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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끔한 것이 좋아-8화 (8/82)

8화. 자고 가

성후의 시선이 회색 소형차에 기댄 남자 하나, 정자세로 서 있는 남자 하나, 그리고 여태 본 적 없는 밝은 표정의 다정에게로 바쁘게 옮겨 다녔다.

“좀 괜찮냐??”

“나 결심 하나 했어.”

그들은 인사도 생략하고 대화부터 나누었다. 그래서 더욱 막역해 보였다.

“음? 뭘?”

“괜찮냐는 말, 아끼기로. 아오, 지겨워 죽겠네.”

“큭큭큭. 너답다. 타. 가자.”

턱짓하는 남자에게 격의 없이 헤드록을 거는 다정이다.

“이 녀석이 언제 이렇게 커서 차로 픽업도 딱! 오고. 응? 이 누나가 아픈 걸 알면 문도 척척 열어주고 해야지! 이 시건방진 녀석!”

유쾌해 보이는 세 사람을 바라보는 성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우습게도, 감정의 전환엔 성공했다. 하지만 어두운 결의 기분이라는 건 마찬가지다.

내가 왜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해. 내가 왜.

그는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고 몸을 돌렸다.

* * *

포장마차 주황색 천막 아래 오순도순 모여 있는 소꿉친구들.

“야. 맹장 수술했다며. 술 먹어도 돼?”

어려선 참 귀여웠는데. 자라면서 점점 날라리 같아지더니 요즘은 하는 짓도 날라리 같은 승주를 쏘아보며 다정이 말했다.

“딱 한 잔은 약이거늘.”

그녀가 무적의 논리를 펼치며 소주잔을 꺾으려는 순간, 우석이 다정의 손을 탁 잡았다.

“간호사라는 애가.”

분명 힘 조절을 했을 테지만, 살짝 손목이 아플 정도였다.

…칫.

우석은 현재 복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선지 남자 냄새가 아주 폴폴 났다.

“우리 우석인 정말 잘 컸어. 올바르게.”

다정이 간드러진 얼굴로 탄복했다.

“까분다.”

우석의 묵직한 목소리에도 그녀는 개의치 않고 헤헤, 웃었다.

“나는?”

승주가 톡 끼어들었다. 승주는 클럽에서 바텐더를 한다고 들었지만, 다정은 아직 거기에 가본 적이 없었다. 꼭 누나의 마음 같아서인지, 승주의 작업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보수적이라서가 아니다.

그 직업이 곱게 보이지 않은 이유는 안정과는 절대적으로 거리가 먼 까닭이었다.

“너는……”

그래도 이미 다 자란 친구들에게 무슨 쓴소릴 하겠는가. 또, 건실해 보이는 우석 역시 안정과는 친하지 않으니 말이다.

“됐다.”

그리고 자연스레 소주를 삼키려는 순간, 우석의 손에 의해 다시 제지당했다.

“어허.”

“……헤헷.”

아쉽지만 소주잔을 파란색 플라스틱 테이블 위로 내려놓는다. 먹지 못하고 찰랑거리는 소주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무슨 일 있냐?”

우석이 물어왔다. 매일 링 위에서 뛰는 놈이라 그런지 참 예리하다.

“있어 보이니?”

농담조로 웃으며 말하자 우석이 진지한 얼굴로 대답한다.

“장난치지 말고.”

우석의 물음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마성후’였지만 그것을 그대로 뱉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자꾸 엄마가 시집가라고 보채시지. 누가 보면 마흔은 된 줄 알겠어.”

그러자 우석이 위로가 아닌 척 담담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마흔이면 어머님도 진작 포기하셨겠지. 고울 때 좋은 사람 만나길 바라시는 걸 거야.”

“우석쓰……!”

다정이 눈을 반짝이는 순간, 얄밉게 소주 한잔을 입에 털어 넣고 캬- 소리를 내는 승주다.

그런 승주를 밉지 않게 노려보는 다정.

그런 다정을 지그시 쳐다보는 우석.

“너도 장가갈 생각 하면…”

“어어, 그럴 생각 없어. 난 정확히! 비혼주의자야.”

승주가 깔끔하게 선을 그었다.

