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15화 (15/82)

15화. 자제력 무엇?

펑!

정수리에서 터진 망상이 연기가 되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그… 그렇군요.”

갑자기 다정의 속에 죽은 줄 알았던 연애 세포가 꿈틀거렸다. 그러고 보니 남자의 품에 안긴 지 퍽 오래되었다.

“다정 씨는요?”

흠칫.

“네…?”

“좋아해요?”

……무엇을요?

“네???”

설마, 당신처럼 몸 쓰는 거 좋아하냐고요?? 이미 야릇한 생각이 들어버렸는데 제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겠어요?!

“커피.”

3초의 시간을 흘려보낸 뒤, 다정이 애써 밝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 물론이죠! 커피! 완전 좋아하죠!”

페이스를 잃은 지 오래되어, 그녀는 평소처럼 침착할 수가 없었다.

눈에 띄게 가슴을 들썩거리며 웃는 다정의 속이 뻔히 보이는 성후가 속으로 웃었다. 하지만 냉정한 얼굴을 유지한 채 이어 말했다.

“그럼 안내하세요. 서울 지리는 잘 몰라서.”

“그건 저보다 더 똑똑한 목소리가 해결해 줄 거예요.”

다정은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등록했다. 그리고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 악마의 혓바닥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요동치는 마음을 추슬러야만 했다.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침묵이 차 안에 고였다.

그가 음악이라도 틀어주길 속으로 바랐지만, 그는 성실한 택시 기사처럼 운전에만 집중했다.

어색해 죽겠는데, 더 어색해질까 봐 차마 어색하다고 말도 못 하는 남루한 심정.

어째서 이렇게까지 그를 의식하는지, 다정으로서도 의문이었다. 남자를 안 사귀어본 것도, 그가 첫 키스인 것도 아닌데 말이다.

마치 사춘기 소녀의 그것처럼 달뜨는 감정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날씨가 좋네요.”

가까스로 침묵을 깨트리기 위해 한마디 꺼내자, 성후가 단칼에 잘랐다.

“오늘 미세먼지 아주 나쁨입니다. 보세요. 하늘이 회색입니다.”

“…….”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게 좋겠어.

“…저, 음악이라도 틀면 어떨까요.”

그와 자신 사이에 ‘병원’이란 연결고리가 없어지니, 할 말이 더욱 곤궁해진 상황이다.

그런데 잠자코 운전만 하던 성후가 한 박자 느리게 대답을 했다.

“지루하실 텐데. CD라고 있는 건 죄다 피아노 연주곡뿐이라서.”

허억……!

그 순간 자신의 가벼운 조동아리를 하염없이 때리고 싶어졌다. 오늘은 입이 아니다. 조동아리! 조동아리!

“그거라도 괜찮다면…”

“아니요! 두, 두 시의 라디오가 재미있어요!”

“아 그렇다면.”

라디오를 재생시키자 유쾌한 디제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차 안 구석구석까지 머물러 있던 어색한 공기가 모조리 박멸되는 순간이었다.

휴우… 안심을 하려는 찰나,

-자, 이번엔 품격 있는 커퓌 타임을 위해, 우아한~ 피아노 명곡을 준비했습니다.

아 뿔 사.

-피아니스트 이루마가 연주한 ‘봄의 왈츠’입니다.

다정은 급하게 손을 뻗어 볼륨을 죽여 버렸다. 그녀의 행동에 성후는 아무런 말이 없다. 다시금 가라앉은 무거운 침묵은 그의 차가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목적지 전용 주차장에 내려 진짜 목적지에 도착하자 성후의 눈이 동그래졌다.

“여긴…?”

분명히 목적지는 압구정동이었는데, 보이는 광경은 도심의 중심에 있다고 믿기 힘든 숲길이었다.

“저도 소문으로만 들었어요. 숲이 있는 카페가 있대서.”

“숲…? 가고 싶었다면 말하지 그랬습니까. 어디든 데려갔을 텐데.”

또. 또. 무감한 얼굴로 잘도 달콤한 얘기를……

“여기로도 충분해요.”

다정이 먼저 발을 내디뎠다. 또각또각. 인공적으로 꾸며진 짧은 숲길로 들어서는 그녀의 뒷모습이 오늘도 매우 단아하다.

그 와중에 가느다랗게 드러난 아킬레스건은 몹시 야했다.

“흐음…”

그 순간 섹시한 다리가 멈춰 섰고 몸이 빙글 돌아졌다.

“안 오세요?”

