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18화 (18/82)
  • 18화. 백의의 천사

    희미하고도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성후가 성큼 다가와 다정의 귓가에 속삭였다.

    “왜요. 싫으십니까?”

    다정이 이를 꽉 깨물고 복화술로 대답했다.

    “그럼… 좋아야 하나요?”

    “나쁠 것도 없죠. 저랑 놀면서 일한다… 생각하면 되니까.”

    “제가 지금 마성후 씨랑 놀 군번이라고 생각하세요?”

    많은 눈이 다정을 보고 있었다. 해서 앙칼지게 물었다. 그러자 성후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 아찔한 미소에 되레 불안해지는 다정이다.

    “군번이 되죠.”

    어째서냐고 묻지 말자. 쇼킹한 대꾸가 돌아올 듯하니.

    “내가 당신의 남자친… 흡!”

    다정이 양손을 높이 뻗어 성후의 입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그리고 간호사 미소를 발사했다.

    “하하하. 마성후 환자님. 제가 그…… 출장 건은 팀장님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말씀 드리겠습니다아…?”

    성후는 하관이 가려진 채 눈으로만 씩 웃었다. 그 미소가 불안할 정도로 근사하다.

    그 순간,

    “!!!”

    다정의 입안에 갇혀있던 그의 입술이 꿈틀거린다. 이내 야릇한 혀가 그녀의 손바닥을 핥는다.

    다정의 뒤에선 절대로 보이지 않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어 성후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당황으로 물든 다정의 눈빛이 몹시 사랑스럽다. 붉어진 얼굴도, 무슨 말을 뱉을지 움찔거리는 도톰한 입술도.

    그때 연석이 성후에게 성큼 다가왔다. 다정은 뻗었던 손을 냉큼 거둔다. 연석이 성후에게 무어라 속삭이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성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따가, 다시 찾아오죠.”

    그렇게 말하며 급하게 등을 보이는 성후. 그런 성후가 걱정되지만 쫓아가 물을 상황이 아니었다. 다정은 급하게 뛰던 심장을 헛기침으로 다독이며 몸을 돌렸다.

    그러자 부담스럽게 반짝이는 간호사들의 눈빛이 광선처럼 눈부셨다. 언제 왔는지 모를 태풍도 조금은 싸한 눈으로 다정을 쳐다보았다. 많은 이들의 눈앞에 위장이 바짝 조여들었다.

    그녀는 최대한 평소처럼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4-2번 환자한테 좀 다녀올게요.”

    일일이 보고할 필요가 없는데, 해버렸다.

    그러자 누리가 난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4-2번 케어 벌써 했는데요. 제 환자라서…….”

    “아아. 4-3번인가 봐요. 아무튼, 갔다 올게요.”

    평소에도 딱딱하게 굴었지만, 오늘따라 더욱 딱딱하게 구는 다정이다. 늘 간호하는 기계처럼 굴었던 그녀인데, 당황해 굳어진 모습에서 본 적 없던 인간미가 물씬 풍겼다.

    “네. 다녀오세요.”

    눈초리를 가늘게 뜬 부연을 제외한 간호사들은 그런 다정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다정에게 태풍이 따라붙었다.

    “진짜…… 마성후 환자랑 아무 사이 아닌 거 맞아요?”

    전에 물었던 질문을 한번 더 반복하는 태풍이다. 성후가 있을 땐 기가 죽어 말 한마디 못 붙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완벽한 찬스다.

    그러나 그건 그의 착각이었다.

    다정은 지금 몹시 진이 빠진 상태였고, 태풍은 언제나 그럴 때만 다정의 곁을 졸졸졸 따라왔다.

    “계 선생님.”

    다정이 낮은 목소리로 태풍을 불렀다. 다리도 우뚝 멈췄다. 시선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태풍의 심장이 거세게 뛴다.

    다정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하고서 그저 그녀가 여신으로만 보였기 때문이었다.

    “네…?”

    설렘을 가득 실은 되물음이 돌아간다.

    “저 좋아하세요?”

    묻는 목소리에 아무런 감흥도 어려 있지 않아 되레 놀란 태풍이 용기 있게 대답한다.

    “솔직히 좀 관심 있어요.”

    “그렇담 꺼주세요, 관심.”

    1초도 걸리지 않은 거절.

    잠깐 얼이 빠졌지만, 그는 지지 않고 몰아쳤다.

    “왜 그래야 하나요?”

    “전 의사를 싫어하거든요.”

    직업을 걸고넘어지자, 그는 기가 막혔다. 의사라면 환장하는 여자는 보았어도 대놓고 싫다고 말하다니.

    “왜, 왜 의사가 싫은데요?”

