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진격의 마성후
“그런데 말이야…… 온다정 씨 소문 말이야…”
성후가 아주 어렵게 입을 떼자, 연석이 희미하게 미간을 모았다.
“소문이요? …어떤?”
“그… 왜 있잖아……”
민망한 듯 미간을 긁적이며 입을 여는 성후다.
“아아, 온 선생님 몸매…”
“쉿. 입에는 올리지 말고.”
그가 질타성 눈빛으로 연석을 노려보았다. 누구는 말 못 해서 안 하는 줄 아나.
“……흐읍. 네. 그 어마어마한 소문이요.”
“네가 여기저기서 온다정 씨에 대한 소문을 많이 물어오던데. 어디서 들리는 거지? 그게 다.”
“어디서든 들리더라고요. 가는 곳마다. 쑥덕쑥덕. 쑥덕쑥덕.”
“왜 그런 거라고 생각하나.”
송곳 같은 성후의 질문에 연석이 가뿐하게 대답한다.
“그야…… 온다정 간호사가 은명 대학병원의… 간판이니까?”
“간판?”
“얼짱이란 뜻이죠. 많이 주목받는 거 같던데.”
“예뻐서?”
“큭…. 형님 눈에도 예쁘긴 한가 봅니다.”
연석이 물음에 성후가 미간을 매우 좁게 모았다.
“설마 네 눈엔 안 예쁘냐?”
“……그냥 뭐 성형을 안 했다 치면 예쁘신 것 같기도?”
“미친놈. 네가 진짜 예쁜 얼굴이 어떤 얼굴인지 모르는가 본데…”
성후가 씩씩대자, 연석이 손으로 워워 말리며 말했다.
“그분의 예쁨은 형님만 아는 걸로.”
“만인이 다 아니까 묻는 거 아니야.”
그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얼마나… 훌륭한지도!”
“아, 그건 온 선생님 맹장 수술 집도의가 슬쩍 흘렸다고 하던데요.”
“……집도의?”
“네.”
“집도의가 어떻게?”
그 순간 잔인한 상상들이 성후의 머릿속을 더럽힌다.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 이런 건 아니겠지, 하며 심장박동수가 빨라지던 찰나에 연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술실에서 봤답니다.”
쿵.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한다.
“……봐?”
성후의 눈빛이 늑대의 그것보다 날카롭게 번쩍거렸다.
“완전히 대놓고 본 건 아니라 수술복 안으로 대충… 으흠. 어쨌든 그랬다고 들었습니다.”
“너는 어디에서 들었고?”
“복도에서 의사 둘이 떠드는 걸 들었습니다.”
성후의 얼굴이 깨질 듯 얼어붙었다.
“……이런 개자식들.”
단두대에 의사의 목을 올라갈 듯한 직감이 드는 연석이다.
“……어떤 놈들인지 샅샅이 알아봐.”
그의 목소리가 노기로 섬뜩하게 흘러나왔다.
“네.”
며칠 세 다정을 향한 성후의 마음이 더욱 깊어진 것이 느껴져, 연석도 따라 심각해졌다. 덩달아 앞으론 다정에 대해 가볍게 입을 놀려선 절대로 안 되겠다는 자기방어 본능이 발휘되기도 했다.
“그리고 병원장한테 전화 넣어.”
그는 분노의 찬 숨을 거칠게 뽑아낸 뒤 말했다.
“내일 당장 가겠노라고.”
“네.”
대답한 연석의 마음도 몹시 바빠진다. 그러니까 저에게도 시간은 내일, 병원에 가기 전 딱 하루뿐인 셈이니까.
* * *
커튼을 치고 자는 걸 깜빡했던 다정이 눈살을 찌푸리며 침대에서 일어난다. 짧아진 해를 원망하다 말고 거의 본능에 가깝게 뒤집어 두었던 핸드폰을 획 돌린다.
문자가 들어와 있다는 알람 램프가 깜빡깜빡.
“…흡.”
그녀는 핸드폰을 가슴팍에 확 끌어안는다.
마성후 씨일까?
맞겠지?
아니면?
누가 연락 올 때가 있었나?
에이, 나한테 그런 게…… 있지!
우석이, 승주, 기봉이, 엄마까지…!!
뿐만 아니다.
