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19화 (19/82)
  • 19화. 당신만 소중하게

    “저… 교수님. 주치의는 이의준 선생님 아니었나요?”

    “아 이 선생……. 으음. 자네만 알게. 오늘 전공의나 전문의들 모두 회의 소집 됐어. 앞으로 마성후 환자 주치의는 나일세.”

    김동학 교수가 부드럽게 차를 움직이며 말했다.

    “회의요?? ……음, 그런데, 주치의가 계속 이렇게 바뀌어도…….”

    그러자 동학의 눈길이 쓱 다정에게 닿았다가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포컬디스토니아는 사실… 난치병이지 않은가. 우리끼리 얘기지만 주치의가 누가 된다고 해도 무의미할 걸세.”

    동학의 말에 다정이 심장에 금이 갔다. 이어 침울해진 심정으로 창밖을 쳐다보았다. 빠르게 뒤로 밀리는 도심 풍경을 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이대로 정말…… 그는 영원히 피아니스트로서의 생명이 끝나는 것일까…….

    생사를 오갈 정도의 병이 아니라면 사실 몸보다 중요한 건 정신 건강인데.

    그 점에서 심히 성후가 걱정되었다.

    “다 왔구만. 하……. 비어있었던 집이라는데 으리으리하구만.”

    동학이 차에서 내리며 그렇게 읊조리는 순간 검은색 슬라이딩 정문이 묵직하게 밀리며 열렸다. 이미 병원 측에서 차량 정보를 들은 모양이었다.

    “호오…”

    감탄하던 동학도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넓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올라가자 기본적인 정비도 함께할 수 있는 회색 차고지가 보였다.

    차에서 내려 본 저택으로 걸어가는 동안 지금은 작동이 멈춰 있는 고풍스러운 분수와 관리가 잘된 원목 놀이터 등이 다정의 시야에 들어왔다. 와…… 드라마에서도 이런 집은 본 적이 없는데. 정말 재벌 집 아들이었구나.

    다정이 속으로 감탄하며 성후의 집 현관에 섰다.

    벨을 누르자, 그의 비서라던 연석이 문을 열어주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안내를 위해 연석이 몸을 움직이자 웬 반짝이는 커다란 형체가 먼저 시선을 강탈했다.

    …흡!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다.

    단층이 나뉘어, 꼭 작은 무대 같은 곳에 놓인 크리스털 피아노는 손가락의 병을 얻은 마성후처럼 화려하고도 쓸쓸했다. 분명히 멋지지만 외롭게 된 처지가 비슷하게 느껴졌다.

    좀처럼 피아노에게 시선을 못 떼고 있을 때,

    “오셨습니까.”

    아직 목이 덜 풀려 긁혀서 나오는 성후의 목소리가 다정의 귀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천천히 시선을 돌리자, 제 쪽으로 걸어오는 성후가 보였다.

    편안해 보이는 면바지에 베이지 니트를 느슨하게 입은 그의 섹시력이 오늘도 열 일을 했다.

    “안녕하세요.”

    정복 안에 갇힌 심장이 요란스럽게 뛰기 시작한다.

    “편하신 곳에 앉으시죠.”

    그가 가리키는 곳엔 꼭 대리석 무늬와 비슷한 회색 물소 가죽 소파가 위용을 드러내며 놓여 있었다.

    성격이 묻어나게끔 제각기 자리를 잡고 앉아 진료가 시작되었다.

    “반갑습니다. 주치의 김동학입니다.”

    그가 갈색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네. 연락받았습니다.”

    “앞으로 최선을 다해 마성후 님을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의사에게 대꾸하는 그의 목소리가 병원에 입원했었던 당시보다 훨씬 담백해졌다.

    “앞의 내용은 모두 들으셨을 테고, 지금부터는 혹여 겹치더라도 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성후가 고개를 끄덕인다.

    “성인이 되어 발병된 병이기 때문에 전신으로 퍼지거나 하는 위험은 없을 겁니다.”

    “전신으로도 퍼집니까.”

    “아주 어렸을 때 발병하는 경우 종종 그럴 때가 있습니다만 마성후 환자님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의사가 확언하는 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까요.”

    여태 진료를 해주었던 의사들에 비해 덤덤한 투로 말하는 동학의 말투가 신뢰감을 주었다.

