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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끔한 것이 좋아-7화 (7/82)

7화. 벗어드리죠

지독하게 무거운 공기가 가라앉는 VVIP 병실 안.

연석이 서 있는 자리에선 다정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우, 우나? 우는 걸까…?

잠깐의 침묵에도 질식할 것 같았던 연석은 마침 정면으로 보이는 성후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에 질타가 어렸다. 너무 가셨습니다. 형님.

“그러는…”

순간, 다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석의 귀가 쫑긋 열리고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마성후 씨는 돈이 그렇게나 많다면서요?”

분명 엄청난 표정이리라. 그러나 아쉽게도 여전히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연석이었다. 까비…!

그런데 성후의 표정이 미묘하다. 재미가 있으면서도 묘한 흥분이 이는 얼굴이었다.

연석은 막장 드라마의 클라이맥스 장면을 보고 있는 애청자처럼, 침을 꿀꺽 삼켰다.

“온다정 씨는 내 많은 돈이 취향인가 봅니다?”

성후의 말에 다정이 피식 썩소를 날렸다.

“제 소문을 들었다니. 저도 들은 얘기로 화답했을 뿐인데요. 저의 시시한 얘기야 이 병원에 국한되어 있지만, 마성후 씨는 전국적… 아니, 세계적이라면서요. 뭐 저한텐 유익한 소문이 아니라 아쉽지만 말이에요.”

네가 굳이 나를 아는 척하겠다면, 나도 그리하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상기시켜준다. 나보다는 당신 쪽을 바라보는 이들이 많고 또 그만큼 손해 보는 쪽도 당신일 거라고.

뜻을 제대로 관철한 건 맞았지만, 다정이 모르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자신이 말이 한 남자의 가슴에 뜨거운 불을 지폈고 또 한 관중의 가슴엔 시원한 폭포수가 되어주었다는 사실을.

연석의 흥미진진한 마음이 두 눈에 드러나 그대로 반짝인다. 크! 저런 여잔 처음 보네. 완전 잔 다르크잖아? 자, 마성후 선수. 반격 가시나요?

“…야.”

갑자기 불똥이 관람객에게 튀었다. 한창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말이다.

“네?”

연석은 태세전환에 능했다. 광속으로 굳힌 얼굴이 평소의 그것과 똑같았다. 눈치가 귀신이어서 성후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뻔하게 예상되었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청순해 빠진 얼굴은 흔들림이 없었다.

“넌 좀 나가 있어.”

“…네.”

쳇.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쓸쓸히 퇴장할 수밖에.

관람객이 빠지자 서로가 웃음을 뚝 그쳤다. 가식으로 짓던 미묘한 웃음을 거둔 거다. 대놓고 서로를 노려보는 가운데 먼저 입을 연 건 성후였다.

“그 말본새는 어떻게 안 됩니까?”

“허…!”

다정은 진심의 비웃음이 터졌다.

“그런 말 할 자격 전-혀 없다는 거, 아시죠?”

“제 입 갖고 제 마음대로 말도 못 합니까?”

저런 모순적인 말을 뻔뻔한 얼굴로 잘도 한다.

“그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고 싶네요.”

“온다정 씨와 저는 처지가 아주 다르죠.”

“설마…”

맹랑하게 몰아치던 다정이 느리게 다음 말을 이었다.

“갑질이라도 하시겠단 말씀이신가요?”

오전에 그에게 받았던 괜찮은 느낌이 점점 소멸되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쿡쿡. 재미있네요. 어디 한 번 해보시죠.”

마르지 않는 웃음기에 성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뭐가 우스운 거지?

“무슨… 자신감이죠? 아니면 자신감 있는 척, 연기라도 하는 건가.”

“왜요? 제가 마성후 씨보다 돈이 없지, 자신감이 없을까 봐서요?”

“그러니까 어째서요?”

“원래 잃을 거 없는 쪽이 대범해질 수 있는 법이니까.”

흠칫 놀란 성후가 이내 시력이 나쁜 사람처럼 눈을 찌푸린다.

오래전 야무지게 입을 놀리던 어떤 소녀와 눈앞의 여자가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또래 같은데…….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훅 들어오는 진지한 물음에 다정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지금 작업 거세요?”

대놓고 드러내는 적대감에 기분이 나쁜 건 성후도 마찬가지였다.

“묻는 말에 대답을 좀.”

“싫어요.”

……빠직.

성후의 속에서 이성이란 끈이 낡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나오시겠단 말이지?

그때였다.

“앞으로 사적인 얘기는 삼가세요. 그리고 이거.”

다정이 약봉지를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두었다.

“오늘 분이고요. 어제와 내용물은 같습니다.”

역시 그녀에게 친절한 설명을 기대할 수 없다.