    왜냐고요? 당신들은 싸잡아 간호사를 무시하니까. 고상하게 무시하든, 대놓고 무시하든. 당신이 이러는 거, 잠깐이라는 거 알아요. 전 숱하게 봤어요. 전공의가 전문의가 되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요. 사람을 살리는 인술보다 야망만을 좇는 괴물을요. 선입견이라도 상관없어요. 이제 별로 알고 싶지도 않으니까.

    머릿속에 꽉 찬 불신을 굳이 소리로 뱉지 않았다.

    그녀는 신규 간호사로 시작해 근속 근무하며 여러 의사에게 상처를 받았었다. 처음엔 동료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제가 좀 비뚤어진 사람인가 보죠. 그럼.”

    매정하게 떠나가는 다정의 뒷모습을 태풍은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

    병동을 한 바퀴 순례하며 현실 감각을 겨우 찾은 다정이 이번엔 수간호사실을 찾았다.

    “다정이구나. 마침 잘 왔어.”

    환자평가표를 최종적으로 확인하던 정희가 고개를 들고 아는 체를 했다.

    “네, 저…”

    “들었지? 출장.”

    “네.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요. 제가 알기론 불법으로도 알고 있고요.”

    “개인적으로 간호사만 가면 그렇지. 주치의랑 동행하면 별 문제 안 돼.”

    “……듣기는 했었는데, 그런 일이 있군요.”

    부정을 저지르는 사람처럼 다정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하자 정희가 피식 웃었다.

    “왜 없어. 시골 보건소 의사들도 다 출장 다니잖아. 같은 맥락이라고 이해하면 되지.”

    “그런데…”

    “노인이랑 공인은 달라? 그거야말로 역차별 아니니?”

    반문하는 정희의 목소리가 아프지 않게 날카롭다.

    “네?”

    “다정이 네가 올곧은 심성이라는 건 아는데…… 반대로 생각해 봐. 마성후 씨는 <가르니크> 아들인 걸 떠나, 유명 인사야. 그가 계속 병원에 들락날락하는 게 어떤 의미겠어? 그리고 거기가 정형외과고, 신경외과야. 말 나오는 거 시간문제 아니겠니?”

    “…….”

    정희의 말 중 틀린 것이 없어 마음이 퍽 무거워지는 다정이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건 특혜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는 배려라고 생각하자.”

    “……네.”

    의기소침해진 다정을 보자 정희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 너무 몰아붙인 듯해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꾸고서 말했다.

    “온 선생은 늘 하던 대로 하면 됩니다~ 응?”

    다정도 정희의 마음을 눈치채고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네, 그럴게요. 팀장님.”

    수간호사 실을 나와 다정은 곧장 병동으로 향했다.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는 동안 여러 사념이 그녀의 머릿속을 돌아다니다 백기를 들었다. 성후에게 느꼈던 감정에 비해 배려가 부족했다는 미안함은 훌훌 털어버리기로 한다. 앞으로 조금 더 그의 편에 서면 될 일이니 말이다.

    병동으로 돌아오자, 신규 환자 입원 소식이 들렸다.

    간호사들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한 간호조무사가 베드를 갈고 있었다. 씩씩대는 얼굴을 발견하고서 다정이 다가갔다.

    “무슨 일 있어요?”

    다정이 다가가자, 어린 간호조무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왜 그래요?”

    마침 드물게 비어있는 병실이어서 간호조무사가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저랑 간호사 선생님들이랑 일하는 내용은 비슷한데…… 너무 아랫사람 취급을 하니까….”

    종종 있는 일이다.

    배운 교육이 엄연히 다르지만, 언뜻 보기엔 비슷한 업무를 맡고 있어 가끔 마음 상해하는 간호조무사들이 있었다.

    다정도 처음엔 그런 간호조무사들이 이해가 잘 안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쩌면 저가 의사에게 느끼는 환멸감을 이 어린 간호조무사도 간호사에게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따라 들었다. 그러자 퍽 안쓰럽게 느껴졌다.

    다정은 간호조무사의 등을 쓸며 말했다.

    “섭섭했겠어요. 그렇다고 저희가 차등 대우를 하는 건 아니에요. 병원이란 특성 때문에 작은 실수도 용납이 안 된다는 거, 선생님도 잘 아시잖아요. 간호사들이 많이 예민할 거예요. 그리고 가르쳐 주고 싶었을 테고, 같이 해나가고 싶었을 거예요.”

    그동안 많이 서러웠는지 간호조무사가 입술을 삐쭉이며 눈물을 주룩 흘렸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 같아서 다정은 한번 더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에구에구….”

    * * *

    병원 일 층 카페.

    온몸에 금을 두른 듯 수억으로 치장한 <가르니크> 회장과 그의 아내, 선화 그리고 성후가 삼각형을 이루고 앉아 있다.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들의 시선도 강탈될 만큼 어마어마한 아우라를 품고 있는 가족들은 주변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연석은 성후의 뒤에 서서 긴장으로 땀을 훔쳤다.

    “몸은 좀 어떻니…?”

