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5화 (5/82)

5화. 전혀, 조금도, 완전! 관심 없어!

“속도 많이 불편했겠는데요?”

“…네, 몇 시간 됐어요.”

기억을 더듬는 다정의 안색이 파리했다.

“둔하시긴. 급성 맹장입니다.”

“맹장… 이요?”

“빨리 수술해야 해요.”

“개복이라니…….”

식은땀에 젖어 겨우겨우 말을 잇는 데 힘에 부쳤다. 그녀에게 전문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설득했다.

“복강경 수술로 가면 돼요. 통증이 적고 회복 기간도 짧은 데다, 한 번에 가르는 게 아니라서 미관상 보기에도 괜찮아요.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년데, 예쁘게 해드리겠습니다.”

소문에 귀 기울이는 편은 아니었지만, 썩 인품이 훌륭한 의사가 아니라는 평을 들었던 적 있었는데 잘못된 소문이었나 보다.

“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얼마 후 그녀는 수술대에 누웠다.

* * *

며칠째, 담당 간호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다. 그때의 입씨름이 다정의 마음을 상하게 했노라, 쉬이 짐작도 되었다.

하지만 그래서 뭐?

건방진 훈계나 늘어놓던 간호사가 사라져 오히려 속이 시원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하려 했다.

그런데 벌써 오 일이나 지나니 슬슬 다정이 눈에 밟히는 성후다.

똑똑.

노크 소리에 흠칫 시선이 문가에 닿는다.

“잘 주무셨어요?”

담당 간호사가 아예 바뀐 건지 며칠째 다른 간호사가 성후를 케어했다. 원래 들어오던 온다정이란 간호사보다 훨씬 싹싹했음에도 어쩐지 정이 안 갔다. 정이 갈 필요도 없지만 말이다.

“네.”

성후의 딱딱한 대답에도 부연이 싱긋 웃었다.

“오늘분 약입니다. 식사하시고 30분 후에 드셔야 해요. 저녁 약은 내용물이 다르니까 확인하시고 드시는 거 잊지 마시고요.”

“같은 설명 매일 반복 안 하셔도 됩니다.”

대답 외에 말수가 적은 성후는 말이 조금이라도 길어진다 싶으면 이렇게 냉랭한 기운을 서슴없이 풍겨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연석이 창가에 선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뾰족하시긴.

부연은 지지 않고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중요한 부분이니까 성가셔도 말씀드리는 게 원칙입니다.”

누구는 그 기본 원칙도, 안내서 하나로 후려치려 하던데.

또, 또!

비교하며 다정을 떠올리고야 말았다. 젠장! 그는 짜증을 꾹 삼키며 말했다.

“전달 내용이 바뀔 때만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그의 눈이 덧붙였다. 일일이 말 섞기 싫다고.

“그것도 좋겠네요.”

아무리 차갑게 굴어도 방긋 웃어대는 부연의 미소가 이해되지 않는 성후다. 허나 익숙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가 무슨 얼굴로 무슨 말을 해도 상대는 늘 웃었다.

여자라면 백이면 백.

아니, 얼마 전에 그 통계가 조금 달라졌다. 차갑게 쏘아붙이던 여자가 한 명 추가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성후의 입술이 열리자 부연이 바짝 귀를 세웠다.

“네?”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살벌한 말투긴 했지만, 특유의 낮고 섹시한 목소리를 계속해서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더 나아가 그와 친밀해지고 싶었다. 수술로 자리를 내어준 다정에겐 미안하지만, 운이 좋았다.

“온다정 간호사는 갑자기 왜 안 보이는 겁니까.”

그의 질문에 맥이 탁 풀렸다.

“아, 온 선생이요?”

부연은 저도 모르게 시큰둥한 반문이 튀어 나갔다. 이내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골랐다.

“입원 중이래요.”

목소리는 상냥하게 꾸몄지만, 말투는 묘했다.

“입원?”

성후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아아. 급성 맹장으로 며칠 전에 수술했거든요.”

수술이라. 문뜩 그녀의 상태가 궁금해졌지만, 다른 질문은 애써 삼켰다.

“그렇군요.”

다정에 대한 주제가 뚝 끊기자 잔잔한 안도감이 밀려오는 부연이다. 늘 보이던 사람의 부재를 그 누구라도 물어볼 법한 평범한 질문이었다. 그 말인즉슨, 딱히 다정에게 여자로서 관심이 있어 던진 물음은 아니라는 뜻이다.

