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내 생각했죠?
며칠째.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떠오른다.
온다정.
실체이나 환영처럼 눈앞에서 입술을 놀리는 자는 자신의 비서, 연석이건만. 늘어진 테이프처럼 연석의 말이 조금도 성후의 귓가에 닿지 않았다. 닿기도 전에 이미 공중에서 흩어져 산산이 조각났다.
성후의 머릿속엔 오직 다정의 떨던 몸짓, 풀린 눈, 고르던 숨결만이 선명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두근두근.
“…니임?”
거역이 어려웠던 충동적인 키스를 퍼부었던 결과는 그녀의 반응으로 서서히 알 수 있었다.
처음 입술이 부딪히는 순간엔 그녀도 분명 당황했었지만…
그다음 입을 맞췄을 땐 분명……
“…혀엉니임?”
그녀도 느낀 것 같았다.
아니!
느낀 게 분명했다!
거부의 몸짓은 1도 없었다. 비록 적극적으로 키스하진 않았지만, 벌어진 입술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그 입술 안은 정말이지 꿀처럼 달…
“아, 형!!!”
“와 씨…! 깜짝이야!”
갑자기 커다란 고함에 성후의 심장이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벌렁거렸다. 그래서 짜증도 함께 확 솟구쳤다.
“소리칠 것까진 없었잖아…!”
좀처럼 표정 변화가 없는 연석이 비닐처럼 얼굴을 구겼다.
“적반하장입니다. 제가 여태 얼마나 떠들었는지 아십니까? 목이 다 쉬게 생겼습니다. 오늘 후두 검사할 테니 산재 처리해 주십쇼.”
“……새끼, 유난은. 뭔데 그래.”
“퇴원하셔도 된다고요.”
마지막이란 마음으로 또박또박 말하는 연석이다.
“퇴원…?”
되묻는 목소리에 서운한 기색이 어렸다. 그것을 감지한 성후가 스스로 흠칫한다.
“네. 뭐 문제 있습니까? 생명에 지장 있는 것도 아니고 병원에 있어 본들 딱히 답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퇴원하셔서 스트레스 조절하고, 운동하고, 경과 보잡니다.”
“피아니스트의 손가락 건강 문제는 생명과 직결된 거나 다름없지 않나.”
그가 토라진 사람처럼 삐딱한 말투로 말했다.
“형님의 경우는 아니죠.”
“왜 아니야. 이래 봬도 한국 피아노 연주자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로 추앙받는 난데. 완전 치명적이지.”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여전히 가슴이 시큰거렸다.
여자에 미처 설렐 때가 아님을, 계속해서 머무르는 통증이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거야 일반 피아니스트들에게나 통하는 설이고. 형님은 핵 다이아몬드 수저에 작곡 능력도 있잖습니까.”
“…….”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남의 깊은 병보다 나의 감기가 더욱 아픈 법이다.
더욱이 성후에게 있어 피아노란, 가족이자 애인이며 친구였다. 그 무엇과도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는 것이다. 가족도 그만큼 자신을 품어줄 수 없었으며, 애인도 그리 매력적이지 못했고, 친구도 제멋대로 구는 성후를 봐주지 않았다.
그런 그를 온전히 수용하는 것이 피아노였다. 때로는 화를. 때로는 사랑을. 그러니 단순한 직업이나 놀이가 아니다. 영혼의 단짝. 혹은 그 이상이다.
무엇이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을까…….
다른 곳에 몰두하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직접 병원에 행차하셔도 되지만, 번거로우시면 바로 주치의 콜 하면 된다고 병원장님이 말씀해주셨습니다. 혹시나 해서 말은 전하지만, 형이 워낙 그런 특혜를 싫어하시니 제가 거절을 하…”
“아니.”
어쩐지 섬뜩한 표정의 성후가 연석의 말을 가로챘다.
“이제부터 좋아할 예정이야.”
“네? 무엇을요?”
“특혜라는 그것.”
도망치는 것도 이럴 땐 하나의 방법이 되겠지. 내가 도망칠 수 있는 곳. 그게 당신이 될 것 같아, 온다정 씨.
* * *
오래된 집만큼이나 나이 든 소파에 앉아 있는 명정의 어깨가 축 처져 있다.
“여보, 뭐 해. 오랜만에 쉬는데 온종일 전화기 붙들고.”
걱정스러운 남편의 말에 아내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다정이 때문에 말이에요. 선 자리 알아보고 있어요. 우리 다정이, 뭐하나 빠지는 데는 없지만, 집안부터 직업까지 평범한 축에 속하는 편이라 중매쟁이들도 애매하게 말하네요, 에휴.”
