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마성후로소이다
경기도 외곽.
오랫동안 비워뒀던 한국의 집은 바로 어제까지 사람이 살았던 것처럼 깨끗했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문제는 그다음.
“흐읍……”
성후가 심호흡을 크게 했다.
자신이 서 있는 현관 바로 앞 단상에 크리스털 피아노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 피아노는 열다섯 되던 해에 그의 재능을 인정해준 부친이 선물해준 것이었다.
그날의 축하와 기쁨이 환영처럼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다음으로 그의 시선이 기민하게 한 방문으로 향했다. 무수한 방 중에, 뒤뜰과 가장 맞닿아 있는 피아노실 문이었다. 그곳은 어린 성후가 한국에 들어올 때면 가장 시간을 많이 보냈던 그만의 놀이터였다.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그 안에는 새카맣게 윤이 나는 그랜드 피아노, 가장 대중적이라 호기심에 들였던 업라이트 피아노, 여러 가지 소리를 섞어 내는 신시사이저 피아노뿐만 아니라 한정판으로 제작된 골드 피아노와 대리석 피아노 등 보석 같은 친구들이 자신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형님. 괜찮으십니까.”
“…안 되겠어.”
속이 메스꺼워졌다.
발을 붙이고 있는 대리석 바닥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것만 같다.
눈앞이 핑글 돌고 식은땀이 쭉 난다.
“연석아……”
“나가시죠.”
연석은 현관문을 시원하게 열어젖히고는 성후를 부축했다. 몸에 닿는 단단한 남성의 근육이 싫었지만, 취향과 배려는 별개다. 그들은 성 같은 저택을 등지고 서울의 <킹호텔> 펜트하우스로 입성했다.
“좀 괜찮으십니까? 오늘 같이 있을까요?”
침대에 누워 팔로 눈을 가렸는데, 불현듯 연석의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분이 점점 나아지고 있었는데 꼭 붙어 있으리라 예고하는 연석의 말에 성후의 미간이 노골적으로 좁아졌다.
그는 팔을 내리고 연석을 올려다보았다.
“……이 방에?”
“뭐 어떻습니까. 남는 방도 많은데.”
성후는 한 치도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있으니까, 방 하나 따로 잡아줄게.”
“그럼 같은 펜트하우스로……?”
그 순간 성후가 침대에서 확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날카로운 눈으로 연석을 쏘아본다.
“보자 보자 하니까…”
“보자 보자 하면서 계속 보십시오.”
연석이 뻔뻔하게 눈을 지그시 감는다. 자세히 보라는 제스처다. 성후의 미간이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그건 짜증이 치밀어서 안 되겠어.”
“그래도 보십시오.”
“지금 내가 너랑 연애하……”
“속이 상하는 것보단 짜증이 나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몇 초의 시간이 흐르고 성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연석아.”
“네, 형님!”
칭찬받을 준비는 다 되어 있다.
“나가.”
쳇. 가차 없으시긴.
“참,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드릴 말씀’.
성후가 가장 무서워하는 단어다.
연석의 입에서 나온 ‘드릴 말씀’ 중에서는 그리 호쾌한 종류의 것은 여태 없었기 때문이었다.
“뭐, 뭔데.”
이런.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어버리고야 말았다.
“온다정 간호사 말입니다.”
그녀의 이야기라면…… 무엇이라도 듣고 싶다.
그의 몸이 마음을 대변해 연석 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그러자 연석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선본다고 하던데요.”
그 말과 동시에 성후가 비웃음을 터트렸다.
“선…?”
하! 그렇게나 결혼을 하고 싶으시다?
“이번 소식은 마음에 드셨습니까.”
“마음에 들진 않지만……”
꼭 알고는 있어야 할 이야기지. 나의 도피처가 다른 남자에게로 훌쩍 떠나버리면 그것만큼 곤란한 건 없을 테니까 말이야.
성후는 초조한 눈으로 연석을 힐끔 바라본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성큼성큼 통창으로 다가가 커튼을 확 걷었다. 회색의 처연한 서울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궁금한 거 있으시면 말씀하십쇼.”
“그런 거 없어.”
그는 반사적으로 단칼에 잘랐다.
“그럼 그 다리를 떨지 마시던가요.”
…아차.
동공만 빠르게 내리자 풍이 든 것처럼 다리를 떨고 있는 자신의 하체가 눈에 들어왔다. 미쳤군.
“그럼 한 가지만 묻지.”