가차 없이 도도한데 끝까지 미소를 유지하는 저 성정이 미치게 궁금해지는 성후다. 또, 어릴 적 스쳤던 그 소녀를 떠올리게 만들어 더욱 구미가 당겼다.

“위급 시 벨 누르시고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라는 말이 따라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말을 들으며 이제는 무감해진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성후다.

어차피 이놈도 고장 났으니까……

뒤이어 시선을 들고서 다정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내 야릇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린다.

시간도 널널하겠다. 온다정 선생님. 나랑 좀 놉시다?

* * *

“내가 살던 미쿡에서는 말이야~”

고조된 부연의 목소리가 주사실에서 울려 퍼졌다.

“부연 쌤 미국에서 살다 오셨어요?”

신입 간호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머? 내가 말 안 했던가.”

“네, 처음 들어요. 그럼 영어 잘 하시겠어요! 저는 토익 점수 신발 사이즈거든요. 부러워요~!”

두 손을 가득 모으며 찬양하는 투로 말하자, 부연이 삐죽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으며 겸손을 떨었다.

“잘하긴. …어 리를 빗?”

“오우~~! 리를 빗~~ 발음이~~~ 오오~~~!”

쌍 엄지를 치켜세우는 누리. 그리고 부연의 뒤로 다정이 나타났다.

“엇? 온 선생님 오셨어요!”

“흡?!”

느끼지 못했던 인기척에 깜짝 놀란 부연이 찌푸린 얼굴로 뒤를 돌아본다. 이 년은 뭐 이렇게 귀신처럼 나타나??

“내 소문 도는 거, 혹시 들으신 분 있어요?”

“아니. 무슨 소문?”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부연의 눈빛이 도끼병이 있냐고 되레 반문하는 것 같았다. 다정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 남자가 날 놀리려고 한 말이 분명해!

“온 쌤. 1004호에 갔던 거 아니었어?”

“요, 좀 붙입시다.”

가라앉은 다정의 목소리에 괜히 움찔한 부연이 물음을 정정한다.

“아니었어요?”

“갔다 왔어요. 스케줄 확인 다 끝냈어요?”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벌써 다 했죠.”

부연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6-4번 환자 주치의 면담 건은 어떻게 됐어요? 아까 지나가는 말론, 제대로 된 설명을 못 들었다며 보호자께서 매우 분개하셨다고 들었는데.”

다정의 말에 간호사들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 깜빡 잊은 모양이었다.

누리가 팍 기죽은 얼굴로 선배 간호사들 사이에서 슬금슬금 사라졌다. 그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던 부연의 속이 끓었다.

“아니 같은 평간호산데 자꾸 그렇게 감시하듯 몰아붙여야겠어요?”

책망하는 말투에 다정이 묘한 웃음을 흘렸다.

“보호자한테 멱살 잡혀 끌려가는 것보단 저한테 감시받는 게 낫지 않겠어요?”

말이라도 못하면.

모처럼 받은 관심에 주인공 기분을 만끽하고 있던 터라 부연의 얼굴이 불만으로 얼룩졌다.

고요한 주사실- 오직 다정과 부연 두 사람만이 남겨지자 다정이 낮게 한숨을 쉰 뒤 입술을 열었다.

“부연아. 너 창피 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보호자가 욕설을 퍼붓기 시작하면 그 누구도 우리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거… 알잖아. 그럼 그런 일이 없게 해야지.”

걱정하는 말투에 오히려 더 자존심이 상하는 부연이다.

그녀는 입술을 짓이기며 대답했다.

“……알아.”

“쉬고 있어. 내가 주치의 콜 넣을게.”

“됐다니까.”

“되긴 뭐가 돼요?”

그때, 레지던트 태풍이 나타나 활짝 웃었다.

“오셨어요.”

눈물을 찍어내며 자리를 피하는 부연.

다시금 한숨을 내쉬는 다정.

“뭐지. 이 싸한 분위기는.”

“어쩐 일이세요.”

다정이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출근하셨네요. 온 쌤.”

“네.”

“몸은 어때요? 괜찮으세요?”

“보시다시피 아주 멀쩡합니다. 아 그리고 그날은… 고마웠어요. 계 선생님 아니면 복도에서 그대로 쓰러질 뻔했어요.”

“이런 예의 바르신 분. 인사가 너무 빠르신 데요?”

“다음번엔 더욱 예의 발라보도록 하죠.”

딱딱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받아치는 다정이다. 그런 그녀에게 묘한 매력을 느낀 태풍이 씩 웃는다.

“별다른 용건은 없으신 거죠?”

다정이 다시금 물어왔다.

“용건이 있어야 하나요?”

“네. 그렇다면 먼저 가보겠습니다. 바빠서 이만.”

