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13화 (13/82)

13화. 망가 마니아.

또각또각.

오랜만에 신은 킬힐에 온 정신을 집중하던 다정. 그때 그녀의 핸드백 속에서 벨이 울렸다.

음? 오호! 기봉이!

반가운 전화에 굳어 있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울 다정이 뭐 하노.

“억… 어떻게 알고 전화했대?”

-와~ 전화할 때마다 낯서네. 니 완전 서울 사람 다 돼뿟네.

다정의 유려한 표준어 구사에 기봉이 감탄에 마지않았다.

“나만 그런 줄 알아? 승주도 우석이도 완전 서울 사람 다 됐어!”

-허허허허, 짜쓱들, 양끗 간지난다야. 언제- 밀양 함 안 내려오나?

“가야지, 한번. 넌 잘 지내지?”

-그라모. 잘 지내고말고. 그런데 아까 그기 무슨 소리고? 뭘 알고 전화해?

기봉의 물음에 다정이 쿡쿡 웃다가 되묻는다.

“나 지금 어디 가는 줄 아니~?”

-와? 좋은 데라도 가나.

“누나 시집갈지도 모른다.”

-시집? 와 씨, 니 남친 생겼나?

곰돌이 푸처럼 생겨서 작은 눈을 동그랗게 뜰 기봉의 모습이 상상되어 다정은 계속해서 웃음이 나왔다.

다정의 절친 중 한 명인 기봉은 유일하게 고향 밀양에 남아 농사를 짓고 있다.

단순하고 푸근한 데다 밝은 것이 그의 특징이었는데, 여전히 순박함을 유지하고 있는 기봉과 얘기를 나눌 때면 다정은 고달픈 현생을 잊고 위로를 받았었다.

“선봐.”

오늘도 그렇다.

기봉의 유쾌한 목소리는 늘 다정을 웃게 했다.

-눈지 몰라도 복 받았다, 밀양 얼짱 다정이를 데꼬가고.

“고렇취.”

다정은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뜬금없는 기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진이 서울 간데이.

“여진이가??”

-가씨내…… 어릴 때부터 연예인 델 끄라고 설치 삿트만. 결국 간다 카드라.

“기봉이 네가 걱정이 많겠네……”

-말도 마라. 서울이 어디라꼬. 지가. 참 내.

“내가 간간이 챙길게. 너무 걱정 마.”

-그래 주면 고맙지.

“여진이 때문에 전화했구나? 걱정돼서?”

-으데. 니 목소리도 들을 겸! ……오늘 선 잘 봐라. 글러묵은 넘이다 싶으믄 바로 마 때려치우고. 알긋제.

“당연하지!”

-오야. 언제 한번 우석이, 승주이랑 소주 한 잔 때리자!

“쿡쿡. 인제 그만 좀 때리자, 우리. 들어가-!”

-그래~~!

골목을 걸어 나와 가장 먼저 보이는 택시를 잡아탔다.

“기사님 <킹호텔>로 가주세요.”

택시 밖 풍경들이 빠르게 변했다.

가는 동안 어쩌면 인연이라는 것이 별것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의 말처럼 좋은 사람 만나 슬프고 기쁠 때 함께 하는 평범한 행복을 만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자꾸 마성후가 떠오르는 걸까.

그와 나눈 거라곤 으르렁대며 서로를 쏘아보던 시간과 공포 속에 나눈 키스 한번이 전부인데.

그를 떠올리자, 다시금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얼마 후 <킹호텔> 본관 라운지로 들어서자 동서양의 조화가 아름다운 오묘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매일 환자와 실랑이를 벌이는 일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의 공간이었다. 정중앙 분수를 중심으로 검정에 가까운 고동색 테이블과 깔끔한 디자인의 가죽 소파들이 우아해 보이는 특권 계층의 엉덩이를 받쳐주고 있었다.

다정이 걸어 들어가자, 무난한 외모의 한 남자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다가가 의자를 빼며 인사를 건넸다. 얼굴에 밴 간호사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네, 안녕하세요.”

직업병이 따로 없다. 남자는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도로가 많이 막혔죠?”

“택시를 오랜만에 타서 이렇게 막히는 줄 몰랐네요. 알았다면 미리 나왔을 텐데.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저도 방금 왔는걸요. 제 이름은 안기태입니다.”

“온다정이에요.”

“주문 먼저 할까요?”

똑같은 커피를 앞에 두고서 다시금 대화를 이어갔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말씀이요…?”

다정은 남자에 대해 들은 것이 없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 제 소개 먼저 하겠습니다. 저는 회계사이고 저희 부모님은 강남에서 영어 유치원을 운영하고 계십니다. 형은 스카이 대학 교수고요. 하하. 말씀드리고 나니까 제가 제일 못났군요.”

“아… 네.”

가족이 어떤 직군에 속해있냐는 것보다 그냥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가 궁금했었는데. 세속적인 기준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남자를 보자, 애초에 느끼지도 못했던 매력이 확실하게 반감되었다.

“다정 씨 소개는 안 해주십니까?”

“저는 대학병원 간호사예요.”

