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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끔한 것이 좋아-14화 (14/82)
  • 14화. 츤데레의 정석.

    “혀, 현 남친이요?”

    온다정. 흔들리지 마. 이 사람 그냥 너 가지고 노는 거야. 단 한번의 키스에 너무 적극적으로 호응했던 바람에, 재미 들린 거라고!

    “그렇습니다. 현 남친.”

    깊게 자신의 눈을 응시하며 정확한 발음으로 이야기하는 성후 때문에 다정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혼란으로 다시금 말문이 막히는 순간 성후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누가 망가 마니아로 만드는 바람에 전 남친으로 낙인찍혔지만.”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 외에 별다른 저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아. 역할극에서 현 남친.

    다정은 평온과 동시에 섭섭함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직 식전이죠?”

    “…네.”

    기운 없는 목소리에 속으로 조금 놀라는 성후다. 왜지?

    완급조절을 위해 한 발짝 뒤로 물러난 건데. 그녀의 목소리가 왜 더 흐려진 걸까.

    흐음, 설마…

    “배 많이 고픕니까?”

    “네.”

    “으흠. 뭐 드시고 싶으세요?”

    순간 다정이 발칙한 눈빛을 드러내며 성후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끝없는 적의. 그리고 그런 다정의 기분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성후.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자꾸 노려보시는 거죠? 혹시… 맞선 상대가 마음에 드셨습니까?”

    성후의 눈빛도 다소 냉랭해졌다.

    “그럴 리가요.”

    “네. 그럴 리 없어 보였습니다만, 근데 왜 자꾸 절 노려보시냐고요.”

    의도한 게 아니라 할지라도, 당신이 자꾸 날 흔드니까요. 벌써 몇 번째나 날 감싸주고 구해주고. 대체 왜 그러시는 거죠? 늘 말씀하셨잖아요. 절 위해서가 아니라고. 그런데 왜.

    말 대신 입술을 다시 꽉 깨무는 다정이다.

    그것을 본 성후가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의 입술을 검지로 쓸었다.

    “모처럼 예쁜 립스틱 발랐는데, 입술이 다 터지겠습니다.”

    “내버려두세요.”

    “내버려둘 수 없어요. 망가지면… 내 손해 같아서.”

    그렇게 말하며 묘한 웃음을 흘리는 성후다.

    그 순간 다정의 눈빛이 분명하게 반짝이는 구슬처럼 변했다.

    “맛있는 거 사주시려고 물어보신 거예요? 배고프냐고.”

    “사줄 수 있는 거면 뭐든지요.”

    “좋아요, 마침 먹고 싶은 게 있었어요.”

    당신이 내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그래 나도 어디 한번 맞서보겠어. 이건 피해서 될 마음이 아니야!

    “가죠. 거기로.”

    다정의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시원하게 웃는 미소가 매력적이다.

    처음부터 범접할 수 없게 잘생긴 건 알았지만, 더불어 망할 자식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언제부턴가 대책 없이 성후에게 끌렸다. 어차피 떨쳐낼 수 없는 마음이라면 맞서고 결판을 내리라.

    *

    한강 수상 뷔페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성후의 미간 사이에 희미한 주름 팼다.

    “여기 괜찮지 않아요?”

    다정의 물음에, 그가 대답했다.

    “아담하군.”

    “……아담이랑은 많이 거리가 먼 것 같은데.”

    족히 200평은 넘어 보이는 레스토랑 안은 크리스털 샹들리에 조명 아래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환했다.

    레스토랑 안을 훑어보던 다정의 눈은 여전히 그의 말을 수긍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때 직원이 나타나 물었다.

    “두 분이세요?”

    “네.”

    대답하는 다정이 습관적으로 간호사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성후는 피식 웃음 지었다.

    “그럼 자리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은색 한강이 잘 보이는 자리로 안내받았다. 강물은 햇빛을 받아 그 여느 때보다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쌀쌀한 날씨와는 별개로, 퍽 따뜻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날씨 얘기다.

    직원이 떠나자마자 다정이 물어왔다.

    “뭐가 마음에 안 드세요?”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성후에게.

    “다.”

    “다??”

    “눈부신 자리, 오픈된 공간, 돈을 지불하고도 직접 음식을 가지러 가야 하는 수고스러움까지. 골고루 마음에 안 듭니다.”

    그는 사실 뷔페라면 질색하는 남자였다. 행사가 있어 집으로 출장 뷔페를 부르는 날에도 메이드에게 손수 밥상을 차리게 만드는 남자가 바로 마성후인 것이다.

    “하… 안 맞아. 안 맞아.”

    다정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반대로 여러 가지 음식을 한번에 맛볼 수 있는 뷔페를 사랑했고 또 자연풍경을 사랑했다.