“뭐야? 아니, 당신은 큰-! 미용실 하지, 나는 내 나름대로 사업도 자리 잡았지, 우리 다정이는 예쁘고 착하지. 도대체 어떤 상대들이 우리 다정일 깔고 봐?”
경환은 신사적인 남자였다. 그래서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자식에 관한 건 예외다. 모처럼 언짢은 마음을 드러내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내가 뭐 시시한 놈한테 보내려고 그러겠어요? 다 고르고 골라 제대로 된 놈한테 보내려고 그러지. 아휴, 지가 알아서 연애도 좀 하고! 이놈 저놈 척척 데리고 오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맨날 병원에만 붙어있고. 집 아니면 우석이, 승준이 만나 술이나 퍼마시고. 기봉이가 밀양에 남아서 다행이지……. 걔까지 서울에 있었으면, 어우….”
생각만 해도 싫다는 듯 진저리를 치는 명정이다.
“여보…… 다정이 아직 한창때야. 꼭 시집보내야겠어?”
“모르는 소리 마세요! 요즘 남자애들이 얼마나 영악한 줄 아세요? 예쁘고 어릴 때 더 좋은 짝 찾아서 보내야 해요!”
그녀는 냉정하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
다정은 다정인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아이의 가치를 숫자로 매기는 것만 같아, 속이 상한 경환이 말을 아꼈다.
아무런 제스처 없이 슥 주방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다급한 명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다정이는 외동이잖아요! 걔 어릴 때, 어머님께 맡겨두고- 우리 먹고살기 팍팍해서 형제 하나 안 낳아주고…… 우리가 죽으면 걔가 혼자 남겨진다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해 금세 울먹거리는 아내는 겨우 말을 이었다.
“……가슴이 미어진다고요.”
경환이 빙글 몸을 돌렸다.
“당신 마음은 알지만. 요즘은 혼자서도 멋지고 즐겁게 살아. 우리 다정이는 똑똑하고 씩씩한 아이어서 충분히 그럴 수 있고.”
“그건 너무……”
아내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말했다.
“쓸쓸하잖아요.”
“아이고 울기는…… 알았어.”
경환은 아내에게로 돌아와 그녀의 어깨를 토닥토닥했다.
저가 능력이 좋았더라면 다정이를 두고 떨어져 지내지도, 아내의 말처럼 외동으로 키우지도, 어쩌면 맞선 상대로도 훨씬 높은 대우를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선 자리는 잡았고?”
그의 따뜻한 물음에 비 갠 뒤 맑은 날처럼 또렷한 목소리로, 명정이 대답했다.
“네. 올해는 반드시… 보내고 말겠어요!”
“여보…….”
“두고 보세요!”
언제 울었냐는 듯 벌게진 눈을 하고서 히쭉 웃는 아내가 조금, 아주 조금 섬뜩한 경환이었다.
* * *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믹스 커피 버튼을 눌리고, 또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눌리려는 순간… 턱!
“잠깐. 밑에 커피 있잖아요.”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다정을 발견한 태풍이었다. 평소완 달리 넋 나간 사람처럼 서 있는 다정의 모습이 의아해 다가오는데, 역시나 나사가 하나 빠져 있었다.
“…아!”
다정은 황급히 자판기 속 커피를 꺼냈다.
“왜 이렇게 멍 때려요?”
“말… 시키지 말아 주세요.”
그녀는 커피잔을 쥐고서 사그라들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아, 부끄러우시구나!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태풍이 애써 능글맞게 웃자 다정이 느리게 시선을 돌려 그의 얼굴을 보았다. 눈빛은 차가웠다.
“계 선생님께 부끄러운 게 아니라……”
자꾸 그 일이 떠오른다고요! 그 당당한 눈빛이! 그 키스가! 허리를 꽉 쥐던 그 손까지도!
하지만 다음 말을 삼켰다.
“정말이에요. 믿어도 좋아요.”
텅 빈 강정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름 의리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다정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그런데… 마성후 환자랑…… 사귀세요?”
“아니에요! 절대!”
다정이 버럭 대답하자, 태풍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하하, 아니면 아니지. 왜 화를 내세요. …앗! 마성후 환자 마지막 회진 시간이에요. 가시죠!”
“아, 저 저는…”
어영부영 태풍을 따라가는 다정이다. 속으론 승강기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이대로 튈까, 폐소공포증이라고 말할까, 고민스럽다.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좋은 결과를 가져오진 못할 터다. 안 그래도 구설 좋아하는 병원 도마에 직접 오르는 꼴이 되고 말 테니까.
전전긍긍하며 4동의 승강기 앞에 서자, 태풍이 절망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고장.”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엔지니어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10분이면 됩니다!”
