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엄마의 죄책감
말문이 턱 막혔다. 이럴 때는 없는 말을 못 하는 자신의 성격이 미워지는 다정이었다.
그렇다!
비단 입술과 혀뿐이겠는가.
그 장면을 곱씹다 못해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다는 확신에 찬 순간부턴 마음껏 상상하기까지 이르렀다.
망상은 그날부터 오늘 아침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에게 취한 건지, 그의 입술에 취한 건지 모호했던 마음이 점점 분명한 색을 띠고 수면 위로 떠오르자,
“그게…”
입술을 열어도 소리가 되어 나오는 말은 없다. 다시 입술을 꽉 깨무는 순간, 큭 하는 기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붉어진 얼굴을 천천히 올리니 시선만으로도 자신을 홀딱 벗겨보는 눈빛의 성후가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얼굴 새빨개진 거 보니, 그쪽도 내 생각했었나 보군.”
수컷 냄새를 진하게도 풍겼다. 다정은 은밀히 스커트 옷깃을 꽉 쥐며 대답했다.
“…넘겨짚지 마세요.”
그런데 허락도 없이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손으로 목을 감싸며 잠긴 목을 큼하고 풀었다. 그 모습이 몹시 귀여워 성후는 은밀히 어금니를 꽉 씹었다.
“…이제 됐습니다.”
제 속에 저장되어있던 냉정한 목소리를 겨우 꺼내 들었다.
그러자 발끈한 다정이 말했다.
“되긴 뭐가 돼요?”
냉정을 잃고 흐트러진 모습이 성후를 미치게 자극했다. 평소와 달리 감정을 드러내느라 뒤집힌 목소리마저 심장을 견딜 수 없게 간지럽도록 만들었다.
음악으로 치면 지금 이 순간은 도입부다. 급하게 갈 것 없다. 어차피 그녀에게로 도망치기로 한 이상, 피아노에 들이던 공을 이 여자에게 들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즐길 것이다. 피아노처럼 섬세하고도 야릇하게.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은 더더욱 고난도의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는 말을 아끼고 손짓했다. 나가보라는 뜻에서.
“마성후 씨!”
다정의 혈압이 터질까 걱정된 성후가 목젖 밑으로 끓는 웃음을 가까스로 누르고서 입을 열었다.
“대답 잘 들었으니 이만 나가보셔도 좋습니다.”
이번엔 손이 아닌 입술을 움직여 강조했다.
“대답이라니요?”
저도 모르게 심하게 차여 미련을 떠는 여자처럼 지긋지긋하게 굴어버렸다. 마음이 생각이란 필터를 거치기 전에 불쑥, 소리로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온 선생 그 못된 혓바닥보다 정직한 얼굴이 대답이 되었다고요.”
더 질척대지 말자. 잠깐의 몹쓸 추억이고, 스치는 바람일 뿐이다. 어차피 퇴원하고 나면 볼 일이 거의 없을 테니까.
다정은 다시 냉랭한 간호사의 가면을 쓰고 허리를 숙였다.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몸을 돌렸다. 그런데 등 뒤에서 특유의 오만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멈칫.
젠장, 또 멈춰서 버렸다.
의지는 가까스로 동요하는 마음을 숨기려 애쓰나, 비밀이 없는 몸뚱이가 저 알아 팍팍 티를 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이미 멈춰버린 이상, 그의 얘기를 원하는 다정의 귀가 저절로 쫑긋 섰다.
“또 봅시다.”
다정은 헉하고 숨을 들이켜 마셨다.
이내,
“빠른 쾌유를 바랍니다.”
최대한 사무적인 톤으로 대꾸한 다음, 너무 야릇해 숨 막히는 1004호실을 드디어 탈출했다. 문이 닫히자마자 겨우 버티고 있던 몸을 벽에 기대었다. 등 너머의 벽. 벽 너머의 마성후. 그가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처럼 벽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외쳤다.
또 보자고요? 아니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마성후 환자님!
* * *
2동 정형외과 건물로 돌아오는 내내, 속이 시원해졌으면 바랐지만, 답답해져 오는 다정이다. 딱 체한 것 같은 증상.
서른의 나이란, 몸소 뛰어들지 않아도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나이였다. 상대와 나 사이에 얼마나 괜찮은 거래가 이뤄질지 역시 끝까지 가보지 않아도 알았다.
