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4화 (4/82)
  • 4화. 예민 보스 VS 팩트 깡패

    “허억…!”

    다정이 전화를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에, 전화가 툭 끊겼다.

    “휴우…….”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다시 벨이 울렸다.

    “히이익.”

    이번에는 피해선 안 될 것만 같다.

    “……하이?”

    -하이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중년 여성의 앙칼진 목소리가 다정의 귓바퀴를 날카롭게 훑었다.

    “허헙. 엄마. 손님 없어? 딱 바쁠 시간인데.”

    -비 오잖아.

    “요즘도 비 오는 날 미용실 장사가 안돼? 다 옛말인데 말이야!”

    괜히 흥분한 척 씩씩거려 본다.

    -엄마 걱정 말고 네 걱정이나 해. 퇴근했지?

    “했지!”

    -집에 바로 가?

    “그럼! 딴 길로 안 새고 바로 집에 가! 쉬어야지! 암!”

    그 순간,

    -바로 집에 간다고오?

    늘 그랬듯 엄마가 훅 들어왔다.

    “…….”

    -연애는?

    “…….”

    내리는 건 비요, 들리는 건 엄마의 말소리다. 허허.

    그런 마음으로 버스 정류장에 우뚝 선 다정이 흐린 정신처럼 멍한 얼굴을 했다.

    -너…… 시집갈 생각이 아예 없는 거니?

    그렇지. 그 대사가 빠지면 울 엄마가 아니지.

    “나 이제 겨우 서른이야. 요즘 같은 세상에 서른 살 딸내미한테 시집가라고 재촉하는 엄마가 어디 있어…”

    소녀 같은 구석이 있는 엄마가 혹여 상처라도 받을까 봐, 말끝을 흐리는 다정이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당장 시집가라는 말이 아니잖니?

    다음으로 폭풍 같은 엄마의 말 사태가 쏟아졌다.

    -엄마랑 아빠 죽으면 너 혼자 남잖아. 그러니까 연애라도 하라고.

    “엄마 아빠가 왜 죽어.”

    -넌 병원에 사는 애가 그런 말을 잘도 한다?

    엄마의 말에, 오전부터 수술이 밀리던 환자가 급하게 생각났다.

    몸은 이미 버스에 실렸고 병원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급격히 우울해지는 다정이다.

    -연애라도 해. …응? 너 맨날 그렇게 째깍째깍 집으로 칼퇴근하면 이젠, 진짜! 엄마가 나설 거야!

    대꾸만 꾸역꾸역하는데도, 엄마의 통화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수없이 오르락내리락했던 계단보다 버거운 것이 엄마의 잔소리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자 흐리멍덩했던 다정의 표정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지금부터 소중한 휴식을 방해할 권리는 엄마래도 허용할 수 없다.

    “남친 생기면 첫 빠따로 엄마한테 말해줄게.”

    -정말이지?

    “당연하지. 어떤 놈인지 알기도 전에…”

    -일단 사귀고 봐.

    “고럼! 막 사귀고 볼게! 그럼 나 쉬어요~”

    -그래, 우리 예쁜 딸. 오늘도 고생했어. 엄마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애정 표현이 몹시 늦었사옵니다, 어마마마.

    “물론~ 나도 사랑……”

    -앗, 어서 오세요! 야, 끊어라, 끊어. 손님.

    뚝.

    매정하게 끊긴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음을 짓는 다정이다.

    홀로 사는 빌라여서 높은 층을 덜컥 계약한 바람에, 집까지 오는 길도 고행이었다. 통유리 앞에 딱 달라붙어 있는 침대가 다정에게 강렬한 유혹을 뻗쳤지만,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현관 입구에서부터 허물을 벗듯 옷으로 길을 내며, 욕실로 들어섰다.

    곧이어 눅진하게 달라붙어 있는 피로를 뜨거운 물에 모두 씻어냈다. 터진 스커트를 기우고, 맥주를 한 잔 마신 뒤 침대에 뻗었다.

    “으허헉…… 기절하겠네.”

    수마가 우르르 다정을 덮쳐왔다. 대뜸 성후의 얼굴이 떠올랐다.

    “……포컬 디스토니아?”

    그깟 피아노, 못 칠 수도 있지. 중환자실에서 오늘도 죽어가는 환자가 몇 명이나 되었을 텐데. 응급실 상황은 어떻고? 다리가 자동차 바퀴에 말린 사람, 눈에 젓가락이 푹 찔려 온 아이, 온몸에 전신 화상을 입은 여학생.