“기다리죠.”
“아니, 그럴 시간 없어요. 달리죠.”
다정이 용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지나치게 용맹스러워, 저항감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는 홀린 듯 다정을 따라 비상구 계단을 올랐다.
“헉… 헉…!”
지치지도 않고 앞서 올라가는 그녀의 뒤를 쫓고 쫓아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시원하게 다리를 뻗을 때마다 하얀 종아리 근육이 일자로 갈라졌는데 그것이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미친 체력의 여자군!!
마지막 10층에 도착해 비상구 문을 열자, 엄청난 고난을 함께 이겨낸 동지처럼 느껴졌다. 물론 태풍만 그랬다.
그는 무릎에 손을 받치고 헉헉거리고 있었고 다정은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유지했다.
1004호 병실에 들어서자, 다정과 태풍을 제외한 의료진이 성후를 빙 둘러싸고 서 있었다. 뒤늦게 들어오는 두 사람에게 교수의 따가운 눈초리가 잠시 스치다 사라진다.
“스트레스 조절도 중요하지만, 휴식에도 노력이 필요합니다. 워낙 자기관리를 잘하시니, 더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시겠지요.”
교수의 말에 성후가 아니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런 말은 하겠습니다, 라고 쓰여 있는 얼굴이었다.
교수는 헛기침하며 더욱 노력해보자는 둥, 자주 뵙자는 둥, 언제든지 연락 달라는 둥, 수박 겉핥기식 예를 갖췄다.
다정은 그런 그를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커튼 밖 어딘가에 시선을 두었다. 그녀가 듣기에도 별로 중요한 내용은 없으니 이 공간에 머문다는 것에만 의를 두면 충분할 듯했다.
“따로 말씀드릴 게 있으니 곧 병원장님 방으로 가겠습니다.”
성후의 말에 아닌 척 모두의 동공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다 이내 반달로 접고서 최선을 다해 미소를 지었다.
“네네, 알겠습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교수의 말에 일동 고개가 숙여졌다. 그중에 다정도 있었다.
모두가 함께 돌아서려는 순간,
“온다정 선생님.”
성후가 다정을 불러 세웠고 그녀는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졌다.
“…네?”
흰자위로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간호사 미소를 발사하는 다정.
“할 얘기가 있는데.”
…두근두근. 두근두근.
“말씀하세요.”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말이죠?”
그는 말 한마디로 상대를 긴장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척추뼈가 저릿해진 다정이 대답 대신 두 눈을 깜빡였다. 성후는 어깨를 으쓱한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자 태풍도 몹시 궁금해졌다. 또 애도 바짝 타들어 갔다. 하, 둘이 진짜 뭐야??
“그럼…”
성후가 능글맞게 웃으며 입을 열려는 순간, 다정의 심장이 바닥으로 쿵 추락했다.
“하하.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저희는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대천사 맥 커터는 바로 담당 교수였다.
여기서 가장 파워가 있는 사람이니, 다른 의료진들도 줄줄이 그를 따라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다정이 입술을 앙다물고 성후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눈에 전과 같은 적대감은 없었다.
이를테면 한 남자를 바라보는 한 여자의 눈이랄까.
그 미묘한 차이를 눈치챈 성후가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입 다물고 있으면 사나운 얼굴인데, 미소를 입에 거니 우아하면서도 동시에 수컷의 향이 물씬 풍겨, 다정의 심장이 주책스럽게 춤췄다.
저 남자는 미소마저 미쳤구나!
“병원 일. 많이 바쁩니까?”
그날의 키스 얘기를 꺼내면 어떡하나, 걱정했었는데 다행이었다. 안심과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섭섭함도 밀려들었다.
하, 난 대체 뭘 바란 걸까.
“네. 돌기 직전이죠.”
작은 실망을 해서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무뚝뚝하게 흘러나왔다.
“돌기 직전이라…….”
“특별히 하실 말씀 없으시면 나가보겠습니다. 돌 시간이 되었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물러나려는 순간 성후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성큼성큼 다정에게 다가왔다. 그 발걸음엔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며칠간 내 생각했죠?”
“아니요!”
강한 긍정을 드러내듯, 강한 부정을 뱉어버렸다. 뱉고 나서 아차 쉽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성후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번진다.
“난, 했는데. 온다정 씨 생각.”
왜 이렇게 훅 들어오는 걸까.
“그래서 그쪽도 내 생각했을 것 같더라고. 정확히…”
그가 말할 때마다 눈앞에 보이는 도톰한 목젖이 꿈틀거렸다. 이게 뭐라고, 무진장 야하다!
…꿀꺽.
“내 입술, 그리고 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