그렇게 계산했을 때, 마성후는 그리 좋은 남자는 아니다. 그와 멀리 가본들 잠자리 상대 그 이상은 절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비참하거나 화가 나진 않는다.
세상의 기준으로 두고 보자면 그와 자신은 그만큼의 격차가 있었음이 분명하니까.
다행인 건, 그녀는 영리했고 자신을 사랑했다. 그래서 위험한 남자에게 시간을 허비하는 감정 소모 외에 얻는 것이 없으리란 걸, 잘 알았다.
좋다, 이거야. 그렇다면 내 당신을 떨쳐낼 수 있을 때까지 머릿속에서나마 실컷 뜯고 맛보고 즐겨주지! 그리고 그다음엔 내 머릿속에서, 내 인생에서 영영 사라지는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걷는 다정의 걸음이 평소보다 더욱 씩씩하다. 간호사 스테이션 가까이에 다다랐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다정의 귀를 사로잡았다.
“우리 다정이는 선이라도 봐야 하는데…… 오호호. 그래서 이 간호사님은 남친은 있고?”
“아…… 넵.”
“어맛? 막내의 반란이네? 어떤 사람이에요? 아. 이상하게 여기지는 말아요. 이렇게 예쁜 아가씰 어떤 총각이 채갔나 궁금해서 묻는 거니까.”
늘 전화로 듣던 발랄한 목소리에 다정은 한증막에 갇힌 것만 같았다. 뜨거운 한숨을 내쉰다.
“저희 오빠는…… 엔지니어예요.”
누리가 부끄럽다는 듯 귀를 붉히며 말했다.
“엔지니어? 좋지! 어디? 상섬?”
“아 상섬 아니고 에쥘….”
“아이고, 그러면 거기에 다니는 사람 중에 좀 괜찮은 남자 없으려나? 우리 다정인 이 간호사보다 나이가 좀 있으니까 간부 정도. 호호. 어때요?”
하아…… 엄마, 제발…….
다정은 제 마음을 다독이며 엄마에게로 다가갔다.
“아니 내 딸이라서가 아니라, 우리 다정이가 진짜 괜찮은 애거든요. 시골에서 커서 애가 마음씨도 엄~~ 청 곱고, 그래서 좀 선머슴 같은 구석이 있긴 한데, 오호호호, 까탈스러운 것보다 백번 낫지 않겠어요?”
“엄마 여기서 뭐 해.”
냉랭한 다정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명정이 고개를 돌렸다. 다정의 눈치를 보면서도 명정의 수다는 멈추지 않았다.
“오호호, 얘가 또 이렇게 차가울 때가 가끔 있어요. 원래 안 그런 앤데, 오호호. 뭐긴 뭐야. 진료받으러 왔다가 잠깐 들렀지. 마침 너한테 할 얘기도 있고.”
다정에게 말을 할 땐, 목소리 톤이 조금 낮아졌다. 살짝 타박하는 말투다.
“오면 온다고 나한테 얘기하지. 대학병원은 웨이팅이 길잖아. 어디 심하게 안 좋아?”
다정의 목소리가 금세 걱정하는 투로 바뀌었다.
그러자 엄마가 피식 웃었다.
“인상 쓰지 마. 늙어. 그냥 그 핑계로 네 얼굴 한번 보려고 여기 온 거야.”
“진짜지?”
“아이고, 누가 보면 죽을병 꽁꽁 감추는 주인공 엄마인 줄 알겠네!”
유쾌한 엄마의 말에 다정도 긴장을 늦췄다.
“…다정아.”
그런데 다시 호명하는 목소리 톤이 조금 낮아졌다.
“……어?”
생각하는 게 다른 모녀지만, 가라앉은 표정만큼은 복제한 듯 아주 똑같다. 이번엔 심각한 얘기라는 직감이 든다.
“가서, 얘기해.”
다정은 엄마를 모시고 병원 일 층의 한적한 카페로 왔다. 별로 먹고 싶지 않은 차를 각자의 앞에 두고서 서로를 쳐다보고 있는 모녀.
“선봐.”
“……제발. 귀에서 피 나겠어. 그 결혼하라는 소리.”
좀처럼 엄마에게 쏘아대는 법이 없는 그년데, 다정은 지금 잘 드는 칼처럼 예민하게 날이 서 있는 상태였다.
“오죽하면 이래? 네가 뭐가 부족해서 남들 다~ 하는 연애를 못 해? 내가 너 연애질이라도 하고 살면 이렇게 간섭 안 하지. 다 큰 딸내미 뒤꽁무니 졸졸 쫓아다니면서 연애해라, 결혼해라, 이러는 엄마 마음은 오죽하겠니?”
