 자신의 상황보다 더 아프고 힘든 사람의 편이 되어주는 사람. 소중한 이들의 큰 병보다 자신의 감기가 아프게 느껴질 때면 죄책감마저 느껴버리는 사람.
“울지 말고.”
승주의 손을 몇 번쯤 다독이다가 시선을 돌렸다.
마성후 하나로 꽉 찼던 병원 입구는 어느새 텅 비어있었다.
은근히 시선을 돌려보아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흐윽… 다정아.”
눈물 젖은 승주의 얼굴. 사라진 성후. 그리고 끝없이 추락하는 다정의 심장.
그녀도 울고 싶어졌다.
결국엔 이렇게 엇갈리고야 마는 성후를 떠올리며 다정이 생각했다.
역시 내게 사랑은… 사치구나.
그녀는 묵묵히 허물어진 친구를 부축해 세웠고,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