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16화 (16/82)

16화. 남친으로 승급되다

핸드폰 벨이 울렸다. 입술이 닿기 1cm 전에.

닿지 않아서일까.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바짝 드는 다정이다. 스르르 내렸던 눈꺼풀을 힘 있게 들어 올리자 뇌쇄적으로 쳐다보는 성후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이 말했다.

받지 맙시다.

다정의 시선이 쓱,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으로 향했다. 발신자는 엄마였다. 무시할 수도 있었다. 평소라면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다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까 맞선 장소에서 했던 자신의 언행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사고를 제대로 쳤으니 모른 척하기가 힘들다.

“…전화, 받아야 할 것 같아요.”

다정의 말에 성후가 애써 감정을 죽인 눈동자로 멀어져 갔다. 순간 가슴 속에 서늘한 바람이 한 줄기 불었다. 다시 그의 옷깃을 잡아끌고 싶은 욕구를 가까스로 누른 채 통화키를 터치했다.

당장은 매력적인 남자와의 키스보다 죄책감 좀 덜어 달라며 울던 엄마에게 더 마음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여보세요.”

-너 어디야…….

엄마의 목소리가 상당히 낮다. 어떤 형태의 소식이든 뭐라도 들으신 모양이었다.

“나 아직 밖….”

-그 남자랑 같이 있니?

…역시.

다정의 눈길이 잠시 성후에게 향했다가 그대로 거두어졌다.

“……응.”

-무슨 사이인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구나.

“…….”

-내가 그리 너를 닦달했는데… 엄마한테 소개해줄 수 있는 남자였다면, 말했겠지.

“엄마…”

-자신감 하면 우리 딸인데. 그런 네가 거짓말하게 하는 남자라면 엄만 싫다.

“그런 게 아니라…… 하아…”

-깔끔하게 헤어져. 좋은 인연 만날 때까지 맞선 자리는 엄마가 계속 알아볼게.

“엄마아….”

다정의 목소리가 울먹이며 흘러나왔다.

진짜로 성후와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닌데, 아니라고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계속 이렇게 시간을 쓰레기통에 버려가며 맞선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굳이 제 입으로 성후를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네가 상대방 남자한테 무례하게 굴었다는 것도 다 덮고 넘어갈게. 아니! 앞으로 또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해도 엄마가 다 감안할게. 엄마가…… 다른 사람들한테 뭐 저런 싹퉁바가지 딸을 뒀냐고 욕먹어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사죄할게.

다정의 우울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성후가 잠시 차에서 내렸다. 지금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그녀가 편하게 통화를 하도록 자리를 비켜주는 일이 다였다.

차 문을 닫고 팔짱을 낀 채 차에 기대선다.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굴려본다.

“남친… 맞선… 결혼…”

결과적으로 시집을 가고 싶어 안달이었던 건 다정이 아닌 모양이었다. 정황상 그녀의 어머니.

오 분쯤 흘렀을까.

다정이 차에서 내렸다.

“타요. 통화 끝났어요.”

분명 웃는데 슬프고 민망한 감정이 오묘하게 교차한 얼굴이었다.

차를 사이에 두고 성후가 툭 물음을 던졌다.

“연애… 하고 싶습니까?”

묻는 얼굴이 여느 때와 달리 너무 진지해서 다정도 덩달아 숙연해졌다. 그녀는 짧은 고심 끝에 대답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결혼은?”

“……그것도 아직.”

이렇게 대꾸하고 나니 아무 생각도 없이 산 여자 같아 괜히 민망해진다. 너무 간호사로서만 살았다. 인간 온다정은 내버려 둔 채.

씁쓸함이 입안을 감도는데 성후가 다가왔다.

그리고 뜻밖의 말을 내놓았다.

“어머님께 남자친구 있다고 얘기하세요.”

“…?”

“내가 해줄게요.”

“해준다니요…?”

“대역 구하기 힘들 텐데. 인생 편하게 갑시다.”

코미디 같은 제안을 하면서 그의 눈빛이 계속 진지하다. 그래서다. 이토록 심장이 뛰는 이유는. 그의 눈과 말투가 너무 진짜 같아서 심장이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마성후 씨랑 엮이면 인생, 그리 편할 것 같지 않은데요.”