    피아노가 대수야?

    애써 치부하려 했건만 마음 한편은 물먹은 솜처럼 점점 더 무거워져만 갔다.

    벌떡!

    다정은 강력한 수마마저 물리치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들어 포털 사이트를 열었다.

    “피… 아… 니… 스… 트… 마… 성… 후….”

    그에 대한 정보가 인터넷 화면을 가득 메웠다.

    인물 정보에 등록되어있음은 물론이거니와 막 오늘 아침까지 뜬 기사와 사진, 그리고 블로그, 카페 게시판 등. 완전 대스타였다. 그를 찬양하는 극성스러운 팬들부터 시작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기사까지.

    새삼 세상과 척지고 살았음을 깨달은 다정이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그가 얼마나 대단한 피아니스트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고 그래서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정은 수많은 정보 중, 유튜브 동영상을 하나 재생시켰다.

    눈을 꼭 감은 채 현란하게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성후. 도입부에선 옥구슬을 만지듯 섬세하게 연주를 하다가 절정으로 치닫자 피아노를 부실 듯 과격하게 내리쳤다. 야만적이면서도 이지적인 모습에 다정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심지어 핸드폰 스피커를 통해 듣는 음악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아름답게 들리다니. 가히 환상적이다. 가녀린 팔 위론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완전히 홀려 끝까지 경청했다.

    “이건 뭐…… 완전 어나더 클래스잖아……?”

    감탄도 잠시. 저도 모르게 하관을 가리는 다정의 얼굴은 몹시 심각했다. 덩달아 천재 피아니스트의 암담한 미래가 온몸으로 체감되었다.

    * * *

    처참하게 조각난 화분, 깨진 텔레비전, 뜯어진 커튼, 휘어진 냉장고 문짝 그리고 씩씩거리는 성후.

    “……으아아악!!”

    잠시간 멈췄다 싶더니 다시금 그의 난폭한 행동이 이어졌다.

    마치 침대가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듯 발길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의료진들은 숨소리 하나 못 내고 그의 분노를 바라만 보았다.

    그때, 연석이 그들을 끌고 나와 조용히 말했다.

    “추후에 손해배상 청구하세요.”

    그 고용주의 그 비서답게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는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그래서인지 연석도 마치 <가르니크>의 일가처럼 느껴졌다. 의료진들은 역시 그 무슨 말도 하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침착하게 말했지만, 연석의 마음 역시 좋지 못했다. 이럴 때일수록 자신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생각을 겨우 할 뿐이었다.

    “…형.”

    오래전 성후를 졸졸 쫓아다니던 동생으로 돌아온 연석이 성후를 불렀다. 핏발이 잔뜩 선 성후의 눈이 무섭게 연석에게로 향했다.

    “제가 알아봤는데 치료된 전례가 있었습니다.”

    애초에 국소성 이긴장증이 아니라는 설도 따라 들렸지만 상관없었다. 미약해도 그것이 희망이 된다면.

    “희박하다는 거……”

    한껏 예민해진 성후의 목소리가 조용한 밤하늘에 울리는 휘파람처럼 날카롭게 들렸다.

    “몰라서 하는 말이야?”

    가잖은 위로 따윈 집어치우란 뜻이었다. 연석은 또렷한 눈으로 성후를 직시했다.

    “형이 가는 길은 늘 희박했잖아요.”

    무너지는 성후를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바닥으로 가라앉는다면, 기어이 바닥까지 따라가 그를 끌고 올라올 작정이었다.

    “이건 경우가 달라.”

    성후가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곧이어 그의 입술이 선명한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의 폭주는 만 하루를 가득 채웠다.

    다음 날.

    “아직 나른하시죠?”

    온갖 내시경을 다 받은 성후가 서서히 눈을 뜨자,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사로잡았다. 마치 오랫동안 알았던 것처럼 어떤 향수를 일으키는 목소리였다.

    그가 느리게 시선을 돌리자, 어제와 똑같은 모습의 다정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른하실 거예요. 피곤하시면 더 주무셔도 됩니다.”

    그녀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천재 피아니스트의 몰락을 지켜보는 마음이 쓰렸지만 어쭙잖은 싸구려 위로는 삼갔다. 그건 그 나름대로 잔인할 테니 말이다. 특히 자기애가 하늘을 찌르는 이런 남자에게는.

    “……꺼져.”

    움찔.

    기분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는 명백히 선을 넘었다.

    “입조심 하세요.”