    “현재로선 난치병으로 분류되고 있지만, 저희가 살아가며 난치병이 없는 시대는 없었습니다. 너무 겁먹지 마세요. 아직 마성후 환자님이 젊어서 그렇지 저처럼 나이가 들면 병 하나둘쯤은 데리고 삽니다.”

    “…….”

    “압니다. 그래도 아직 받아들이기 힘드실 거란 거.”

    “받아들여야 합니까…”

    한 가닥의 희망이라도 붙들고 있으면 정말… 안 되는 겁니까.

    잔뜩 상처받은 성후의 눈빛에 다정이 울컥해 시선을 떨구었다. 도저히 아픔으로 구겨진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오만한 얼굴이 나았다.

    “현재 상황은 받아들이셔야죠. 지금을 인지해야 다음도 있습니다. 이 병에 특효약은 없지만, 증상이 점점 완화되도록 재활요법적인 치료를 할 것입니다. …온 선생.”

    “네, 교수님.”

    “마성후 님에게 약물 투여하고 처방받아온 약 챙겨드리세요.”

    “…알겠습니다.”

    다정이 주사기를 꺼내기도 전에 성후가 먼저 그녀에게 팔을 내밀었다.

    실습을 해오던 시절부터 단 한번도 떨어본 적 없던 천생 간호사인 다정이 처음으로 떨렸다. 아마도 이 떨림은 흔들리는 감정에서 기인했으리라.

    하지만 떨림도 이미 간호사 업무가 체화된 그녀의 노련함을 막을 수 없었다.

    약물을 빨아들인 뒤 바늘을 위로 향하도록 한 다음 주사기를 톡톡 쳤다. 그리고 뒷부분을 살짝 눌러 허공에 약물을 분사하는 과정을 거쳤다.

    “따끔합니다.”

    불거진 혈관으로 주삿바늘을 찔러 넣었다. 오늘따라 피막 하나가 뚫린 듯 딸깍하는 느낌이 천둥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동학의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너무나 고요해, 진동 소리가 꼭 벨소리처럼 성 같은 집안을 장악했다.

    민망함에 붉어진 얼굴로 허둥지둥하던 동학에게 성후가 말했다.

    “전화 받고 오세요. 편하게.”

    “……그럼, 잠시 실례.”

    동학이 현관 밖으로 사라지자 연석도 눈치껏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집에서 온다정 씨를 보니까 기분이 이상하군.”

    성후의 말에 다정이 대답했다.

    “호텔에 계신다고 들었는데.”

    지난번 하루를 함께 보내며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눴었다. 깊지는 않으나 서로에 대한 최신 정보들 같은 것들이었다.

    “나왔습니다.”

    “왜요?”

    다정이 성후의 눈을 깊게 들여다보았다. 그냥 거기 계시지 그랬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봐도 저렇게 근사한 피아노가 있는 집에…… 왜 오셨어요? 괜찮으신 거예요?

    “어디로든 도망치려고 했는데, 그냥 정면 돌파하고 싶어서.”

    당신은 더는 내게 피난처가 아니야. 그래선 안 돼. 출구가 되어줘.

    “…네?”

    있는 그대로 뱉기는 멋쩍어, 성후는 웃음으로 대신한다.

    “그냥. 당신을 호텔로 부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건 일하는 간호사로서…”

    “그래도 싫어요.”

    “…….”

    웃음기를 거두고 빤히 쳐다보는 성후의 눈에 얼굴이 터지라 붉어지는 다정이었다. 이어, 그의 윤이 나는 입술이 다시금 열렸다.

    “소중히 대하고 싶습니다.”

    “왜 갑자기 그렇게 훅… 들어오시는 건데요.”

    다정의 물음에 성후가 몸을 그녀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만 소중하게 대하니까. 나는 당신만 소중하게 여겨보면 어떨까 싶거든요.”

    “저……”

    그러자 성후의 입술이 클로즈업해 보이는 다정이다.

    그녀의 심장이 쿵쾅쿵쾅 요란한 소리를 낸다.

    “그러니까…”

    은근히 목을 뒤로 빼고 있는 순간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동학이 등장했다. 어디선가 연석도 덩달아 등장했다.

    “온 선생. 다 끝났어?”

    “네.”

    “그럼 정리하고 가지. 마성후 님. 별일 없으시면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조심히 가세요. 그리고…”

    성후의 눈길이 다정의 옆 볼에 닿는다.