어쩌면 대출이나, 카드 대금, 쇼핑몰 광고일지도 모른다.
부재 문자의 후보가 너무 많이 상상되어 그녀의 눈썹꼬리가 축 내려간다.
몇 분을 흘려보내며 가까스로 마음을 비우는 데 성공한 다정이 핸드폰 잠금 화면을 풀었다. 무심하고 빠르게 터치해 문자 메시지 함으로 들어가자……
“…허업!”
웃지 않으려고 입을 틀어 막아보지만, 의지와 다른 광대가 다정의 노력을 이기고 치솟았다.
[잘 자요, 내 생각 그만하고.]
그의 오만한 목소리가 다정의 속에서 되살아난다.
다정은 침대에서 똑바로 자세를 고쳐 잡고 앉았다.
그리고 답장을 보냈다.
[굿모닝?]
그러나 그에게선 이틀째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 * *
“확실해?”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연석에게서 받은 서류를 넘기며 되묻는 성후.
“네.”
“……도박이라. 병원 측에서는?”
“아는데 덮어 준 눈치입니다.”
성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룸미러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룸미러 속의 담담한 연석의 눈이 성후를 쳐다보며 말했다.
“도박 빚 갚는다고 수술방에서 사는 모양이더라고요.”
“……한 기자는?”
“연락해두었습니다. 11시까지 은명 대병원에 온다고.”
“좋아.”
곧이어 연석이 운전하던 검정은 세단이 매끄럽게 주차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차에서 내린 성후가 새카만 슈트 깃을 탁탁 정리했다. 그 모습을 보던 연석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였다. 늘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존잘력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 것이었다.
“들어가지.”
자신이 깐죽대던 재벌 집 아들에서, 스스로 이룬 천재 피아니스트의 표정이 되었다. 그가 무대에 오르기 직전, 무대와 한 판 겨루기라도 하려는 듯한 그 표정 말이다. 오랜만에 마주했더니 연석의 가슴이 다 뛰었다.
“올라가시죠.”
성후와 연석은 깔끔하고 거침없는 걸음으로 승강기로 향했고 이내 하늘로 승천하듯 빠르게 병원장실 앞에 도착했다.
똑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주름이 환하게 진 병원장이 두 사람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아침은 드셨습니까?!”
인자한 얼굴에 싹싹한 말투로 소파에 앉을 것을 권했다.
“이리로 앉으시지요.”
성후는 보는 이로 하여금 두려울 정도로 냉랭한 기운을 뿜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턱. 던지듯 황색의 서류 봉투를 유리 테이블 위에 얹었다.
“……이게?”
“긴말하는 거 입 아프니까 열어보세요.”
나이도 한참 어린 그였지만, 어쩐지 조상보다 더욱 어렵게 느껴졌다. 병원장은 침을 꼴깍 삼키고 봉투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병원의 후원금 비리를 포함한, 의사 몇 명의 지독한 흠이 담겨있었다.
병원장의 낯빛이 사신을 만난 것처럼 새파랗게 질렸다.
“이걸 어째서……”
“병원장님이 저 대신 칼춤 한번 춰주시면 좋겠는데.”
“……칼춤이라니요?”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고 이내 쾌활하고 단단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가 들어왔다.
“여, 성후 씨! 아 그리고, 안녕하십니까. 마성후 씨의 열렬한 팬, 한민석 기자라고 합니다!”
…꿀꺽.
병원장의 등이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이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성후가 슈트 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병원장에게 내밀었다.
마치 죄 많은 신하에게 아량을 베푸는 왕의 모습 같았다.
“예에, 감사합니다. 아, 저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서류에 찍혀있는 의사들. 이 병원에서 치우시지요.”
“아하하…. 그… 그게 그렇게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요즘 법이 워낙 깐깐해서 까딱했다간…”
“깐깐한 법을 상대하시겠습니까, 절 상대하시겠습니까.”
성후의 뒤로 <가르니크>의 거대한 산이 보였다.
“지방으로 보내시든, 해외 봉사를 보내시든, 그냥 길바닥에 버리시든… 그건 병원장님이 알아서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이시진 알겠습니다.”
“만에 하나.”
그가 몇 초를 흘려보낸 뒤 다음 말을 강조했다.