적어도 제 심장은요. 남아나지 않을 게 확실해요.

“어느 방향이든 힘겹다면 낯선 쪽을 선택하죠.”

“왜요? 또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허투루 듣지 않았다는 걸 느낀 성후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안 가면 모르니까. 가보고 생각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

“온다정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갑자기요?”

“염치도 있고.”

“그런 건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요.”

다정의 볼이 뜨거워졌다.

“그래서 지금 망설이는 겁니다.”

“망설이다니요.”

“엄마를 속여도 될까, 마성후를 이용해도 될까.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타인만 생각하고 있잖아요.”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의 일인데 정작 거기에 자신을 위한 고민은 없었다.

“조금 더 이기적여져도 됩니다. 남을 위해 화내지 말고 자신을 위해 화도 내고.”

한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쭉- 자신을 사랑한다고 느꼈고 그 누구보다 자존감이 충만하다 믿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그녀지만, 인생을 시간 단위로 쪼개보면 그 속에 자신을 예뻐해 주었던 기억이 있었는지 희미하다.

저도 몰랐던 제 모습을 성후가 멋대로 꺼내 놓았다. 그리고 메시지를 던졌다.

이제는 너도 너를 좀 돌보고 살라고.

그러자 번뜩 정신이 들었다. 다정은 결의에 찬 눈으로 성후를 쳐다보며 말했다.

“좋아요. 제 남자친구가 되어주세요.”

역할 놀이는 이제 막 시작될 뿐인데, 성후의 심장이 고지에 다다른 마라토너처럼 폭주하기 시작한다.

공정한 시선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다정의 눈동자가 맑고 또렷하다. 곧은 성정이 눈을 통해 고스란히 비쳤다.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휙.

성후가 몸을 돌려 먼저 운전석에 올랐다. 조금 더 그녀를 보고 있었다면, 이번엔 허락 없이 입술을 훔쳤을 것이다. 곧이어 다정도 차에 올랐고 차는 어둠을 가르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집이 병원이랑 가깝군요?”

힐끔.

도착한 목적지를 눈으로 훑으며 성후가 말했다.

“네, 버스로 10분? 서울 지리 잘 모르신다면서 감이 좋으시네요.”

“그렇습니다.”

와… 이 남자 뻔뻔한 것 좀 봐.

“그럼 오늘 밥 잘 먹었어요.”

“저도 커피 잘 마셨습니다.”

“이거… 고맙습니다.”

다정이 발찌를 보이게끔 들며 말했다. 아까 길거리에서 성후가 사준 것이었다. 액세서리를 하고 싶지만, 병원에선 최대한 자제를 해야 했기 때문에 마음껏 치장할 수가 없는 삶이었다. 그래서 매대 위에 올려진 액세서리를 눈으로만 훑다, 성후가 먼저 발찌는 어떻냐고 물어봤다.

그렇게 해서 가지게 된 발찌는 은은한 로즈 골드에 앙증맞은 음표가 몇 개 들어가 있는 디자인이었다.

비싼 건 아니었지만, 시사하는 의미가 크다.

먼 훗날, 오늘을 돌아봤을 때 이 발찌는 마성후 그 자체가 되어줄 것이기에.

“다음에 착용한 거 한번 보여주세요.”

“그럴게요.”

“분명 잘 어울릴 겁니다.”

“쿡.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온다정 씨는 다리가 심각하게 예쁘거든요.”

무감한 얼굴로 던진 칭찬에 다정이 어이가 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런 칭찬은 좀 웃으면서 합시다?”

그러자 성후가 피식 웃는다.

“네.”

다정이 차에서 내려 창밖에서 손을 흔들자, 성후가 다정을 따라 내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연락… 해도 되겠죠? 남친이니까.”

“아아. 필요시에.”

“아니, 아무 일 없어도.”

그가 곧바로 정정했다. 눈빛은 강렬했다. 다정도 지지 않고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네, 전 너무 바쁘니까 답장이 늦어도 괜찮다면.”

“그럼…”

성큼 성후가 다가왔다.

…갑자기 뭐야? 또? 키, 키스 중독 아니야??

혼란스러운 와중에 눈을 꼬옥 감는 다정이다. 그런데 뺨을 스치는 그의 검지가 느껴졌다. 응? 손가락?