    “간호사 선생님도요.”

    “아하하, 네.”

    간호사 미소는 발사하지 못했다.

    그의 앞에선 이젠 완전히 여자 온다정이 되어버리고 마니까.

    으리으리한 성후의 집에서 빠져나온 뒤 다정이 얘기했다.

    “여기 앞에 세워주시면 버스 타고 가겠습니다.”

    “모처럼 딱 저녁 시간인데, 밥이나 먹고 들어가지.”

    “밥이요?”

    “아, 미안. 선약이 있던가?”

    “그런 건 아닌데…”

    그 순간 동학의 바지 주머니에서 벨이 울렸다.

    벨은 끊기면 다시 울리고 끊기면 다시 울리기를 반복했다.

    다정의 얼굴에 점점 물음표가 떠오르자 동학이 잠시 무안한 미소를 짓더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정확한 말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꽤 앙칼진 여성의 목소리가 파편이 튀듯 흩어져 나왔다. 전화를 끊은 뒤, 다정이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댁으로 들어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닐세. 뭐 먹겠는가? 스테이크?”

    “……저야 뭐든 좋습니다.”

    다정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트렌디한 팝송이 흐르는 레스토랑 안에는 이미 비어있는 자리를 찾기가 힘들었다. 세련된 인테리어에 젊은 사람들이 넘쳐나는 레스토랑을 보는 다정의 눈이 반짝거린다.

    “교수님. 여기 뭐예요?”

    “아하하. 여기가 SNS에서 유명한 맛집이라고 하더군. 딸아이한테 들었는데, 어쩐지 좀처럼 올 기회가 생기지 않아서. 혼자 오기도 그렇고.”

    “하하. 교수님 맛집 마니아시구나!”

    다정이 손뼉을 치며 대답했다.

    “…실은 그렇다네.”

    동학이 쑥스러운 기색으로 대꾸했다.

    두 사람은 겨우 빈 자리에 앉아 주문했다. 메뉴판에 ‘best’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는 메뉴들로 무려 네 개나.

    차례대로 음식이 나왔고 다정의 입이 오랜만에 호사를 누렸다. 그녀는 오물거리다 이내 속닥거렸다.

    “역시. 맛집에는 다 이유가 있네요?”

    “그렇구만. 근데 이 파스타라는 거 말이야….”

    “네. 사골 파스타.”

    다정이 해맑게 대답했다.

    “그래, 이것 좀 느끼하지 않나…?”

    “교수님 입엔 느끼하세요?”

    “아니아니, 젊은 사람들 입에 맛있는지가 궁금해서.”

    “아아~~”

    다정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동학을 쳐다보았다. 동학은 살짝 놀라 움찔한다.

    “따님이랑 같이 오려고 그러시는구나~?”

    “그렇지, 뭐. 별 게 있겠나. 딸아이 입맛이 너무 까다로워서 말이야. 미리 고증의 절차를 밟아두려고 왔네. 수험생이라 스트레스가 많거든.”

    “교수님 정말 좋은 아버지시군요. 단언하건대 따님이 좋아하실 거예요. 여기 오시면 반드시 사골 파스타랑 김치 삼겹살 파스타를 꼭 같이 시켜주세요! 궁합이 아주 찰떡이네요.”

    “온 간호사??”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엇?”

    “교수님까지…? 두 분 어쩐 일로?”

    외래 간호사 두 명이었다.

    “오늘 마성…”

    입을 열려던 다정이 다시 말을 삼킨다. 성후에 관한 얘기는 가급적 언급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성?”

    “아니, 일이 있어서 같이 저녁 먹게 되었어요. 박 선생님이랑 김 선생님도 합석하실래요?”

    “그래 그게 좋겠구만. 오늘 저녁은 내가 살 테니.”

    “맞아요, 여기 지금 핫플이라서 자리도 잘 안 나잖아요~”

    다정이 간호사들을 비어있는 자리에 끌고 와 앉혔다.

    간호사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메뉴판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다정을 힐끔, 교수를 힐끔, 은밀히 번갈아 본다. 그 눈에 깃든 색을 읽지 못한 다정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기는 사골 파스타랑 김치 삼겹살 파스타가 맛있어요.”

    “아, 네, 그럼… 그걸로 먹죠 뭐.”

    떨떠름한 미소를 짓던 한 간호사가 찝찝한 기분을 삼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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