“안 하면 되잖아 그러니까……”
다정이 입술을 짓이기며 말했다.
“어떻게 그래. 자식이 떼쓴다고 굶는 걸 냅둬?”
“그거랑 이건……”
“같아! 엄마한테는… 같아! 엄마는 말이야…, 다른 걱정 없어. 이젠 정말 너만,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면, 엄마도 엄마 인생 살 거야. 너한테 이렇게 목매지 않을 거라고.”
“엄마……”
“내가 너 형제 못 낳아준 게 한이 돼서 그래. 그때 먹고 살기 팍팍하다고……, 어린 너 할머니한테 맡기고 도시 나와 새벽부터 미용실 바닥 청소하고, 기술 배워가며……, 그때는 엄마가 어려서 몰랐어. 가난이 너무 힘들었거든. 가난한데, 애를 더 낳는 건 너한테도 죄짓는 거라고 생각했어. 가뜩이나 네가 받을 것도 부족할 텐데 그마저도 나눠질 거 아니야.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는지…….”
“…….”
“하루하루는 같아도 그 하루가 모이면 미래는 많이 달라. 엄마가 겪어봐서 알아. 그런데 엄마는…… 네 하루하루에 널 많이 사랑하고 지지하고 아껴주는 사람과 함께 했으면 좋겠어. 같이 웃고 울 수 있는 사람. 평범한 사람. 적어도 우리 딸은……”
명정이 다정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애처롭게 쓸며 이어 말했다.
“엄마처럼 고생 안 했으면 좋겠어. 돈 때문에, 악착같이 살지 않고 그냥 남들 같은 시작으로 남들처럼만…… 안 될까, 딸…? 엄마 죄책감 좀 덜어주면 안 될까 정말?”
어느새 눈가에 가득 눈물이 고인 엄마다.
두꺼운 눈물방울이 툭 추락할 때 다정은 알았다. 엄마의 애달픈 사랑이 바닥으로 쏟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
딸의 대답에 명정이 어깨를 떨었다.
“흐윽…”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긋 모녀를 쳐다본다.
“왜 그래… 사연 있는 사람처럼.”
“고마워, 우리 딸. 고마워… 흑.”
* * *
“…선?”
연석이 고개를 갸웃한다. 미국 국적인 성후의 어마어마한 병원비 정산을 위해 원무과로 내려왔는데, 우연히 다정 모녀의 이야기를 들어버린 것이다.
“…흐음.”
* * *
“아니 근데……, 아까 얼핏 듣기론 온 선생이 시골 출신이라고?”
부연이 삐쭉삐쭉 웃으며 누리에게 물었다.
“음, 그렇다고는 들었어요…. 그게 무슨 문제라도…….”
누리는 아주 아주 참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자 부연이 눈썹을 처지게 내리며 눈꼬리를 예쁘게 접었다.
“아유~ 아니. 너무 도시적인 느낌이라 도시 여자인 줄 알았지, 난.”
“두 분 대학 동기이지 않나요?”
“그렇긴 한데, 학교 다닐 땐 별로 안 친했어.”
“그러셨구나……”
누리가 턱을 현무암처럼 만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아까 온 선생 어머님 말씀으론, 온 선생 선본다고 했던 거 같은데…”
암만 들어도 부연이 다정에게 퍽 관심이 많은 눈치였다.
아직 20대 초반밖에 되지 않은 누리도 부연이 다정에게 느끼는 감정은 시기와 열등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기 좋지 않은 것을 떠나, 퍽 안쓰러웠다.
“네, 그러셨던 거 같아요.”
적당히 대꾸해줘야지.
“칫. 고상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자기도 시집 잘 가고 싶으면서……”
부연이 혼자 중얼거리고 있을 때, 다소 무거운 얼굴의 다정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부연은 그것이 또 보기가 싫었다.
온 선생 또 분위기 잡으시는구나~.
“온 선생?”
가느다란 목소리로 다정을 부르자, 생기 없는 다정의 눈동자가 부연에게 닿았다.
“왜 그렇게 내숭이 심해?”
“그게 무슨 말이에요?”
딱딱한 말투가 선을 그었지만, 부연은 개의치 않고 빙긋 웃었다.
“자기도 시집 잘 가고 싶어서 발버둥이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