성후는 빠르게 태세전환을 하고서 연석을 쳐다보았다. 그 눈이 꽤나 진지했다. 연석도 진지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디라던가. …거기가.”
“맞선 장소 말이죠?”
유능한 눈빛을 뽐내며 연석이 되물었다. 성후가 긴장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비서가 씩 웃었다.
어서 말해…!
연석이 뜸을 들이자, 아니, 뜸을 들이는 것처럼 시간이 느리게 흐르자 성후는 퍽 초조해졌다.
“몰라요?”
그런데 대답하는 연석의 말투가 깃털처럼 가벼웠다.
“음?”
때때로 그럴 때가 있다. 가슴 속에 분노가 꼭 화산이 되어,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 그리고 그것이 곧 폭발할 것 같을 때.
“……너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걸 지껄이고 다녀……?”
그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은 채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착각인지 몰라도 소리에 새카만 연기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악마가 사람 화 된다면 필시 마성후일 것이다. 그의 독기 어린 눈빛이 연석의 얼굴에 완전히 와 닿았을 때 연석 특유의 깐족 표 위로는 한낱 미망이 되어버렸다.
“자, 자세히 알 필요는 없잖아요? 온다정 선생님 뒤를 캐는 건, 엄연히 사생활 침해…”
성후의 눈이 야수처럼 번뜩인다.
아차, 말대꾸에 목숨을 걸어버렸군.
연석은 암담한 미래를 예상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 * *
“온 선생님이…”
의국의 문을 여는 순간, 조금은 독특한 성이 흘러나오자 태풍의 귀가 쫑긋 섰다. 태풍은 자연스레 비는 의자에 앉아 전공의와 전문의의 수다 멤버로 둔갑했다.
“깡촌 출신이라던데?”
이번 구설은 시시해 태풍이 은근히 입꼬리를 내렸다.
“시골 출신인 게 왜?”
“아니~~ 생긴 걸 봐. 자세나 표정 말투 전부 누가 봐도 세련된, 배운, 사는 집! 도시 여자 같잖아.”
“글쎄다. 그리고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것 같지도 않고.”
늘 중의적인 말투를 사용하는 현준의 말에, 태풍이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하다기보다 유추는 할 수 있지. 그녀의 배경이 별 볼 일 없다는 것. 나는 그 차가운 눈빛과 꺾이지 않는 기세가…… 정말, 재벌 집 따님이라도 되는 줄 알았단 말이야.”
“프로패셔널하셔서 그렇지. 딱히 나쁜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슨 소리야? 환자들한텐 얼마나 친절하다고.”
“그러니까 프로패셔널하다는 거잖아.”
“프로는 무슨… 의사를 무시하는 거지.”
“야, 넌 벌써부터 꼰대 짓 하냐.”
현준이 인상을 찌푸리자 말을 옮기던 레지던트가 대꾸했다.
“아무리 예쁘고 똑똑해도 난 그 여자 재수 없어. 그리고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던걸? 맨날 나대니까 위에서도 싫어하는 눈치야. 간호사들 사이에서도 은따 같고.”
“쯧쯧쯧 배운 사람들이 어째 더 유치하네. 난 그만 가련다. 으이차.”
자리에서 일어난 현준을 따라 태풍도 일어섰다.
“나도.”
의국을 등지고 나와 태풍이 물었다.
“온 쌤이랑 친해?”
두 사람은 같은 대학 동기이자 입사 동기였다.
“아니? …그냥. 딱하잖아. 이 병원 들어오고 온 선생님 얘기 진짜 많이 들었거든. 온 선생님이 생수가 아닌 보리차를 먹어도 이슈가 될 거야.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 시선에 구속돼서 살고 있는 걸까. 진심 딱해.”
“흐응…….”
태풍에게 있어 간호사는 함께 일하는 사람 혹은 쉽게 자신을 허락하는 고마운 여자로만 그쳤다.
그러니 묵묵하게 일만 하던 다정에겐 관심을 두었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최근 태풍이 마음이 이상한 형상을 띄고 다정에게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모습은 호기심에서 요즘은 오기로 굳어졌다.
현생이 빡센 여자군. 멀쩡한 척해도 멘탈 많이 나갔겠어. 이럴 때 위로가 되어준다면……
망상에 빠진 태풍이 흐흐 하고 웃자 현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가 웃을 타이밍이었지?”
질색하는 얼굴로.
“아니, 아니야. 먼저 가봐. 난 환자 처방 전해줄 게 있는 걸 깜빡했지 뭐야.”
태풍은 바쁘게 걸음을 재촉했다.