“그거 말고는요?”

순진하게 굴지 말라고 남자의 묘한 미소가 말했다.

“서른 살이고요.”

“다른 건.”

남자의 얼굴이 점점 흐려진다.

“무남독녀입니다. 어려서는 할머니 손에 자랐네요.”

“…….”

그런 걸 묻는 게 아니란 걸 알지만, 다정의 속에서 몹쓸 오기가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깍듯한 자세를 풀고 의자에 느슨하게 기대었다. 그리고 오른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서 말했다.

한마디로 급작스레 거만해졌다.

“저는 배우자감으로 원하는 여성상이 있습니다.”

꼭 유능한 로비스트 같은 얼굴이었다. 목소리도 우위를 선점한 자 특유의 분위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세요.”

적당히 시간만 때우다 돌아가기로 다정의 속에서 결정이 내려졌다.

“…사실 다정 씨 직업에 대해서도 듣고, 집안도 평범하단 얘길 들었지만, 굳이 이 자리에 나왔던 건…, 정말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 평범함이 좋았습니다.”

다정이 이해를 못 하고 미간을 밉지 않게 찌푸리자 그가 씩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결혼하면 하던 일을 관두고 내조를 해줄 여성을 원합니다.”

“아하하, 좋죠, 내조…”

누가 당신 내조를 해줄진 모르겠지만 일단 난 아닌 걸로.

“그러므로 저보다 조금 처져도 평범한 여성분이 좋습니다. 거기다가, 다정 씨 정도면 꽤 미인이잖아요.”

지금 이 순간 마치 후궁을 선택하는 왕의 영혼이 그에게 깃든 것 같았다. 다정 씨 ‘정도’면 ‘꽤’ 미인이라. 엄마. 내가 저런 놈한테 진짜 시집가기를 원해?? 응??

전송될 리 없는 시그널을 엄마에게 마구마구 보내는 다정이다.

“그리고 말인데요…”

거기에다 말까지 많다니. 절레절레. 절대로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다.

“저 사실…… 간호사가 이상형이거든요. 아름답잖아요, 백의.”

그렇게 말하며 맞선 상대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뭐랄까. 절대 욕이 아닌데, 꼭 욕을 먹는 듯한 꺼림칙한 기분은.

다정은 끓어오르는 뜨거운 무언가를 꿀꺽 삼켰다.

어서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

흐르는 일 분, 일 초가 아깝게 느껴졌다.

* * *

‘오늘이래요, 맞선.’

조금 전 들었던 연석의 목소리가 되살아난다.

성후는 거칠게 슈트 재킷에 팔을 꿰뚫어 넣은 뒤 다그쳤다.

‘그래서 어디래?!’

‘이 호텔 본관 라운지라는데요?’

‘몇 시?!’

‘……아. 5분쯤 지난 것 같군요. 저도 방금 들은 거라.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말하는 목소리에 아무런 죄책감이 어려 있지 않았다. 성후는 짜증이 솟구쳤지만, 그것을 일일이 캐물을 여유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빠르게 유리 승강기에 몸을 싣고 라운지로 내려와 흐트러진 호흡을 정리하는 성후. 다음으론 눈으로 주변을 더듬었다.

온다정, 그 여자를 찾기 위해서.

* * *

엄마의 체면을 생각해 다정이 방긋 웃었다.

강성 환자를 대할 때도 이렇게 어렵지가 않은데.

웃는 것처럼 보이길 바라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더니 광대 근육이 희미하게 떨려왔다.

“그런데 다정 씨는…… 보면 볼수록 질리지 않는 미인인 것 같으세요. 성형은… 안 하셨죠?”

“하하하. 네, 뭐.”

“어휴, 다행이다. 저 예전에 어떤 사진 봤는데요. 엄마가 수준급 미인인데 애들이 정말 끔찍할 정도로 못생겼더라고요? 그거 보고 간이 철렁했어요. 절대로 성형한 여자는 만나지 말아야겠다, 싶었다니까요. 아. 오해하지 마세요. 그렇게 꽉 막힌 남자는 아닙니다. 가령, 요즘 쌍꺼풀 정도는 수술이 아닌 시술이라는 거, 그 정도는 아니까요.”

남자는 점점 더 자신감 있는 말투로 말했다.

동화 속에 서 있는 것처럼 홀로 꿈꾸는 듯한 표정에 다정은 여전히 억지웃음을 짓고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시간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구나, 어서 집에… 아, 배고파. 그런데 저 남자랑 먹긴 싫어. 아아, 엄마……. 이번 생에 결혼을 틀렸나 봐…….

그때,

“다정아.”

긁혀서 나오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날아들었다.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분명히 자신이 아는 목소리였다. 아니, 기억이 틀릴 리 없다. 한동안 내내 곱씹었던 목소리였으니까.

다정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성후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눈이 환영을 본 것처럼 동그랗게 커졌다.

“내가 잘못했다고 했잖아.”

다정은 이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시선을 내리깔고 눈동자를 열심히 굴려보았다.

“조금 다퉜다고 헤어지자니……. 홧김에 선까지……. 이건 아니잖아, 정말.”