“오호 비혼…!”

“다정이 너는.”

우석이 물어왔다.

“음. 막연히 결혼이란 건 언젠가 당연히 하게 되는 줄로 알았어. 선택이 아니라 수순. 지금은 거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지만 말이야. 그래도 여전히 결혼에 대한 거부감은 없어. 당장 쫓기듯 말고, 때 되면 하겠지… 같은, 낙관에 기대는 중이라고나 할까.”

“흘러가는 대로 살지 말고, 사는 대로 흘러가.”

돌아온 우석의 담담한 목소리. 우석의 말을 몇 번 곱씹던 다정이 나름의 해석을 내놓았다.

“……그러니까 의식을 가지고 남자를 찾아라?”

“우리 클럽에 놀러 와. 물 좋아.”

속없는 얘기를 던지는 승주를 다시 흘겨보는 다정이다. 그런 승주의 방해에도, 다정은 길을 잃지 않고 다시 논점으로 돌아왔다.

“모르겠어, 뭐가 맞는 건지.”

“여태 잘해왔잖아. 지금처럼 하면 되지.”

복서나 바텐더나 불안한 직군이긴 마찬가진데. 어째서 우석은 이렇게 든든하게 느껴지는 걸까. 참으로 잘 컸다. 외모도! 정신도! 우리 우석이, 이제 돈만 벌면 된다! 아자!

다정이 흐뭇한 눈으로 우석을 바라보자,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왜?”

“좔~ 생겼으.”

개구쟁이가 된 다정이 야릇한 윙크를 날리자 우석이 헛웃음을 짓는다.

그 순간,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던 다정의 핸드폰이 떨려왔다. 그 바람에 우동 국물도, 고갈비도 부르르 떨렸다.

“……빌런의 등장이다.”

다정이 휴대폰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그녀의 뒤로, 공포영화 음악이 깔리는 것만 같았다.

“어머님?”

우석이 물었다.

“응, 안 받아야 겠…”

“여보세요?”

쾌활하게 덥석 전화를 받은 사람은 승주였다. 다정의 얼굴이 신문지처럼 팍 구겨진다. 내 이놈의 목을 당장…!

-어? 누구시죠…?

“에이 어머님, 기대 마세요. 승주입니다!”

승주가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흠.

“흠이라뇨! 흠이라뇨!”

-니들 또 모여 있니?

“네.”

-우리 다정이 붙잡지 말고 괜찮은 놈 있으면 소개나 좀 해줘라.

“차암~. 어머님도 저희를 어떻게 보시고! 옛말에 끼리끼리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괜한 기대를 했구나.

“빙고!”

그러고선 또 속없게 웃어젖히는 승주다.

-다정이는?

희미하게 들려오는 통화음에 초집중하고 있던 다정이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잠깐만요.”

곤란해진 다정이 얼굴을 다시 확 찌푸리자, 우석이 전화를 낚아챘다.

“네, 어머님.”

-오, 우리 우석이 아니니?

한층 높아진 목소리에, 승주가 섭섭한 듯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다정은 무음으로 크하하, 웃은 뒤 승주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래, 밥은 먹었고?

“네. 먹었습니다.”

-어디 우리 우석이 같은 남자 없겠니?

“네.”

-응? 뭐가 그렇게 단호해? 쿡쿡.

“없으니까요.”

우석의 눈에 아이처럼 장난을 치고 있는 다정과 승주가 들어왔다.

“…저 같은 남자.”

다정에게 전화가 넘어가지 않게끔, 통화를 갈무리했다. 어렵지 않았다. 다정의 모친은 말수가 많은 편이어서 몇 가지 질문을 던지면 용건을 잊고 대답하는데 열을 올렸다.

이후 평화로운 술자리는 계속 이어졌다.

소주가 한 병, 두 병, 세 병… 그렇게 쌓이는 동안 다정은 극한의 인내심을 가지고 구경했다. 그녀야말로 술이 딱 당기는 날이었으니 말이다.

취하지 못했단 죄로, 술 취한 친구들을 챙기는 건 다정의 몫으로 남겨졌다.

