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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끔한 것이 좋아-9화 (9/82)
  • 9화. 마성의 키스

    어젯밤 승주가 제 옷에 쏟아낸 소주가 밤새 몸에 뱄던 모양이었다. 다정은 당황했지만, 이렇다 할 변명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할 필요도 없다.

    “아무리 나일론 환자를 상대하는 거라지만, 간호사가 환자 앞에서 술 냄새라니.”

    성후의 미운 입이 또 열린다.

    다정의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욱하고 올라왔다.

    “나일론 환자라고 생각한 적 없는데요.”

    “안 죽는다면서요.”

    “죽지 않는다고 다 나일론인 건 아니죠. 마성후 씨 손가락엔 문제가 있고 또 지금의 서비스를 누릴 돈이 있으니까요.”

    다정의 말에 문병 온 여자가 흠칫 놀란다. 깜빡거리는 여자의 눈동자 안엔, 이런 간호사는 처음 본다고 쓰여있었다.

    날 먼저 건드린 건 저 남자입니다.

    “서비스라……. 서비스직에 몸담고 계신 거치고는 많이 뻣뻣하시네요. 그래서 되겠습니까?”

    성후의 말에 다정이 싱긋 웃었다.

    “아니다 싶으면 물리세요.”

    그리고 이어 강조했다.

    “다른 간호사 불러줄 테니까.”

    화가 난다.

    시비를 거는 게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단발머리에 고상하게 앉아 있는 여자 앞에서 무참히 밟힌다는 것이 화가 난다.

    “그럼 성후 씨. 저 이만 가볼게요. 작업이 밀려서.”

    여자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이내 병실 밖으로 사라졌다.

    “배웅 안 가셔도 돼요?”

    가시 돋친 말투지만, 웬일로 사적인 질문을 던지나 싶어 성후가 다정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 여자친구분이 많이 불편해 보이셔서요. 뭐, 물론 저완 상관없지만요.”

    여자친구?

    성후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는 힘주어 다정을 불렀다.

    “온다정 씨.”

    “네. 마성후 씨.”

    그녀도 지지 않고 단호한 목소리로 칼같이 대답했다.

    두 사람의 눈이 서로를 무섭게 쳐다보았다.

    이 날 선 공기는 분노나 시기에서 기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아니다. 스스로의 마음 밑바닥까지 훑어보면 답이 간단히 나오건만. 서로가 괘씸해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 두 사람이다.

    “여자친구 아닙니다. 저분은 그냥 저와…”

    왜 변명을 하는지 모르는 성후와 왜 그의 변명에 귀를 바짝 세우는지 모르는 여자가 애가 터지도록 느려진 시간 속에 함께 있었다.

    …꿀꺽.

    다정의 울대가 경박한 소리를 내는 순간, 정복 주머니에 담겨 있던 핸드폰이 몸을 떨었다.

    성후는 하던 말을 끊고 침묵 속에 떨리는 핸드폰을 받으라 손짓했다.

    “…여보세요?”

    -온 선생님! 교수님 콜 떴어요! 아주 급한 일이래요! 늦으면 완전 털릴 각이랍니다!

    누리의 전화에 다정이 황급하게 주위상황을 읊어준 뒤 성후의 병실을 등졌다. 다급한 마음에 승강기 버튼을 누르고 나서, 그녀는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무려 10층이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갈 수 있을까? 아니, 무려 10층이기 때문에 타야지! 그런데… 그런데…

    폐소공포증이 다정의 다리를 단단히 옭아매는 것만 같았다. 그녀도 가능하다면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움직이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다.

    곧이어 승강기가 다정의 눈앞에 멈춰 섰다.

    두근두근!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닫히려는 문을 황망하게 바라보고 있던 다정. 그런데 그 순간 승강기 문이 다시금 열렸다.

    두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틀자, 성후가 무심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안탑니까?”

    다정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버렸다. 차트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은 꼭 하나의 간호사 마네킹 같았다.

    성후는 그런 다정을 스치고 지나가 승강기에 올랐다.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한 번 더 입술을 열었다.

    “…갑니다?”

    다정은 대답 대신 몸을 돌렸다.

    그냥 털리고 말자, 도저히… 자신이 없어… 엇?!

    그 순간. 성후가 다정의 손목을 낚아채 승강기에 태웠다. 대부분 한국인이 그러하듯, 습관적으로 ‘닫힘’ 버튼을 누른 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 바짝 언 모습이 좀 이상해서.”

    두근두근. 두근두근.

    “1층이죠?”