“수액 다 들어가면 벨 누르세요.”

부연의 말에 성후의 눈이 주삿바늘이 꽂힌 손등으로 향했다. 며칠 전 다정에게 꺼지라며 지랄했던 자신의 모습도 따라 떠올랐다.

제정신이 아니었지, 그땐. ……제정신일 수도 없었거니와.

부연이 나가고 연석이 슬쩍 다가왔다.

“신경 쓰이세요?”

“또 뭐가.”

세우던 날이 좀 무뎌지자, 연석이 평소처럼 자신을 대하기 시작했다.

“온다정… 이었던가. 그 미모의 간호사 말이에요.”

“이 내가?”

잔뜩 힘이 들어간 그의 눈이 말했다.

나 마성후 미만은 모두 잡이라고!

“신경이 안 쓰이는데 왜 저 문이 열릴 때마다 죄지은 사람 마냥 움찔움찔하세요?”

“일개 간호사한테 내가 그랬다고?”

……눈치 빠른 새끼.

속으론 알았지만 절대 제 입으로 시인할 수 없는 마음이다.

“착각이야. 난 그 여자한테 전혀, 조금도, 완전! 관심 없어!”

* * *

-오늘 퇴원이지?

“응. 우리 엄마한테 말 안 했지?”

-안 하고말고.

친구 우석의 대답에 다정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제 머리 깎으러 갔었는데, 아주머니가 너희 집에 다녀오셨대. 집이 개판이라고 욕하시더라.

“……너한테 별 얘길 다 하네.”

-그리고 주변에 좋은 남자 없냐고 계속 물어보시던데…….

“나 남자한테 완전 인기 없다 그러지.”

다정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네가 인기가 없는 거냐? 시간이 없는 거지.

농담을 모르는 우석의 말에,

“우석찡…….”

다정이 장난스러운 콧소리를 냈다.

-데리러 갈까?

“괜찮아.”

-…혼자 올 수 있겠어?

“겨우 맹장 수술인데 뭐. 나 이래 봬도 간호사야!”

-그래, 그럼. 무리 말고 쉬어.

우석과 통화를 끝내자마자 곧바로 조급증이 다정을 덮쳤다.

빨리 퇴원해야 하는데…….

자신의 빈자리를 허덕거리며 채우고 있을 다른 간호사들을 생각하니 몹시 마음이 안 좋았다. 입원실에 두루두루 얼굴을 비추던 동료들이 괜찮다는 말로 다정을 안심시키려 들었지만, 괜히 면목이 없었다.

똑똑.

“음?”

올 사람은 다 왔는데… 헉.

“팔자 좋네, 온 선생.”

작은 키를 덮은 하얀 의사 가운. 입가에 걸린 미소조차 께름칙한 이의준.

“어쩐 일로 여기까지….”

짜증이 확 치민다.

더욱이 짜증 나는 건 초췌한 민낯에 헐렁한 환자복을 입고 있는 이런 모습을 저 남자가 본다는 것이다. 초대한 적 없는 불청객은 늘 불쾌한 법이다.

“어쩐 일이긴. 병문안 왔지.”

오늘따라 헤실헤실 웃어대는 통에 다정의 비위가 상했다.

“…퇴원하는 날 굳이?”

“알다시피 의사가 좀 바빠. 이렇게 성의를 표시하면 된 거 아냐? 아, 그리고.”

의준이 손에 들려 있던 선물용 음료 박스를 건넸다. 병원 일 층 편의점에서 덜렁 사 왔음이 분명한 무성의한 허례허식이었다.

“아아, 감사합니다.”

“퇴원하면 쉬엄쉬엄해. 원래 시다가 힘든 법이잖아.”

“……시다?”

“헛. 농담이야, 농담.”

“이만 나가주세요.”

“왜 벌써. 일부러 시간 제법 날 때 온 건데.”

다정이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사모님은 아세요?”

그러자 의준이 움찔한다.

“뭐, 뭘??”

“바쁜 전문의 남편이 귀한 시간을 ‘시다’ 간호사한테 쓴다는 걸요?”

“어허… 이건 그냥 병문안이야. 동료끼리…”

“요즘은 시다바리도 동료라고 칭하나 보죠? 후하시네.”