계산하고, 콜택시를 불러 비어있는 우석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투룸이지만 옥탑방이어서 하늘과 가까운 옥탑의 공기가 서늘했다.

먼저 옥탑에 도착한 다정이 제 몸에 밴 술 냄새를 맡으며 코를 찡그렸다.

“우웩…… 술 냄새.”

아까 전, 승주가 제 옷에 술을 쏟은 탓이었다. 마침 참았던 잔소리를 늘어놓던 중이었다. 따라서 다분히 고의적 만행이란 확신이 들었지만, 싹싹 비는 친구에게 더는 다그치기 힘들었다.

“으허억! 도오차악-!”

해롱거리면서도 잘도 계단을 밟고 올라온 승주다. 이윽고 다정을 지나쳐 익숙하게 우석의 집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먼저 침대를 차지하고 벌러덩 눕는다.

뒤로는 붉은 낯의 우석이 따라 왔다.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 내딛는 걸음걸음, 애쓰는 것이 느껴졌다. 신발까지 가지런히 벗은 그가 발소리만은 주체하지 못하고 쿵쿵거리며 집으로 들어섰다. 배터리가 다 된 것처럼 털썩, 바닥에 주저앉는다.

“속 괜찮니?”

다정이 다가가 묻자, 우석이 무거운 추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승주가 잠결에 허물처럼 옷을 벗어젖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라?”

곧이어 우석도 상의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바로 욕실로 직행해 푸하푸하 하며 세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욕실에서 나오는 우석의 얼굴은 조금은 개운해 보였다.

“이것들이…… 날 여자로도 안 보고……”

다정이 장난스레 부르르 떨자, 우석이 무심한 투로 말했다.

“보여.”

“음?”

방금 언뜻 로맨스가 지나간 거 같은데? 설마.

다정이 피식 웃는다. 개의치 않고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그래, 뭐. 생물학적으로 여자이긴 하니까. 아무튼 난 간다.”

그런데 우석이 급하게 다정을 쫓았다. 닫히는 현관문을 한 손으로 잡고서, 다정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달빛이 조명이 되어, 근사하게 조각난 우석의 맨몸을 비췄다. 보기 드문 몸짱이다. 다정의 눈이 성후의 몸을 훔쳐봤을 때와는 달리 노골적으로 빛난다.

후후후. 역시 운동선수 몸은! 역시. 잘 컸어. 내 새끼.

“자고 가.”

“……야. 나 이래 봬도 여자라니까? 너희들이랑 발가벗고 냇가에서 물놀이하던 그 온다정이 아니란 말이야.”

“그러니까. 버스도 끊겼고 우리 동네 험해. 밤에는.”

“택시 불러서 갈게.”

별걱정을 다한다는 뉘앙스로, 다정이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이 밤에 오는 택시기사는 또 어떻게 믿고. 뉴스도 안 보냐.”

“…….”

“어서.”

우석이 덥석 다정의 손을 잡고 남는 방으로 끌었다. 행거뿐인 방. 그 행거에조차 걸려 있는 옷가지가 몇 벌 되지 않아, 더욱 휑하게 느껴졌다. 우석은 어둠 속에서도 능숙하게 요를 펴주었다.

“…흡.”

다정은 너무 피곤한 나머지, 이불이 강렬하게 유혹을 하는 것만 같았다. 힐끔. 핸드폰 시계를 보니 벌써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오늘만이다.”

다정의 말에 고개를 주억인 우석이 이내 칫솔을 가져와 척 내밀었다.

“그럼 자라.”

“…은근히 섬세하긴. 우리 우석이 나중에 와이프한테 사랑받겠어.”

우석은 어깨를 으쓱한 뒤 방을 비워 주었다.

잘 준비를 마치고 이불에 누웠다. 아득한 피로가 몰려든다. 이불 속으로 파고들자 그물그물 눈이 감기는 상태에서 잠시 잊고 있었던 남자의 얼굴이 또 떠올라버렸다.

아…… 마성후…….

눈꺼풀을 흐릿하게 깜빡이다, 그녀가 속으로 말했다.

내 꿈에까진 나오지 마라, 나오지 마…….

* * *

“담당 간호사를 직접 지명했다고?”