    두근두근. 두근두근.

    다정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승강기 구석에 몸을 딱 붙였다.

    시간이 물에 갇힌 듯 천천히 흐르기 시작한다. 목덜미로부터 한기가 들었다. 온몸이 떨려온다. 들키고 싶지 않아 승강기 안 손잡이를 꽉 쥐는 다정이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성후가 다정에게로 다가왔다.

    “……어디 아픕니까?”

    상냥하진 않아도 살피는 말투였다. 그러나 다정에겐 지금, 말이 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귀 밖에서 뱅뱅 돌다 사라질 뿐이었다. 그냥 계단으로 갈걸!

    “저기요?”

    불안한 시선으로 바닥을 훑고 있는 다정에게 성후가 가늘고 긴 손으로 그녀의 뺨을 툭 만졌다.

    그러자 깜짝 놀란 다정이 고개를 위로 올린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다음으론 파르르 떨리는 입술이 아주 조그맣게 열려선 말 비슷한 것이 흘려보냈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뭐라고?”

    그가 경청을 위해 다리를 굽히고 허리를 숙였다.

    “……공포… 증.”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는 목소리에서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공포증’.

    “공포증?”

    “폐소… 공포증이… 있어요.”

    그때였다.

    덜컹!

    “꺄악-!!”

    다정은 본능적으로 저보다 커다란 성후의 품에 와락 안겼다. 아니, 안았다.

    “진정하세요. 층수 눌리는 걸 깜빡했더니, 누가 밑에서 눌렀나 봅니다.”

    다정의 귓가에서 조금은 상냥한 성후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오들오들 떠는 다정이 퍽 안쓰럽게 느껴지는 성후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CCTV 위치를 확인했다. 이윽고 큰 몸으로 카메라를 가렸다. 그 누구의 시선에도, 다정이 노출되지 않도록.

    “눈, 감아요.”

    작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일순 깨닫는다. 고장 난 로봇처럼 그녀의 귓가엔, 아무런 말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그가 직접 다정의 두 눈 위를 손으로 덮었다.

    “여기 이 감각에만, 집중합시다.”

    성후는 단숨에 다정의 입술을 삼켰다.

    “…!”

    신체 중 입술은 가장 작은 부위의 접촉이었다. 그런데 요망하게도 시야가 어둠에 지배당하자, 그의 말처럼 온 감각이 입술에 집중되었다.

    갑작스러운 키스는 허락 따위 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야만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읍…!”

    공포가 아닌 흥분으로 온몸이 떨렸다. 그의 혀가 뱀처럼 감겨 깊숙이 파고들 때마다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하기 어려웠다.

    또 그마저 눈치챈 성후가 다정의 허리를 감고 바짝 제 품으로 당겼다. 조절했지만, 숨길 수 없는 강렬한 힘이 고스란히 다정의 허리로 전달되었다.

    “하읏!”

    입술로부터 시작해 척추를 따라 전율이 흐른다.

    그때였다.

    그의 입술이 살짝 멀어져가는 것이 아닌가.

    “……?”

    시야는 여전히 가려져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공포보단 호기심이, 두려움보단 아쉬움이 가슴 속을 지배했다.

    이 손 좀 치워 봐요. 대체 왜 멀어진 거죠?

    의문이 들었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진 않았다.

    “하아….”

    바로 앞에서 뜨거운 숨결이 닿자, 예민해진 다정의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온 정신이 그의 입술에 쏠려 있었다. 온 마음이 그에게 기울어져 있다.

    그 지랄 맞았던 VVIP 환자 마성후라는 사실조차 망각될 만큼 키스는 단숨에 다정을 굴복시켰다. 그럼에도 신비한 건, 전혀 굴욕적이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완전히 사고가 허물어져, 그의 입술을 또다시… 그것도 애타게, 갈망하는 다정이다. 꿀꺽. 목이 탄다. 그의 키스에, 이곳이 폐쇄된 승강기 안이라는 사실조차 새카맣게 잊었다. 물론 그의 손이 여전히 다정의 눈을 덮고 있어 더욱 그랬겠지만.

    결론적으로 그가 옳았다.

    시야를 가린 것도.

    …키스를 한 것도.

    공포 대신 갈증을 안겨주었지만, 적어도 두려움에선 해방되었다. 그것으로 위안으로 삼으려는 찰나, 다시금 야릇한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감각은 재차 입술에서 발끝까지 짜릿하게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

    아아. 이 진하고 뜨거운 느낌. 정말이지, ……미쳤어!