    성후의 싸늘하게 식은 동공과 담담한 다정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밀랍인형처럼 표정이 없는 그가 더디게 입술을 열었다.

    “……너나 그 입 다물고 나가.”

    왜인지 감정을 건드리는 다정의 목소리가 지금은 무척이나 듣기 싫은 성후다.

    눈물이 뭔지 잊고 살았던 그였는데, 꼭 북받쳐 아이처럼 울어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정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꾹 참았다. 그렇게 며칠을 흘려보냈다.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를 가르며 묵묵히 성후의 케어를 맡아왔다.

    그가 빈껍데기처럼 굴어도 그녀는 태연해야만 했다. 그것이 다정의 의무이자 최선이었다.

    “수액 들어갑니다.”

    축 처진 손을 잡아당기자, 성후가 거칠게 손을 뿌리쳤다.

    “손 주세요.”

    “나가.”

    다정의 목젖 아래로 신음이 끓었다. 간호사는 그녀의 본 직업, 두 번째 직업은 감정 쓰레기통 되시겠다.

    하여 익숙한 상황인데도 그의 병명의 심각성을 날마다 잊어가는 그녀다.

    왜냐? 이 사람은 죽지 않으니까. 이 사람에겐 내일도 있을 테니까. 이 사람은 잘생겼고, 듣기론 엄청난 재벌의 아들이라고도 하니까.

    다정이 성후의 절망에 공감하기엔 그가 가진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적당히 하세요.”

    죽는 것도 아닌데 애처럼 징징대지 말라는 말이 다정의 목구멍에 겨우 걸렸다.

    “…?”

    한동안 그녀를 투명인간 취급하던 성후가 오랜만에 시선을 들어 다정을 쳐다보았다. 눈빛은 날카롭고 얼굴은 수척했다.

    “이 병원에 당장 내일이 없는 환자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세요? 지금 마성후 씨,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는 꼴이라고요.”

    “뭐…?”

    심장이 갈가리 찢기고 비틀리는 고통으로 며칠을 앓았던 성후다. 그래서 담당 간호사에게 들었던 말이 무척이나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그쪽은 안 죽어요. …안 죽는다구요!”

    어디선가 들어본 바 있는 말인 것만 같다. 아니면 들었던 목소리. 그도 아니면 겪었던 상황.

    그러나, 기억엔 없다.

    성후는 그녀가 지금 당돌한 척하는 것이 분명하다 치부했다. 아니꼬운데 무기력하다. 그가 낮게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돌린다. 대놓고 무시하는 성후의 뒤통수가 말했다.

    너는 지껄여라. 나는 씹는다.

    다정은 울컥하는 감정을 애써 추슬렀다. 그 속엔 형언할 수 없는 후회와 동정이 어지럽게 혼재되어 있었다.

    “…수액은 이따가 맞죠.”

    오전부터 이상했는데 오른쪽 배에 둔중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 때문이리라. 환자에게 해선 안 될 말을 쏟아 낸 이유가.

    통증의 강도는 점점 세지고 있었다. 다정은 식은땀을 흘리며 성후의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찰나의 순간, 성후의 눈에 기워진 다정의 스커트가 들어왔다.

    * * *

    전공의가 과로로 숨졌다는 뉴스가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태풍이다.

    밤새 당직을 하고 오늘 오후 여섯 시까지 또 근무하기로 되어있는 미친 업무량에 그는 곧 질식할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당직, 당직, 당직…!”

    여가는 물론 편하게 먹는 식사도, 잠도,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빼앗기고 살아간 지 어언 2년째. 그중에 가장 힘이든 건 남자라면 역시 외로움이다. 병원 안에서라도 애인을 만들든가 해야지.

    피로와 스트레스에 억눌린 태풍이 성큼성큼 거칠게 병원 복도를 걷고 있는데, 단정한 뒤태 미인이 눈에 들어왔다. 흔한 정복 차림일 뿐인데 간호사의 몸매가 몹시도 훌륭하다.

    누구지? 우리 병원에 저런 사람이 있었나?

    “저기 선생님?”

    미인의 등을 따르며 호명하는 태풍이다.

    “…저기요?”

    잠깐 멈추는가 했더니 이내 휘청거리는 간호사.

    “어, 어?!”

    태풍은 깜짝 놀라 간호사를 부축했다.

    제 품에 쓰러지듯 기댄 채 희미하게 눈을 찌푸리는 사람은 바로 정형외과 병동 간호사, 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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