    서울 생활을 시작하고 그녀가 가장 힘들었던 건 풀과 물 같은 자연과 멀어진 일이었다. 해서 경제적인 독립을 하고부터는 쉬는 날마다 어디 외곽 펜션에 틀어박혀 숲속 산책길을 거닐고 또 거닐었다. 그것이 그녀만의 휴식 방법이었다.

    그러니 햇볕이 잘 드는 창가 자리에서 맛있는 요리를 즐기며 강을 바라볼 수 있다니. 뿐인가. 외곽까지 안 나가도 즐길 수 있는 가성비 좋은 휴식임에 틀림없었다.

    아쉽게도 그녀에 한해서만 말이다.

    “그럼 앉아 계세요. 무난한 음식으로 퍼다 날라줄 테니까.”

    김빠진 얼굴로 일어선 다정을 보자, 성후가 겹쳐 꼬았던 다리를 풀며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쪽 시킬 마음 없습니다.”

    “네…?”

    “모처럼 쉬는 날에, 다른 사람 수발 따윈 들지 말라고요.”

    “아니 그럼…”

    똥 씹은 얼굴을 하지 마시던가요…? 진짜 웃기는 남자야.

    “뭐 드시겠습니까.”

    “예?”

    되묻는 다정에게 성큼 다가온 성후가 그녀의 어깨를 꾹 잡고 자리에 도로 앉혔다.

    “그동안 저 때문에 고생 꽤나 하지 않았습니까. 오늘은 제가 수발들겠습니다.”

    “아니 그건 제 일이었잖아요.”

    “이건 제가 하고 싶은 일이고요.”

    “어째서요?”

    “당신과 놀고 싶으니까.”

    “놀고… 싶다고요?”

    무슨 의미인지, 역시 들어도 모르겠다. 대놓고 갖고 놀겠단 뜻은 아닐 테고.

    “손가락이 고장 나는 바람에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마침 당신이 제 눈에 들어오더군요. 신선하고, 재미있습니다. 함께 있으면 시름을 잊을 수도 있고요.”

    “아……”

    “저야말로 무난한 음식으로 갖다 드리죠.”

    그리고 등을 보이는 성후. 그의 등에 다정의 시선이 매달린 채 멀어지고 있었다.

    이내 수많은 음식 앞에서 방황하는 성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쭈뼛거리자 주변 사람들이 기꺼이 나서서 그를 도왔다. 누가 봐도 뷔페 접시를 들고 다닐 사람처럼 보이진 않는 모양이었다.

    맞는 기성복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큰 키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는 배열과 비율이 완벽했음에도 불구하고 야성적인 느낌을 아우르고 있었다.

    보통 조각 미남을 떠올리면 틀에 박힌 비슷한 아우라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과 성후는 극명하게 달랐다.

    줄줄 넘치는 부티와 함께 누구도 쉽게 볼 수 없는 야성적인 분위기는, 마치 숲속에 버려진 왕자가 늑대의 품에서 자라난 모습처럼, 아찔한 이질감을 선사했다.

    “그래, 저런 남자가 지나가는데… 안 쳐다보는 게 이상하지.”

    그럼 나도 이 남자에게 사실 한 눈에 반했던 게 아닐까.

    터진 내 스커트를 빤히 쳐다보던 그 날…?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쌩 양아치라고 오해하면서도 그 발칙한 눈빛에 가슴 설레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니까.

    곧이어 성후가 수많은 시선을 이끌고 다정의 앞에 나타났다.

    “취향을 잘 몰라서…”

    살짝 걱정하는 듯 말끝을 흐리며 내미는 접시가 수줍다.

    그가 가져온 접시에는 파스타와 샐러드 그리고 피자 한 조각이 올려져 있었다. 넓은 접시의 여백을 절대로 꽉 채우지도 않은 음식들은 보통의 여자들이 환장하는 메뉴였다.

    하지만 다정은 일명 ‘아재 입맛’을 가진 여자였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서 싱긋 웃으며 포크를 들었다.

    “맛있겠네요.”

    돈을 쓰는 것보다 남을 위해 몸을 쓰는 게 훨씬 어려울 그라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던 것이었다. 그래서 고마웠다. 평범해서 더욱 특별한 호의가.

    차분히 돌이켜보면 저 못된 입만 앙칼졌지, 하는 행동은 대부분이 신사적이었다. 하 이런 건 안 깨달아도 되는데…… 그럼 괜히 저 남자가 더 멋지게 느껴지잖아.

    결심한 듯, 이번엔 다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받기만 할 순 없죠. 저도 마성후 씨를 위해서 서빙 한번 할게요.”

    좀처럼 보기 힘든 예쁜 미소였다. 억지로 지은 미소나 사무적인 간호사 미소도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

    성후는 그것으로 다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됐습니다. 어서 먹기나 하세요.”

    역시 저 입은 곱게 말하는 법이 없다.

