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암초와 부딪힌 현생
“우선 이것부터 받으시고요.”
1004호 병실로 들어온 다정과 성후.
다정은 입원 수칙이 기재 된 안내판을 성후에게 내밀었다. 성후는 성의 없이 그것을 한 손으로 받아 들며 VVIP 병실 안을 눈으로 훑는다.
은은한 간접 조명 아래, 킹사이즈 침대, 협탁, 벽 스탠드, 금색의 안마 의자, 100인치의 텔레비전, 감성적인 스메그 냉장고, 원목과 대리석 조합으로 꾸며놓은 작은 주방, 공기 청정기, 잎이 널따란 금전수, 수 권의 책이 꽂힌 책장, 자동 커튼 너머로는 테라스와 고풍스러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자세한 상황은 거기에 나와 있으니까 참고하시면 됩니다.”
고운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무성의함에 성후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더 궁금하신 사항 있으신지요?”
“명색이 VVIP 병실인데, 제 눈으로 안내서를 꼼꼼히 읽어 내려가야겠습니까? 누가 또박또박 읊어주면 좋겠는데.”
성후의 말에 다정이 입을 꾹 다물고 생긋 웃는다.
하지만 은밀히 어금니를 꽉 깨물고서 마음으로 그를 노려본다.
이놈 봐라? 저 쌩 양아치를 어떡하면 좋지…?
“죄송한데 여기는 호텔이 아니라서요.”
“입원 수칙 정도는 간호사의 입을 통해 듣는 거로 알고 있는데.”
그가 개의치 않고 삐딱하게 말하자 다정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주세요.”
그 위로 제 손을 척 올리는 성후다. 그러자 다정이 싸늘한 얼굴로 성후가 눈으로 물었다. 그럼 뭐?
“입원 수칙서요. 달라고요. 또박, 또박, 읊어드릴 테니까.”
“아.”
그는 무감한 얼굴로 손을 거두었고 다정은 받아든 입원 수칙서에 기재된 수칙을 딱딱하게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1번. 병원 내에서 취사는 금물입니다. 식사는 따로 신청하신…”
“이의 있습니다.”
“…이의요?”
다정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지금 이 남자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어서 정형외과 병동으로 건너가 신입 간호사를 가르치고 위급 환자 수술 건도 재촉해야 하는데.
“네. 취사가 안 되는데 어째서 이 방에 주방이 있는 겁니까?”
그의 가느다란 눈이 힐끔 주방을 가리켰다.
“아 저거는…”
폼이에요! 개폼! 당신 같은 상전들 보기에 좋으라고!
다정은 속마음과 달리 고아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과일을 손질하거나, 음료를 제조하는 등, 불로 조리하지 않고 만들 수 있는 음식은 만들어 드셔도 됩니다.”
이런 식으로, 조항 하나하나마다 그에게 태클이 걸렸다.
마지막 ‘제9번’을 불렀을 땐 다정의 정수리에서 분노가 찰랑거렸다. 곧 범람할 듯 가득도 찼다.
“……이제 됐죠?”
턱 끝까지 찬 숨을 삼키고서 그녀가 말했고 성후는 대답 대신 턱짓했다.
“그럼 위급한 일 생기시면 여기 이 벨 누르시고요.”
이제는 귀찮은 파리 취급을 하듯 나가라는 손짓을 하는 성후다. 허, 기가 막혔다.
“그럼 쉬세요.”
다정 역시 ‘업무’를 끝냈으니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 곧은 등에 자연스레 성후의 시선이 닿았다.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보고 싶은 것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빤히 쳐다보았다. 깨끗한 폼으로 걷는 간호사의 뒤태가 꽤나 정갈하게 느껴졌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바지보단 치마가 낫군.
기억 속에 뿌리박힌 새하얀 다리가 볼품없는 바지 속에 감춰져 있다니. 실로 아까운 일이다.
다정이 나가며, 동시에 연석이 들어섰다.
성후의 기침 소리 하나에도 어떤 질병인지 파악하는 유능한 비서가 그의 묘한 눈빛을 놓쳤을 리 없다.
“관심 있으십니까?”
성후가 희미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관심?”
태어나 처음 듣는 단어라도 되듯이 그 의미를 곱씹어본다.
“네. 아까부터 저 간호사 다리만 쳐다보고 있잖습니까. 아. 히프였나요?”
연석의 혀가 미끄러지듯 ‘히프’란 단어에 힘을 주었다.
“이 새끼가. 날 뭐로 보고.”