성후는 헛기침으로 불순한 마음을 지우고 다정을 따랐다.

계산한 커피를 들고 이 층으로 올라오자, 책 냄새가 가득 고인 공간이 나타났다. 커피와 뒤섞인 운치 있는 향에, 창에 걸린 나무의 모습들.

확실히. 서울에서 만나기 힘든 근사함이었다.

두 사람은 창가를 마주 보는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조금만 삐끗하면 바로 곁에 있는 서로에게 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가까워도 너무 가깝다. 답답한 것을 유난히 싫어하는 그녀가, 그저 풍경을 보고 싶은 마음에 앉은 자린데, 실수했단 생각이 든다.

“어때요?”

멋대로 데려와 놓고선 다시금 성후의 눈치가 보였다. 아까 선상 레스토랑에서처럼 그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봐서.

“좋습니다.”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병원에, 그리고 이제는 호텔 펜트하우스에 지내는 성후는 오늘에서야 자신이 날개 잃은 새와 같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맞선 보는 다정을 말리기 위해 나섰다가 생각지 못한 위안을 그녀로부터 받는다.

성후는 시선을 돌려 다정의 눈을 똑바로 내려다보고서 강조했다.

“당신이랑 하는 거면 뭐든 좋아요.”

“또, 또. 그런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아무렇지 않지 않습니다.”

“네에?”

“그쪽이랑 놀려고 했는데, 자꾸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분위기가 요상한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을 캐치한 다정이 잠긴 목을 큼하고 푼 뒤 창가로 시선을 던졌다.

날카롭고 야만적인 그의 눈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오늘 안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그의 시선이 닿는지, 옆얼굴이 뜨거워졌지만 애써 쾌활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하에는 풀스방이랑 만화방이 있대요. 가볼래요?”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 것이었다.

“지하?”

“네, 프라이빗하고 아늑한 공간이에요.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다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만화책 따위에 시선을 돌리면, 이 간질간질한 감정도 잠깐은 멈출 것만 같아서였다.

그때, 낮은 공기에서 성후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건 곤란하겠습니다.”

“음. 왜요?”

이번에는 올려다보는 눈이 잔혹할 정도로 깊고 섹시하다.

“프라이빗한 공간에 당신과 단둘이 있을 자신이 없으니까.”

…화르륵.

다정의 얼굴에 진한 불길이 번진다. 단박에 이해했지만, 성후가 굳이 한번 더 설명을 덧붙였다.

“기회가 되면 자제력을 잃을 것 같거든요. …그때처럼.”

다정은 다시 쑥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머그잔을 쥐며 어색한 혼잣말을 했다.

“커피가 남았네요, 이런.”

다소곳이 앉은 채로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는 다정이다.

실크 블라우스에, 에이치 라인 스커트. 코트는 차에 벗어두고 내렸다. 와중에 길게 뻗은 예쁜 다리와 병원에선 보지 못했던 풀어헤친 시 컬 웨이브 머리가 성후의 눈길을 종일 사로잡는다.

자세는 습관인지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꼿꼿했다. 그런 그녀를 쓱 더듬어보고 싶을 정도로, 라인이 예술이다.

그때, 다정이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이마로부터 쓸어 넘겼다. 그 모습은 정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아름다웠다.

…꿀꺽. 마른 침을 볼품없이 삼키자 다정이 시선을 틀었다.

“짜게 드셨나. 목말라요?”

투명한 물음에 성후는 피식 웃음 지었다.

남자를 모르는 건지, 자기가 얼마나 예쁜지를 모르는 건지.

“괜찮습니다.”

“목마르지만 참겠다, 목이 마르지가 않다, 중에 무엇인가요? 저는 정확하게 말해주는 편이 좋아요.”

코랄색 입술이 바쁘게 움직인다. 따지기를 좋아하는 저 입이 말이다. 꿀꺽하고 단숨에 삼키고 싶지만. 성후는 은밀히 이를 꽉 깨물었다 대답한다.

“그냥 뭐든지 다 괜찮습니다.”

분명 대화라는 것을 나누는데 대화가 되지 않는 듯한……. 말보단 마음이 섞이는 미묘한 기분이 드는 다정이다.

그건 꽤나, 위험하게 느껴졌다.

카페를 나와 거리를 걷고, 길거리에서 액세서리도 사고, 근처 서점에 가서 책도 잔뜩 사 왔다. ‘피아니스트 마성후’를 알아본 많은 시선을 등에 매단 채 데이트 아닌 데이트가 이어지는 동안 두 사람은 눈을 맞추고 웃고 친구처럼 떠들었다.