의준의 물음에 태풍이 홍삼진액을 쪽 빨아 먹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왜 하필 온다정을?”

“왜요. 온 쌤 환자들한테 인기 많잖아요.”

“신부연 선생도 인기 많아. 어쩌면 VVIP 비위는 신 선생이 더 잘 맞출 텐데.”

“그럼 마성후 환자 취향이 저랑 같나 봅니다?”

태풍의 말에 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 온다정 좋아하냐?”

이건 뭐. 온 병원 안 남자들을 다 홀리고 다니니.

“좋아한다기보다…… 음. 예쁘다고는 생각합니다만?”

“개뿔.”

마치 저는, 한 번도 그녀에게 마음을 준 적이 없다는 듯 질색하는 의준이다.

“아차차. 라운딩 갈 시간이군.”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VVIP 병동이 있는 4동으로 향했다. 태풍도 뒤따랐다.

10층에 도착하자 이미 와 있는 교수와 다정 등이 눈에 들어왔다.

1004호 병동으로 들어가 사실상 불치병과 같은 성후의 병에 대한 최대한의 긍정적인 얘기를 하고 다시 복도로 나온 의료진들. 본래라면 책임을 피하고자 가장 최악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 정석인데, 성후에게만은 예외다.

“오늘 점심은 뭐로 먹지?”

“근처에 순두부찌개 맛집이 생겼답니다.”

“오. 좋군. 순두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던 의료진들이 사이좋게 승강기에 올랐을 때 다정은 남았다. 처방받은 대로 이행을 해야 할 업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의준이 씩 웃으며 말했다.

“먼저들 가시죠.”

그렇게 의료진들을 태운 승강기를 그대로 보냈다. 그리고 바로 다정을 불렀다.

“온 선생.”

……윽.

다정이 몸을 빙글 돌려 대답한다.

“네?”

“04-1번 환자가 왜 온 선생을 담당 간호사로 굳이, 다시, 지목했다고 생각하나.”

04-1번 환자는 성후를 가리키는 말이다.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먼저 의준의 말투가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다정도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처신 잘해.”

“……네??”

먹다 남은 고갈비 같은 시키가 지금 뭐라고 왈왈거리는 거야?

“걱정돼서 해주는 말이야.”

그리고 다시 올라온 승강기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의준.

다정은 천장을 바라보며 큰 숨을 훅 몰아쉬었다. 차오르는 열기를 식히는 그녀만의 방법이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1004호 병실로 들어서자, 웬 손님이 보였다. 단아한 뒷모습에 잠시 멈칫한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안 될 수가 있겠어요?”

“그보다…… 소문이 많이 났습니까?”

평소보다 조금은 부드러운 목소리의 성후가 여자에게 말했다.

“아니요, 아직은. 저도 입조심 할게요. 딱히 만나는 사람도 없고요.”

“원래 글이란 게 혼자 있을 때 잘 나오는 거 아닙니까.”

성후가 피식 웃으며 여자에게 말했다. 다시 병실로 들어온 다정에겐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다정의 가슴 속에 서늘한 바람이 한 줄기 불어 닥쳤다. 스스로가 우습다. 낯선 무관심보다 어제의 시비가 낫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온다정, 너 왜 그래?

“그러니까요. 저 혼자서 오래오래 콕 박혀 있을 거니까 좋은 곡 주세요. 근사한 가사 붙여드릴게요.”

“곡이라…….”

성후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는다. 저런 미소는 또 처음 봤다. 작사가로 보이는 저 여자가,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라도 되는 걸까.

아주 친밀해 보이진 않지만, 선과 예를 동시에 지키는 성후의 모습이 ‘특별한 마음’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후아후아…. 온다정 씨, 일합시다?

다정은 성큼성큼 다가갔다.

성후와 여자의 눈이 다정에게 잠시 머무른다.

“오늘은 바늘 빼 드릴게요. 더는 수액 맞을 일은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성후의 손을 잡아당기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정은 흰자위로 그것이 보였지만,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묵묵히 자기 일을 했다.

문제는 다음이다.

“……술 냄새.”

서늘한 성후의 목소리가 다정을 관통했고, 그녀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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