    우아한 단발이 아주 근사한 선화가 물었다.

    “괜찮습니다. 손가락이 궁금하실 텐데, 이미 보고는 들으셨겠죠.”

    성후의 말에 선화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들이 얼마나 상심이 클까, 아무리 헤아려보려고 해도 마음은 묵직하기만 할 뿐, 괜찮은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관록이라는 건 이럴 때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럴 땐, 오래 산 나이도, 그에 맞는 경험도, 모두 다 무색하게 느껴진다.

    무력감이 선화의 몸을 휘감을 때 남편 기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까칠하게 대답할 거 뭐 있냐. 다 네 걱정이 돼서 그러거늘.”

    “……압니다.”

    너무 잘 알아… 가족들 얼굴 보기가 힘이 듭니다.

    자꾸 생각이 나서요. 제가 걸어온 길을 늘 축복해주셨던 당신들의 목소리가, 웃음이, 환호가, 모두 피아노를 떠올리게 해서요. 겨우 도망치고 있는 날 대신해 울어주실 것만 같아서요.

    “너무 힘들면 중국에 들어와라.”

    성후의 진짜 본가는 중국에 있었다.

    화장품, 생활용품, 식품 등을 제조 및 가공하는 그룹 <가르니크>가 세계적인 그룹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중국인들의 압도적인 지지 덕분이었다. 현재 확인되는 자산은 167억 달러로 한국 안에선 경쟁이 되는 기업이 없었다.

    그랬기에 마성후의 부친 마기태는 일 년에 몇 번 얼굴 보기가 드문 성공한 기업인이었다. 이렇게 성후를 위해 한국까지 왔다는 건, 그가 많은 것을 포기했다는 뜻이 되었고 그것이 무뚝뚝한 부친의 마음이라는 것을 아들인 성후도 느꼈다.

    “여기에 있을 겁니다.”

    “굳이 한국에 너 혼자…?”

    기태가 미간을 찌푸렸다.

    “네.”

    “…왜.”

    “놀고 싶습니다.”

    성후의 말에 기태가 움찔하며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엔 선화가 나섰다.

    “……놀아?”

    “네. 그동안 너무 치열하게 산 것 같아서. 재벌가 아들답게 팽팽 놀아보려고요.”

    기태는 아들이 드디어 미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아들을 위한 짤막한 잔소리를 꺼내 놓으려 할 때, 선화가 기태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아내의 분홍빛 입술이 열렸다.

    “그래. 잘 생각했구나. 이럴 때 아니면 네가 언제 놀겠니? 돈이라면 새처럼 자유로우니 마음껏 써라. 부모가 돼서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거뿐이구나.”

    우아한 얼굴에서 나오는 시원시원한 대답에 성후가 씩 웃음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돈이라면 저도 많습니다.”

    “힘들게 번 네 돈 말고. 엄마 돈, 아빠 돈 써. 원래 재벌 아들은 그런 거야. 네가 그동안 너무 독하게 독립적으로 살았어. 이제 어리광 좀 부리렴.”

    “네, 주머니가 빈곤해지면 슬쩍 기댈게요.”

    성후가 웃음을 띠고 가볍게 대답하자 선화의 얼굴이 더욱 온화해졌다. 너라면 잘 이겨낼 거야. 우리 아들.

    기태는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선화의 재촉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심해서 가세요. 멀리 안 갑니다.”

    “힘들게 배웅은. 너도 재미있게 지내.”

    “네, 어머니.”

    들을 때마다 듣기 좋은 ‘어머니’ 소리에 선화가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부모님을 보내고 나서 크게 호흡을 들이마시는 성후다. 폐가 시원하다. 그때 연석이 다가왔다.

    “다행입니다.”

    “뭐가.”

    “아… 아닙니다.”

    선화가 뒤에서 많이 울었단 얘기를 전해 들은 바 있던 연석이어서 그는 무심결에 안도하는 기색을 비치고야 말았다.

    “……싱겁긴. 온다정 씨는?”

    “역시 아들은 키워봤자 소용…… 아, 아닙니다. 제가 자꾸 속마음을.”

    “이 자식이.”

    “이쪽으로 가시죠.”

    이제는 시키지 않아도 다정의 동향을 척척 파악해두는 연석이다.

    똑똑한 비서가 안내하는 곳엔 다정이 울먹이는 간호조무사를 안아주는 장면이 보였다.

    “아니, 왜 울고 그러세요.”

    성후는 그런 다정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사회생활은 어디서든 힘든 법이죠. 버티면 돼요, 버티면! 앞으로 울 일도 천진데, 이만한 일에. …뚝!”

    어린아이를 달래듯 간호조무사에 젖은 뺨을 닦아내는 다정의 손길이 야무지다.

    병실 문가에 비스듬히 기댄 성후는 그렇게 한참이나 다정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가에 한층 더 깊어진 감정이 잔잔한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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