“왜 발끈하세요? 드디어 남자로 보이는데. 그 전까진 하도 여자한테 관심을 안 보이셔서 설마설마했습니다.”
연석의 말뜻을 이해한 성후가 단박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냥 바지보단 치마가 낫다고 생각했어.”
“모든 건 그런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법이죠.”
“헛소리할 거면 꺼져.”
그 누구도 감히 성후의 신경을 건드릴 수 없지만,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연석 특유의 깐족거림은 성후의 성질이 죽지 않도록 꽤 자주 긁어 주었다.
성후의 으름장에 연석이 뻔뻔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어요. 이 근처에 불고기 맛집이 있더라고요. 역시 한국 하면 불고기라는 걸 통감했습니다. 정말 끝내줬어요. 그런데 그 맛있는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걸 잊었지 뭡니까? 세상에. 어서 가서 한 잔 들이켜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뱉는 말 족족 성후의 신경을 건드렸다. 아무것도 안 들리는 사람처럼 팔짱을 끼고 눈을 질끈 감는다.
입 닥치고 일하면 월급을 두 배로 준다고 할까.
계산이 끝나지 않았는데, 다시금 연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쫄쫄 굶고 있는 고용주 앞에 불고기에 이어 커피까지 마시러 가는 비서… 새끼라. 하아…….
때마침 볼품없이 꼬르륵하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젠장.”
납작하면서도 단단한 배를 쓸어내리는데 오른쪽 약지와 소지가 접히지 않고 뻣뻣한 느낌이 들었다. 이내 미세한 경련이 인다.
성후는 펼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지?
아무것도 아니라며 다시 자기 세뇌를 다지고 싶지만 방심했을 때 닥친 불안을 떨쳐내기란 쉽지가 않았다.
* * *
자신이 없던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차트를 통해 확인하고 있는 다정에게 부연이 다가왔다.
“또 차출됐다며?”
입매가 독특하게 뒤집힌 것으로 보아 부연의 심사가 뒤틀린 모양이었다.
다정의 눈은 차트에, 입술은 차갑게 움직였다.
“관심 끄시죠, 신 선생은.”
부연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바짝 다가와 제 말만 이어갔다.
“아니, 그 기준이 뭐래? 너무 궁금하다! 너 혹시 윗선에 백이라도 있냐?”
기운이 탁 빠진다.
드디어 다정의 시선이 부연에게로 향했다.
“VVIP 병동에 가면 대체 뭐가 좋은 건데? 인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멀어서 가기만 더 힘들지.”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오르락내리락했던 수많은 계단이 다정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아. 좋은 거 하나 있네. 살이 절대로 안 찌겠다는 것!
“아 왜 내숭이야~. 부자들을 실컷 볼 수 있잖아. 우리 좀 솔직해지자! 간호사들이 간호사가 되는 이유가 뭔데? 봉사 정신? 아니잖아~. 요즘은 다 시집 잘 가기 위한 발판에 불과하다고.”
“부탁인데 제발 어디 가서 그 얘기 떠들지 마라.”
“어? 온 선생님 오셨어요?”
그때 하나둘 간호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정은 빙긋 웃는 낯으로 그들을 맞았다.
“고생들이 많죠?”
부연을 제외한 동료들에게 늘 마음이 쓰이는 다정이다.
“아니에요. 차출되셨다면서요. 좀 편하게 계시지, 뭐 하러 병동에 내려오셨어요.”
“일이 넘쳐나는데 어떻게 저 혼자 편안하여요. 하하.”
“역시. 열의만큼은 온 선생님을 따를 자가 없다니까요.”
“맞아요.”
타 간호사들의 말에 부연이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오! 다들 점심 드셨습니까.”
“꺅! 계 선생님!”
브이라인의 곱상한 얼굴과 호리호리한 체형에 걸쳐진 의사가운. 키는 그리 크지 않지만, 이 정도면 은명 대학병원의 아이돌로 불리기엔 충분한 레지던트 2년 차, 계태풍이 등장했다.
“환자분들 앓는 소리만 듣다가 간호사 선생님들 밝은 목소리 들으니 막 힘이 불끈불끈 나는데요?”
느끼한 멘트를 아무렇지 않게 날리며 씩 웃기까지.
간호사들은 ‘어쩜……’하는 얼굴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참 오늘 1004호에 환자 입원했다면서요?”
“아휴, 말도 마세요. 글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면……”
한 간호사의 입에서 빌어먹을 환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려 하자, 다정은 자리를 비켰다. 온몸이 거부했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환자들 케어를 위해, 순례를 나섰다.