    “파스타… 좋아하세요?”

    다정이 움직이려는 찰나, 성후가 몸을 아래로 굽히더니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그의 손끝이 다정의 발목에 닿았다.

    “이렇게 높은 하이힐을 신고서 대체 무슨 서빙을 한다는 말입니까.”

    그의 손길이 살짝 스쳤음에도 경미한 화상을 입은 것처럼 발목이 뜨거워졌다. 동시에, 얼굴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앉아 계세요.”

    어쩐지 이 순간 그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다. 거역하기 위해 입을 여는 것도 일순 버겁게 느껴진다.

    다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자, 포크.”

    구태여 포크까지 쥐여주는 성후가 섬세하다.

    “먹고 있어요. 예쁜 옷도 입었는데 오늘 하루만큼은 고상하게.”

    “빚은 제가 졌는데요. 절 위해서는 아니라고 했지만 벌써 몇 번이나.”

    “틀렸어요.”

    “네?”

    “온다정 씨를 위한 거 맞다고요.”

    “아… 이제 와 그렇게 말씀하시면…”

    속으로 당신 욕을 수천 번 한 제가 뭐가 되나요.

    “아직 부담 가지긴 이른데. 이제 시작이거든요.”

    “…지금 저 유혹하시는 거예요?”

    그러자 성후가 기껍게 웃어 보였다. 구어체론 잘 쓰지 않는 ‘유혹’이라는 단어를 고르는 그녀의 선택 또한 퍽 귀엽게 느껴졌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까 온다정 씨는 온다정 씨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그게 뭐예요. 애매하잖아요.”

    “그러니까 재미있잖아요, 지금 우리. 애매해서.”

    그런 표정으로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설렌단 말이에요. 이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자꾸 빠져든단 말이에요.

    “금방 올게요.”

    그리고 샐러드와 간단한 빵을 가지고 나타난 성후다. 이어서 부지런히 커피도, 아이스크림도, 과일도 가지고 나타났다. 첫 끼는 과한 음식이 부담스럽다고 말하면서.

    그런 그의 앞에서 다정은 벌써 세 그릇째 과한 음식을 먹는 중이다. 그마저도 깨끗이 비운 뒤, 이번엔 육회와 초밥을 골고루 접시에 담았다. 언젠가부터 그녀의 입맛을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던 성후는 다정의 뒤를 따라다니며 접시를 들어주는 시중만 들었다.

    높은 힐을 신고 있는데 넘어지기라도 하면…… 뿐인가. 오늘따라 유난히 아찔한 스커트를 입고 있는 다정의 움직임에 여러모로 신경이 쓰였다.

    “잘 먹었습니다.”

    계산을 마친 성후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이 진심으로 와 닿는군요.”

    “네, 먹는 거 많이 좋아해요.”

    당당하게 말하는 그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성후는 입을 꾹 다물고 새어 나오려던 미소를 참았다.

    다정의 앞에만 서면, 웃음이 헤퍼지는 스스로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것도 타인으로 인해 이렇게 웃음 지을 수 있다는 것이 몹시 신기했다.

    또, 기분 좋았다.

    어떤 빌미로 그녀를 잡아 둘까 궁리하던 와중에, 배가 불러 기분이 좋아졌는지 맑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커피는 제가 살게요.”

    고작 밥 한 끼에, 염치까지 갖췄다니.

    “그럽시다.”

    그런 점이 자신과 비슷했다. 남이 사는 건 그 무엇이든 싫은 게 성후였는데, 그건 조금도 빚지는 것을 싫어해서였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가능하다면 마음껏 빚져서 수억 배로 돌려주고 싶다. 그게 돈이든, 시간이든, 마음이든.

    그녀와 함께할 구실이 된다면 뭐라도 좋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차에 오른 성후가 물었다. 다정은 보조석에 앉아 대꾸했다.

    “이번엔 진짜로 제가 가보고 곳으로 가도 돼요?”

    “물론이죠.”

    “또 정색하고 앉아 있으면……”

    “커피는 대부분 셀프 픽업이라는 거 압니다.”

    “취향이 확실하시군요. 몸 쓰는 거 싫어한다는 거.”

    “그거야 상황에 따라 다르죠.”

    그의 말 한마디에 야릇한 분위기가 조성되고야 말았다.

    조금 더 어렸다면 순수하게 듣고 흘릴 말인데. 서른의 나이로 순수한 건 범죄라 자위해 보는 다정이다. 나아가, 내뱉는 성후의 목소리가 쓸데없이 관능적이었다고 그래서 상상이 조금 멀리까지 나간 거라고.

    나름의 논리로 정신을 차리려는 다정에게 성후가 보기 좋게 한 방을 먹였다.

    “어떤 곳에선 몸 쓰는 걸 좋아하는 편이거든요. 아니, 꽤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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