묵례하고 멀어지는 다정의 뒷모습을 눈여겨보는 태풍이다. 도도해. 재미있겠어. …저 여자.

* * *

해야 할 일은 산더민데 머릿속을 지배한 건 일이 아닌 마성후였다. 뒤이어 그의 지독한 저음까지 저를 따라다녔다.

‘할 얘기 다 했습니까?’

지금 이 순간 가장 많이 되풀이되는 장면은 아까 1004호실을 빠져나오기 전 상황이었다.

‘아마도?’

대답하는 순간, 성후가 환자복 단추를 툭 툭 툭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침착하려 애썼지만 잘 안 됐다. 얼굴이 화끈거려 곤란한 와중에 시선이 가선 안 될 곳으로 향했다. 바로 풀어진 환자복 사이에 드러난 성후의 탄탄한 가슴으로. 근육질의 넓은 가슴은 착시인지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옷 갈아입는 거 계속 보고 있을 겁니까?’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서 훌쩍 내려온 성후.

꼭 훔쳐보다 들킨 기분에 깜짝 놀란 다정이 본능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고약한 취미로군요. 원하신다면 기꺼이…’

완전히 상의를 탈의한 성후는 악마 같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벗어드리죠.’

‘꺄악…!’

눈을 질끈 감고 쫓기듯 성후의 방을 빠져나온 다정.

“으으으.”

지금 생각해도,

“분하다! 분해!”

……그랬다.

다정은 비상구로 들어와, 제 머리를 벽에 콩콩 찧었다. 진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문이 어쩌고 말도 안 되는 얘기로 시비를 걸지 않나. 스트립쇼라도 할 작정으로 짓궂게 굴질 않나.

마성후……

마성후!!!

* * *

“……그래서 도합 몇 건이야.”

성후의 눈이 새카맣게 가라앉았다.

“우선 올해 예정만 취소한 것이 38건입니다.”

“…….”

서른여덟 건의 공연이 취소되다니.

서른여덟 번의 환희를 잃은 셈이다.

“껄끄러우실 것 같아 미룬 모임과 취소한 인터뷰, 행사 등 하면 총 128건입니다.”

눈치 없는 척, 평소의 유능한 비서 모습을 유지하는 연석이다.

“그 말인즉슨…”

“올 한 해 스케줄이 텅텅 비었다는 뜻이 되죠.”

이왕 이렇게 된 거 받아들이세요, 형.

“집에서 아무리 막아도 기사가 안 나갈 수가 없겠군.”

“아마 ‘피아니스트 마성후, 집에서 숨 쉰 채 발견’ 등의 어그로성 기사가 제법 나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잠시 내려갔다 올게.”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이다. 연석은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런 연석을 지나쳐, 1004호 병실을 나가는 성후다. 터덜터덜. 말처럼 근육으로 뒤덮인 다리지만, 어쩐지 힘이 없었다.

승강기에 올랐다.

마침 승강기가 텅 비어있어 마음이 더욱 헛헛했다.

재기… 할 수 있을까. 이대로 영영 손을 못 쓰면… 그땐…….

잔혹한 어둠이 스멀스멀 자신을 삼킬 것만 같았다.

“하아…….”

가슴이 답답해진다. 숨도 차고 온몸이 땀으로 젖기 시작했다. 불안은 생각지 않으려 했건만 역시나 잘되지 않는다.

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승강기 문이 열렸다. 차가운 바깥 공기가 절실해 그는 재빨리 걸음을 재촉했다.

“후…….”

병원 밖으로 나와 단조롭게 꾸며진 인공 산책로를 걷기 시작한다. 그러자 잃어버린 산소가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온 듯했다.

그 순간, 2동 건물에서 씩씩거리며 걸어 나오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간호사복을 벗은 사복 차림의 다정이었다.

화이트 진에 흰 티가 꼭 그녀처럼 깨끗한 맛을 느끼게 만들어 주었다. 천상 백의가 잘 어울리는 여자다.

왠지 모르게 반가워 성후의 시선이 기민하게 그녀를 따라붙는다. 눈이 가는 대로 마음도 향했다. 성큼성큼. 발걸음이 빨라진다. 아는 체를 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는 기분. 어서 이 막막한 심정을, 뜨거운 것으로 바꾸고 싶다.

그녀라면 가능할 것 같다. 아니, 가능할 것이다!

때마다 시름을 놓게 만들었으니까. 오직 저 당돌한 표정과 입술에 집중하도록 만들었으니까.

거의 다다랐다.

“온…”

“온다정!”

시원하게 웃으며 다정을 부르는 웬 남자. 그리고 그의 곁에서 꽃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손을 흔드는 또 다른 남자.

…뭐지?

성후는 빠르게 다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매우… 밝다…?

“빨리 와!”

다정이 남자들을 향해 기쁜 얼굴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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