    천천히 공들이는 키스보다 거칠게 몰아치는 키스가 훨씬 황홀하다는 것을, 다정이 몸소 깨닫게 되는 날이었다.

    * * *

    “이러다 병원에 틀어박혀 죽겠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복도를 거니는 태풍.

    “어차피 죽을 거 여인의 품에 안겨 죽었으면 좋겠다… 어흑…!”

    외로움에 말라 비틀어가던 태풍은 울상이 되었다.

    아니, 안겨 죽든, 차여 죽든 뭐든 간에 연애가 먼저 아니야? 연애? 누구랑? 어디서? 그럴 시간이나 있고?!

    자문으로 낙담하던 그의 머릿속에 다정의 모습이 은은하게 떠올랐다.

    온 선생이 참하기는 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승강기 앞에 선 순간,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오, 굿 타이……

    “응??”

    놀라 눈이 동그랗게 커진 태풍의 목소리에, 뜨겁게 키스를 나누던 남녀가 고개를 틀었다.

    “허어억!!”

    커다란 마성후 환자의 품에 안겨 풀린 눈으로 호흡을 고르고 있는 여자는 다름 아닌 다정이었다. 태풍은 뒷걸음질 치며 붉어진 하관을 가렸다.

    “저 그만……!”

    아찔한 표정으로 성후를 잠시 올려보던 다정이 승강기에서 튀어나와 어딘가로 달려가 버렸다.

    태풍의 시선이 자연히 남겨진 성후에게로 옮겨졌다.

    성후는 제 입술을 검지로 훔치며 피식 웃었다.

    남자인 자신이 봐도 비현실적으로 섹시한 미소였다.

    더욱이 방금 그가 닦아낸 타액은 다정의 것이리라!

    그때 성후의 동공이 움직였고 이내 태풍과 눈이 마주쳤다. 태풍은 움찔했지만, 성후는 무심하고도 태연하게 태풍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생명체라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는 뉘앙스로.

    무언가 치욕스럽다.

    괜히 성후의 뒤통수를 노려보던 태풍이 승강기를 다시 잡았을 때 한 간호사가 다가왔다.

    “어머 계 선생님! 박 교수님 건강 강의하는 데 안 가세요?”

    부연이었다.

    “지금 공석이 생각보다 많아 저희 간호사들도 다 호출받았어요. 저는 타과 협진 왔다가 부랴부랴…… 음? 표정이 왜 그러세요?”

    자신이 키스하다 들킨 사람처럼, 태풍의 얼굴은 익어 있었다. 그런데 기분은 꼭 제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긴 것처럼 더러웠다.

    “계 선생님?”

    “아아, 네. 갑시다. 가야죠.”

    순순히 부연을 따랐다. 하지만 태풍의 마음은 완벽히 다른 쪽으로 걷고 있었다. 다정을 떠올렸고, 그녀에 대한 정보를 구체적으로 구분하면서, 동시에 정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온다정. 서른. 적당한 키에 훌륭한 몸매. 성형외과와 등진 깨끗한 이목구비에 도도한 언행을 일삼는 프로패셔널한 간호사.

    하지만 여자로선…… 무진장 쉬움!

    갑자기 태풍의 속에서 정복욕이 끓어올랐다.

    모두가 칭송하는 마성후의 품에 안긴 것으로 추정되는 그 여자를…… 어디 나도 한번 가져보자!

    * * *

    주차장, 편의점, 카페, 오가는 환자와 차들. 어지럽게 시선을 돌리던 다정은 그나마 조용한 곳으로 달렸다. 허억허억.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만큼 격하게도 뛰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병원 뒤뜰이었다.

    회색의 시멘트 벽면을 마주 보고서 발작적으로 뛰는 심장을 지그시 눌렀다.

    지, 진정해 심장아! 진정하라고!

    그러나 진정될 리가 만무하다.

    화아악- 달아오른 붉은 볼을 가녀린 손이 감싼다.

    “……미쳤어.”

    감각에만 집중하라던 명령조의 섹시한 목소리, 열기를 품은 눈동자, 훅 다가오던 그의 체취, 맞닿던 콧등, 뜨거운 입술, 농염한 혀, 간간이 섞이던 숨소리, 귀에서 맴돌던 젖은 소리와 공포가 물러난 자리를 차지한 설렘까지.

    ……두근두근. 두근두근.

    희미하게 피어오르던 감정이 키스로 인해 각성한 건지, 아니면 그저 키스에 홀려 이러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 악마 같은 키스에 완전히 KO패 당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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