승강기에서 내리자마자 간호사 스테이션이 보였고 이제는 눈에 익은 완벽한 뒤태도 보였다.
“시집?”
그런데 다정의 목소리가 매우 날카롭다.
“응. 시집. 너 되게 고고한 척하더니, 맞선 본다며. 그게 그거 아니야? 나한텐 어디 가서 그런 얘길 말라는 둥 선생질해 놓고선.”
“그래. 언젠가 가야겠지. 그 시집이라는 것. 그런데 너처럼 시집‘만’ 잘 가려고 간호사 된 건 아니다, 난? 부자 환자 꼬실 마음도 없고. 누구처럼.”
‘부자 환자’라는 말에 곧바로 성후가 떠오르는 태풍이다. 아무래도 두 간호사가 싸우는 모양인데 재미가 쏠쏠하다.
“또 봐 또 봐, 저 혼자 고상하지. 맞선도 결국 같은 거잖아. 조건 맞춰 딱.”
이어 서늘하게 웃는 다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으로 그 웃음만큼이나 차가운 살을 날리는 그녀다.
“너랑 나는 다르지. 나는 공정 거래를 하려는 거고. 너는…… 불공정 거래잖아? 언감생심 VVIP 환자들이랑 엮이려고 해? 이러다 머리 벗겨진 할아버지가 청혼해도 받아주겠다, 너.”
그러자 부연이 붉어진 얼굴로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오호… 꿀잼!
“청첩장 나오면 얘기해. 늙은 신랑 구경하러 가게.”
훔쳐 듣던 태풍도 속이 시원했다. 남자가 듣기에도, 부연의 하이톤의 목소리는 심히 거슬렸다.
태풍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간호사 스테이션에 바짝 다가갔다.
때마침 병동 방향으로 발길을 돌리는 다정. 열이 올라 손부채질 중인 부연에게 상큼한 인사를 날린 태풍은 빠르게 다정을 쫓았다.
“온 선생님?”
“네. 말씀하세요.”
“힘드시겠어요.”
무엇이 힘들다는 얘기인진 모르겠지만 지금 정신 상태로는 사적인 얘기는 용량 초과다.
“괜찮습니다.”
“언제 쉬세요?”
“모르겠습니다.”
“이달 근무표 나왔을 거 아니에요.”
“봤는데 까먹었어요.”
“아니, 휴식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런 걸 까먹는단 말씀이세요?”
너무도 꼿꼿한 다정의 철벽에 태풍이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다정이 시선을 들어 태풍을 쳐다보았다.
아무 대답 없이 자신의 속마음을 읽는 듯한 다정의 묘한 눈빛에 태풍이 일순 얼어붙는다. 그러다 침묵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세요?”
“원래 간호사들한테 이렇게 말 많이 거세요?”
“음, 좀 외향적인 편이긴 하죠. 그래서 친구도 많구요.”
자랑 아닌 자랑을 하며 코를 쓱 훔치는 태풍이다.
하지만,
“저는 일터에서 친구 사귀는 걸 몹시 꺼려하는 성격이라…”
돌아오는 철벽은 더욱 공고하다.
“죄송하지만 불필요한 대화는 사양하겠습니다. 그럼.”
깍듯이 묵례하고 등을 보이는 다정.
태풍은 그런 다정을 보며 볼 안을 훑었다.
이것 봐라…?
“엇! 계 선생님?”
얼굴이 붉어진 신경외과 신규 간호사가 태풍에게 아는 체를 했다. 동글동글하고 앳된 얼굴. 그 나이 때만 가질 수 있는 분위기를 머금고 있는 여자는 때때로 태풍의 먹이가 되곤 했다.
“어, 정형외과 병동까진… 아. 협진 있구나?”
“넵.”
씩씩하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귀엽다.
“병원 생활 어렵진 않아요?”
본능적으로 친절을 베푸는 태풍의 속에서 시커먼 짐승이 꿈틀거렸다.
* * *
“……어딘지 알아봐.”
늘 깔끔한 모습을 자랑하던 연석이 어쩐지 많이 흐트러진 모습으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와 겨우겨우 대답했다.
“반드시… 목숨을 걸어서라도…… 온다정 씨의 맞선 장소를 알아내겠습니다……”
“그 조건 마음에 드는군.”
“네? 무엇이 말입니까…?”
“‘목숨을 걸어서’. 반드시 그리 해야 할 거야. 만약 어길 시……”
…꿀꺽.
성후는 말 대신 세운 엄지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실존하는 사신의 모습에 연석이 수어 번이나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