“다음에 병원에 왔을 때, 그 의사들의 자리가 치워지지 않았다면… 한 기자님?”
“네. 기사는 모두 작성해뒀습니다. 크~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말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전송하기 버튼을 누르면 상부에 올라가고 몇 분 내로 세상에 빵! 터질 겁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의사들의 목이 아닌, 병원장의 목도 그대로 날아가 버릴 것이다.
병원장은 더 이상 묻거나,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걱정 마세요…… 반드시. 반드시, 잘 해결해두겠습니다.”
연유도 알 필요 없다. 마성후가 그리 하라면 그리 하면 된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병원장을 두고 방을 등진 성후와 연석. 그리고 한 기자.
“오늘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별말씀을.”
“그런데 기사가 정말… 준비되어 있습니까?”
오늘 만나 파일을 건네주려고 했었는데. 언제 그걸 다 준비한 걸까.
“설마요. 연락받자마자 튀어나왔는데. 하하하하.”
그렇게 말하는 한 기자가 남자답고도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성후가 씩 웃으며 한 기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한 기자는 정말로 성후의 팬이었다. 우연히 연주회장에서 만난 작은 인연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혹 어려우시면 다시 불러주세요. 언제든지.”
한 기자가 떠나고 성후는 곧바로 정형외과 병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미리 얘기해뒀지?”
“물론이죠.”
“주치의는?”
“당빠 오케이입니다.”
무뚝뚝한 얼굴과 말투로 신세대인 척하는 연석이 퍽 거슬린다. 하지만 지적하긴 애매하다. 늘 말대꾸가 준비되어 있는 연석을 건드렸다가 되레 자신이 이런저런 지적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흐음.”
“마침 엘리베이터가. 타시죠.”
띵.
승강기가 정확히 정형외과 병동에 멈춰 섰고 이틀간 내내 보고 싶었던 다정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단아하고 오늘도 고아한.
“엇…?”
성후의 얼굴을 알아본 간호사들이 술렁인다. 그럼에도 다정은 꿋꿋이 간호사들에게 어떤 수칙을 말해주고 있었다.
여전하네. 주변은 안 보고, 계속 일만.
그런 그녀가 기특하면서도 사랑스러워 성후가 피식 웃음을 짓는다.
완전히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녀가 드디어 뒤를 돌아보았다.
“……!!!”
“굿모닝?”
어제 아침, 그녀가 보낸 문자에 대한 답을 육성으로 돌려주는 성후다.
혐오스러운 것들을 모조리 치워야 그녀를 볼 낯이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그만의 사죄였다. 역겨운 소문을 자신의 입을 통해 다정에게 전했던. 그것도 여자에게 휘둘린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서. 그게 다 뭐라고. 바보 같았다.
‘유익한 소문을 하나, 들었는데 말입니다.’
그날의 기억이 다시금 떠오른 성후가 미간을 설핏 찌푸렸을 때 다정이 화창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진료?”
정말로 친근한 말투였다.
그러자 온 마음이 허물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범했던 무례를 대가 없이 용서받은 기분도 따라 들었다.
“저랑 좀 가시죠, 출장.”
성후의 말에 연석을 제외한 모두가 놀란 눈치다.
다정은 그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위에서 아무것도 듣지 못한 모양이다.
“…어디를요?”
“제 방에.”
“……또 입원하셨어요?”
“정정하죠. 저희 집, 제 방에.”
“……!”
갑자기 뜨거운 시선들이 다정의 등에 꽂혔다. 돌아보지 않아도 동료들의 표정이 어떨지 빤하게 예상되었다.
온몸이 심장이 된 것처럼 뜨거워지는 순간이었다.
“빚, 졌잖아요. 여러모로.”
성후의 말에 그에게 받았던 호의들이 뇌리를 스친다.
“흠흠. 그건 말이죠…”
다정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성후는 그녀가 계속해서 말하도록 허락해주지 않았다.
악마처럼 입꼬리를 올리며 그가 말했다.
“빚진 게 있으면 갚는 게 응당 도리 아니겠습니까.”
그를 겪어 본 경험으로 바짝 긴장한 다정이 성후의 입술에 집중했다.
그때, 그의 잘생긴 입술이 다시금 열렸다.
“갚으세요. 몸으로라도.”
여기저기서 간호사들의 환호 비슷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