“그만하지. 내 농담이 지나쳤어.”

“내친김에 말하죠. 이 선생님 과거에 저한테 차였다고 해서 번번이 시비 거는 거, 저 많이 불편해요.”

“어허! 이 사람이 언제 적 이야기를!”

의준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남자가 돼서. 부끄러운 줄 아세요. 그렇게 그릇이 작으셔서 무슨 일을 하시겠어요?”

“온 선생!”

살짝 벌어진 문틈 사이로 두 사람의 말소리가 새어나갔다. 누군가가 듣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한동안 언쟁은 계속되었다.

* * *

“흐응…….”

아닌 척 잡아떼며 고함치는 성후에게,

‘커피 한 잔 사 올게요.’

하고 자리를 떠나온 연석이었다.

그는 간단한 수소문을 통해 다정이 입원했다던 병실을 알아냈고 그녀의 상태가 괜찮은지 잠시 살펴보러 내려왔다.

그런데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차였었단 말이지. 형의 담당 의사가 형의 담당 간호사한테.”

확실히 흥미로운 이야기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의준보다 앞서 그의 진료실을 찾았다. 곧이어 의준이 돌아왔고 먼저 기다리고 있던 연석을 발견한 그가 부랴부랴 자리에 앉았다.

“많이 바쁘신가 보군요.”

다 안다는 듯한 눈빛 앞에 괜히 간이 쪼그라드는 의준이다.

“하하, 그렇죠 뭐. 그런데 무슨 일로…?”

“마성후 환자. 언제 퇴원하면 됩니까.”

“음, 그건 제가 독단적으로 말씀드리기가……. 신경과와 협진이라서 말입니다. 그리고 현재 상태론 어차피 연주를 못 하지 않습니까…?”

딱히 바쁠 것도 없지 않냐는 뉘앙스의 물음에 연석이 돌연 서늘한 얼굴로 의준을 쳐다보았다.

“연주를 못 하면- 계속 병원을 배 불려 줘야 합니까?”

성후라면 필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의 대사를 그대로 옮겨 읊는 연석이었다.

“아, 아닙니다. 그럼 신경과 교수님과 얘기해보고 제가 다시 병실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러세요.”

의준의 방을 나와 복도를 거닐던 연석의 귀에 또 다른 얘기가 꽂혔다. 스치며 지나가는 전공의와 레지던트의 입을 통해서 말이다.

“온다정 간호사 얘기 들었어?”

익숙한 이름이 들리자 연석의 걸음이 느려졌다.

“무슨 얘기요?”

“이번에 맹장 수술했잖아.”

“아 난 또….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 병원에? 온 쌤이 우리 병원 마돈난데.”

“그러니까, 인마!”

전공의의 리액션에 레지던트 얼굴도 솔깃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온다정 쌤 몸매가 끝내준대!”

“에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헐렁한 옷 입고 있어서 다 비슷비슷하더만요.”

“직접 수술한 쌤이 그러던데?”

“말도 안 돼! 그걸 그 쌤이 어떻게 알고. 아니, 그 선생님은 하라는 수술은 안 하고 대체 뭘 하신 거래요? 듣는 제가 다 화끈거리네요!”

그렇게 말하며 레지던트가 먼저 휙 가버렸다.

“야, 얀마! 같이 가!”

떠도는 얘기를 두 건이나 접하게 된 연석이 1004호실 병실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자신의 빈손을 바라보는 성후가 시야에 담겼다.

“…커피는?”

내내 커피를 기다린 건지, 그것을 대신해 얼음물을 마시던 성후의 표정이 설핏 구겨졌다.

“그보다 소문을 하나 들고 왔습니다.”

커피도 사 오지 않은 주제에 뻔뻔하게 입을 여는 연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넓은 아량으로 이야기하라는 수신호를 보내는 성후다. 그리고 아쉬운 마음에 마저 얼음물을 들이켰다.

“온다정 간호사가 이 병원 마돈나인가 보더라고요. 그래서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는 모양인데…”

그 순간.

성후가 바짝 긴장한 낯빛으로 연석을 응시했다.

“지나가다 듣기론 몸매가 그렇게 훌륭하시다는 소문이…”

성후의 입가에서 주륵, 물이 흘러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