그렇구나! 나 지금 당신의 연인이군요! 전 여친인가요? 그런 건가요?

상황 파악을 끝낸 다정이 아련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기태라던 맞선 상대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다정의 시선은 성후에게로 향했다.

“…가세요. 전 망가 보는 남자는 싫다고 했잖아요……. 야동이라면 모를까……. 사람도 아닌 것들을 보고 즐기시다니…….”

떨리며 나오는 다정의 목소리에 성후의 이마에서 정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아니, 이 여자가? 하필… 망가? 마앙가아?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애써 미안한 얼굴로 만들었다.

“내가 미안하다고 그랬잖아……. 이제 망… 가… 안 볼게. 정말이야.”

살며 이런 굴욕적인 대사를 치는 날이 오다니. 이 발칙한 여자 같으니라고.

“정말이에요? 이제 진짜 안 보시는 거죠?! 저 정말, 싫었거든요. 모자이크도 되지 않은 그 야한 애니들. 어찌나 적나라하던지. 당신 컴퓨터에서 발견한 순간…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네요.”

격한 뉘앙스를 머금은 다정의 큰 목소리 때문에 라운지에 있던 사람들 시선이 일제히 성후에게 꽂혔다.

관람객들은 술렁이거나, 킥킥거리거나 둘 중 하나였다.

성후는 낮은 숨을 길게 내뱉고서 작게 말했다.

“내 약속하지…”

“뭐라고요? 잘 안 들려요, 성후 씨. 날 사랑한다면…”

설마…. 야. 거기까진 가지 마라? 어이?

다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넓게 팔을 벌리며 말을 이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약속해줘요! 다시는 망가를 보지 않겠다고요! 이제는 노모건 유모건 모두 끊겠다고요! 오직 저만 보겠다고… 그렇게 약속해줘요!”

“……약속한다고 했잖아.”

그는 신음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전히 작은 목소리에 다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 부끄러우시겠죠. 이 많은 사람 앞에서 그런 약속 하는 거. 하지만 이건 기억하세요. 당신이 지금 이 순간 선택한 건…… 내가 아니라 체면이었다는 것을!”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리는 다정.

당황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맞선 상대가 깜짝 놀라 다정을 불렀다.

“다정 씨…!”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성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우왓, 뭐가 이렇게 커?!

그때 다정이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고서 말했다.

“……죄송해요. 아직 전 남친 정리도 제대로 못 하고 나와서 말이에요.”

“아닙니다. 어차피…”

남자는 흘긋 성후의 눈치를 본 뒤 말을 이었다.

“전 남친 아닙니까. 이제부터 저와 만남을……”

“아니요. 면목 없어요. 기태 씨는 저보다 훨씬 훌륭한 여성분 만나세요. 꼭, 현모양처 상으로….”

그리고 달려나가는 다정.

몇 십 분째 간곡히 바라고 또 바랐던 해방을 맞이하는 순간.

킬힐도 감히 그녀의 달리기를 멈추지 못했다.

“다정 씨이이! 저기요오?!”

라운지 안에서 울려 퍼지는 기태의 목소리도 결국은 다 과거가 되었다.

<킹호텔>을 나와 재빨리 걸음을 옮기는데, 속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했다.

재수 없는 맞선 상대와도 안녕하고 허락도 없이 며칠간 제 머릿속을 지배했던 마성후에게도 빅 엿을 먹여 아주, 아주, 아주, 통쾌했다.

“…후후후.”

짜릿한 기분에 저도 모르게 음흉한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을 때,

“배우 하셔도 되겠습니다.”

언제 쫓아왔는지 뒤에서 ‘전 남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웃음기 역시 한순간에 말라붙었다.

성큼성큼.

그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세상의 공기가 모조리 그를 지지하는 듯, 다정을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꼭 붙들었다. 드디어 그가 제 앞을 가로막았다. 햇볕을 등진 커다란 그림자가 되어.

고개를 올리니, 역광으로 인해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가까워 목소리는 뚜렷하게 들렸다.

“……누가 마음대로 망가 마니아 전 남친으로 둔갑시켜도 된다고 했습니까.”

다정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음, 저…”

단조로운 목소리에, 표정까지 잘 보이지 않아 그가 지금 어떤 기분으로 물어오는 건지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우연히 저를 발견한 성후가 아무래도 곤란한 상황처럼 보여 나서준 것 같은데, 그런 그를 만인의 앞에서 변태로 만들어버렸으니.

그뿐인가.

속으로 통쾌해하기까지.

며칠간 날 휘두른 벌을 받아라!, 라며 홀로 찌질한 복수를 한 것이었다.

성후가 이대로 다그친다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인 건 명명백백한 사실이다.

“그러니까, 저…….”

제 입에서 꺼낼 수 있는 괜찮은 변명거릴 찾던 중, 그가 완전히 바짝 다가왔다. 그러자 연핑크 블라우스 속 다정의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왜인지 꼼짝없이 얼어붙었다. 그것을 눈치챈 건지 성후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다정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현 남친이 되려고 했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