* * *
병원 고위 관계자들이 모조리 1004호에 모여 있었다.
어느새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성후가 편안히 침대에 앉아 그들을 응시했다. 한 의료진의 입이 열렸다.
“저… 좀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마성후 님의 병명이 건초염이 아닌 듯싶습니다.”
공정했던 시선이 일그러졌다. 듣고도 이해를 못 했다는 표정까지. 그 바람에 모두가 경직되었다.
“더 확실히 알기 위해선 뇌 영상촬영과 혈액 검사가 필요해 보입니다.”
가장 권위 있는 신경과 교수가 겨우 말했다.
성후는 새카맣게 번뜩이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알아듣게 설명하세요.”
평이한 목소린데도 소름이 끼쳤다. 고위직과 의료진들의 등이 절로 굽어졌다.
“지금 의심되는 병은 포컬 디스토니아로…… 일명 국소성 이긴장증으로 보입니다. 주로 손을 많이 쓰시는 작가나, 연주자 등에게 나타나는 질병인데…”
“…맞다면, 고칠 수 있습니까.”
순간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한다.
“묻잖습니까. 고칠 수 있냐고.”
설마설마했다.
악명을 익히 들어봤던 병이다. 허나, 겪어본 바 없었고 그 끔찍한 병이 제게 올 리가 없다고 애써 외면했었다. 생각이 떠오르려고 하면 꾹 누르길 미친 듯이 반복한 것이다.
“그, 그게 현재로선 난치병으로 분류되고 있기는 하나 현대 의학이 발전한 만큼 의료진과 함께 최선을 다해 노력하다 보면…”
“고칠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노력 말고 확신!”
그의 고함에 공기가 와장창 깨졌다.
“그러니까 최선을……”
도도리표 같은 대답에 성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갑자기 귀가 먹먹해지고 숨이 차오른다. 시야도 흐려지는 듯하더니 이내 이성도 휘발되었다.
* * *
“…비 오네.”
처연한 회색과 새카만 밤이 버무려진 하늘. 그 위에서 뚝뚝, 두꺼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산이 있던가.”
캐비닛 구석에 굴러다니던 작은 우산을 보았던 것도 같아, 다정은 몸을 돌렸다.
다시 지겨운 계단을 밟고 정형외과 병동에 들어서자, 간호사들이 수군거리는 게 보였다. 시간만 남으면 참새처럼 모여 떠드는 것이 퍽 귀엽게 느껴졌다.
그녀는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괜히 연차 높은 자신의 눈치를 보게끔 하고 싶지가 않았다.
“마성후 환자 말이야…”
…윽. 또 그놈의 얘기라니.
두 귀가 뚫려 있어 이번엔 피할 수 없이 그의 이야기가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검사 결과 나왔는데 포컬 디스토니아래.”
“헐? 진짜?”
으흠 그렇구나.
대학병원엔 꺼져가는 목숨을 붙잡고 싸우는 이들로 넘쳐난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마성후 환자의 병명은 사소하게만 느껴졌다. 문제는 다음이다. 다시 들려오는 그의 얘기가 단숨에 다정의 머리를 하얗게 표백했다.
“어떡하냐…… 천재 피아니스트가…….”
피아니스트? 그 남자가, 피아니스트였어?
그렇다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다정은 다시 병동으로 돌아온 이유를 까맣게 잊고서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니까. 난치병이잖아, 그것도. 손가락이 말을 안 듣는데 피아노를 어떻게 쳐. 완전히 끝났다고 봐야지.”
“불쌍하다….”
“쯧, 하늘도 무심하지.”
다정은 몸을 돌려 다시 병원 입구로 내려갔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계단에 시달려서인지, 충격적인 소식을 들어서인지 알 길이 없다.
피아니스트에게 그 병은…… 사실상 죽으란 소리가 아닌가. 목숨과 직결된 건 아니지만 영혼과는 직결된 병인 것 같은데…….
가늘어진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헌데 비가 온다는 사실 자체도 인식되지 않았다. 늘 그랬듯, 자신의 환자에게 과몰입이 되어서였다. 적당히 냉정해야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단 걸 알면서도, 천성은 어쩔 수가 없다.
그때 우렁찬 벨소리가 문뜩, 그녀를 현실로 데려왔다. 발신자를 확인하기 전에 소름이 먼저 돋았다. 불길했다. 핸드폰 발신인을 확인한 다정의 얼굴도 확연히 침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