“아.”

들려오는 성후의 목소리에 그녀가 감은 눈 중 한쪽을 떠서 보았다.

“속눈썹이.”

“아아.”

다시 눈을 멀쩡하게 뜨는 다정이다.

“기대하셨나 봅니다.”

그렇게 말하며 웃는 그의 잘생긴 입꼬리가 얄밉다.

“그러게 말이에요.”

남 일처럼 말하는 다정의 말투가 재미있어, 성후가 큭큭 웃음 지었다. 이렇게 웃는 모습은 의외로 소년 같다.

그리고 뭔가 익숙하다.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아, 이 남자.

다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말이 안 되지. 재벌 집 아들… 그것도 천재 피아니스트를 내가 어디서?

“전화번호.”

성후가 자신의 핸드폰을 툭, 내밀었다.

“아.”

그것을 받아 번호를 찍었다. 통화키를 누르지 않은 건 이 상황에서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핸드폰을 돌려받은 성후가 묘한 미소를 짓는다.

“그럼 들어가세요.”

깔끔하게 돌아선 그는, 다정이 집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차를 출발해 가버렸다. 다정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 지었다.

“아니, 뭐가 저렇게 쿨해?”

가능하다면, 닮고 싶다. 저 미친 쿨함.

하지만 그건 불가능의 영역이었나 보다.

남자에게 설레는 것이 억만년만의 일이라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온 신경이 핸드폰으로 쏠렸다. 씻을 때도, 대충 차린 저녁을 먹을 때도, 잠자리에 들었을 때도. 심지어 핸드폰 전원을 한번 껐다가 켜보기까지 했다. 처참하게도 조용하다.

“치… 연락한다더니.”

그러다 완전히 무음으로 바꾼 뒤 핸드폰 화면을 거꾸로 덮어 두었다. 더 이상 사로잡혀 있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도 상했지만, 감정 낭비가 크다.

눈을 질끈 감는다.

내일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그런데 늘 친근하게 굴던 수마가 다정을 찾아오지 않았다.

킬힐에 뻐근해진 발목과 성후의 곁에서 오랫동안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늘어졌음에도.

“하아…”

새카만 어둠에 익은 눈이 반짝이며 깜빡거린다.

“마성후…….”

천장에 성후의 얼굴이 수놓아져 있다. 무감한 얼굴과 한번씩 심장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야릇하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교차하여 떠오른다.

진짜…

“마성의 남자야…… 그 남자!”

다정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훅 덮어 썼다. 그의 환영에서 멀어지길 소망하며…….

* * *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성후의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열기를 머금은 채, 여미지 않은 샤워 가운을 대충 걸친 성후가 밤색 소파에 털썩 앉는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어 그것을 만지작만지작하다 이내 두 손으로 꽉 쥔다.

결심한 듯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였지만, 금방 ‘지움’ 키를 꾹꾹꾹 눌린다. 굿나잇 인사가 이렇게 힘든 거였나.

생각해보면 여자에게 보내는 사적인 밤 인사는 그의 생에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흐음.”

호기심에서 기인하였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녀를 향한 마음이 복잡하다. 그는 핸드폰을 들어, 다시 신중하게 타자를 터치하기 시작했다.

“오늘 선상 레스토랑에서는 맛있… 아니야, 오늘 갔던 레스토랑 다음에도…… 후우… 아니야, 구구절절이잖아 너무. 흐음…… 커피 잘 마셨습니다. 다음에는 제가 살…, 아니, 아니……, 주무십니까? …이것도 아니지, 진짜 구 남친 같잖아. 하아… 젠장!”

안 보내면 편할 것을, 무슨 말이라도 그녀에게 보내고 싶다. 하고 싶다. 존재감을 여실 없이 드러내고 싶다. 가능하다면 미치게 신경 쓰이게끔 만들고 싶다.

지금 자신이 이러는 것처럼…….

“흐음…….”

다시 마음을 신중하게 모아본다.

[잘 자요, 내 생각 그만하고.]

……전송!

미친 척 전송하고 나자 진이 쫙 빠지는 성후다. 마치 장거리를 단거리 선수처럼 질주한 듯 기가 빠졌다.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3분에 한번씩 핸드폰을 확인했건만, 해가 뜰 때까지 다정의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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