그러는 사이 해가 저물었다.

헤어져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다음을 기약할 빌미도 없는데 아쉬움이 몰아쳤다.

종일 시간을 함께 보내며 조금은 친해진 두 사람이었는데, 차에 오르자 두런두런 오가던 말들이 사라졌다.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고요.”

“안전벨트.”

“아아.”

다정이 안전벨트를 확 잡아당기자 어딘가에 걸린 듯 꽉 잡힌 벨트가 당겨지지 않았다.

“어? 어? 고장인가.”

“그게 아니라… 뒤에 핀이 고정… 잠깐, 실례.”

성후가 다정을 덮칠 듯 커다란 상체를 기울여 팽팽하게 걸려있던 벨트를 부드럽게 풀었다. 그리고 쫙 당겨 다정의 안전벨트를 채워주려는 순간, 스르륵, 탁-!

안전벨트가 다시 말려 올라갔다.

“아, 아니 왜 그러세요……?!”

가뜩이나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데.

제 몸에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미동도 없는 성후로 인해 바짝 긴장되는 다정이었다.

“후… 이 정도면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거 아닙니까.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네에??”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나, 일단 비켜 보… 허어억?!

그 순간, 성후의 길고 섬세한 손이 다정의 가슴으로 다가왔다.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완전히 당황한 다정은 그 손을 거부할 사고조차 하지 못했다.

“…흐읍!”

다가온 집게손가락이 다정의 터진 블라우스를 꼭 다물었다. 언제부터 터졌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온다정 이 팔푼아!

“…이 손 치워주세요.”

제 몸에 전혀 닿지 않는 손가락이었지만, 꼭 온몸이 그의 손아귀에서 노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치우면 훤히 보일 텐데. 괜찮습니까. 그럼 저야 고맙고.”

씩 웃는 성후.

“헉.”

이 남자, 완전 선수다.

까져도 이렇게 발라당 까질 수가 없다!

“그런데……”

그의 야릇한 눈길이 다정의 눈가에 그리고 입술에 머문다. 그 눈빛에 완전히 홀딱 벗겨진 듯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더불어 심장이 쿵쾅쿵쾅 요란한 소리로 울렸다.

그때 숨결이 섞인 말소리가 들렸다.

“…키스해도 되겠습니까.”

이번에는 전과 달리 정중했다. 남자다운 말투이긴 했어도 그 끝이 희미하게나마 떨리는 것으로 보아, 그에게도 어떠한 감정이 일렁이는지 알 것 같았다.

“저기… 그러니까…”

“충동적이라 욕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바로 코앞에까지 다가왔다. 내리깔고 보는 눈이 심하게 섹시하다.

“당신이랑 계속… 키스 하고 싶었거든요.”

* * *

“그게 무슨 말이야, 다정이가 애인이라니? 말도 안 되는! 에휴…… 걘 글쎄 병원에서 사는 애예요~. 아 그럴 리가 없다니까?”

-아니, 다정 엄마가 다정이에 대해 잘 모르는 거 아니야? 아휴! 내가 얼마나 어렵게 만든 자리였는데!

“알지. 자기가 애 많이 썼다는 거….”

-그러니까! 기태 엄마 얼굴 보기가 화끈해 죽겠어.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다정이 남친이란 사람 말이야…

명정의 귀가 바짝 선다.

그래, 시원하게 욕먹어도 좋으니, 딸에게 진짜로 남자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속으로 기도하는 명정이다.

-망가인가 뭐시긴가 그걸 즐겨 보는 놈이라네?

“……응? 그게 뭐야?”

-아이고, 전하려니까 또 남사스럽네. 아 그 왜 뽀로노 같은 거 있잖아!

“뽀, 뽀로노? ……포르노??!”

희미하게 찌푸리고 있던 명정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래! 아무튼, 그거 엄청나게 보다가 다정이한테 차였대! 교양 없게시리……

“분명히 잘못 본 거든, 들은 걸 거야! 우리 다정이가 얼~~마나 참한 앤데! 은명 대학병원 일등 간호사라고! 내가 당장 확인해 볼게! 자기는 어디 가서 입도 뻥긋하지 말고 기다려! 알았지?!”

-알았어! 어서 다정이한테 전화나 해봐!

전화를 끊자마자 명정은 칼같이 다정의 번호를 눌렀다. 컬러링이 이어지는 동안 명정의 심장이 불안으로 뛴다.

받아라, 받아라,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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