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그 환자의 외설적 취향
스쳐 지나간 낯선 남자의 눈빛에 다정은 온몸을 수치로 떨었다.
뭐야, 저 변태 새끼는.
그리고 자동으로 그의 눈길이 머물렀던 자리에 자신의 시선도 내려뜨린다.
헉!
“갑자기 왜 벙어리가 됐어?? 아무튼 그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다정의 사고가 잠시 멈춘 순간, 교수는 때를 놓치지 않고 자리에서 달아났다. 이어 다정도 붉어진 얼굴로 자리를 등졌다. 얼른 간호사 탈의실로 돌아와 정복을, 활동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래. 이편이 낫지.”
스커트 차림의 정복에 비해 고무 바지와 헐렁한 상의로 되어있는 활동복은 부족함 없이 편안했다.
“그나저나…”
아까 그 남자…… 외래 환자인 걸까? 되도록 마주치지 말아야겠어!
다시 떠오르는 남자의 길고 가는 노골적 눈빛.
으으으!
몸이 부르르 떨려오는 다정이다.
그때, 다정의 핸드폰이 진동으로 떨렸다. 수간호사였다.
“네, 선생님.”
-지금 수간호사 실로 좀 내려올래?
“바로 가겠습니다.”
다정은 바삐 몸을 움직였다.
* * *
똑똑.
“네-.”
짤막한 대답에 수간호사실 문고리를 내리는 다정이다.
문틈 사이로 다정이 들어오는 것을 발견한 수간호사 정희의 눈이 착 가라앉는다. 저 눈은 필시 시름을 앓은 눈이다.
“부르셨어요.”
“다정아. 너 또 차출됐어…….”
단박에 정희의 말을 알아들은 다정의 얼굴이 흐려진다.
“몇 호실인데요?”
“1004호.”
‘1004호’라면 VVIP 병실 중에서도 최상 병실로 분류되는 방이었다.
다정은 지금처럼 종종 VVIP 전담 간호사로 차출되었는데, 그녀는 그것을 몹시 싫어했다.
정형외과 병동은 2동, VVIP 병동은 4동의 10층으로 거리도 거리지만 무엇보다 위급 환자가 입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병동이었기 때문이었다.
해서 정신없이 바쁜 일반 병동 업무를 등지고 돈 많고 허영에 찬 사람들을 돌보러 가야 하는 길은 다정에겐 고역이나 다름없었다.
“팀장님 죄송한데 다른 간호사 보내면 안 될까요?”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달리 생각해보면 VVIP 케어 업무는 널널해서, VVIP 병동에 차출되길 소망하는 간호사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려울 것 같아.”
“신규 쌤도 가르쳐야 하고, 캐스트, 투약, 타과 협진 조정 등 할 게 넘쳐난다고요. 무엇 보다…”
그녀는 범법자라는 이유로 수술이 미뤄지고 있는 음주 운전 환자를 떠올리며 신음을 삼켰다.
“케어가 시급한 환자도 있고요.”
이대로 차출된다면 음주 운전 환자의 신경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다정의 애가 새카맣게 타들어 간다.
“병동에 간호사가 너뿐인 건 아니잖니.”
직업 정신이 투철한 다정이 이해되어, 이렇게 어르는 자신이 미워지는 정희다. 그리고 미안했다.
다정의 노련한 업무 처리 능력과 완벽한 환자 대응 능력, 거기에 전형적으로 간호사답게 생긴 외모까지.
뭐 하나 빠지는 거 없이 두루두루 갖춘 그녀를 때마다 VVIP 병동으로 차출시키는 윗선의 처우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정의 입이 다시금 애원 조로 열렸을 때,
“팀장님…….”
수간호사실 전화벨이 울렸다.
늘 똑같은 전화벨 소린데, 어쩐지 다그치듯 앙칼진 소리처럼 들렸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정희는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는데 상대방은 난데없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왜 전담 간호사 안 보냅니까?! 그냥 병실도 아니고, 1004호라고요, 1004호!
벼락같은 고함이어서 다정의 귀에까지 희미하게 전달되었다.
“그게 잠시…”
-잠시?? 잠시요?!!
그 순간, 다정이 다가가 전화기 마이크 부분을 손으로 꾹 막았다. 그리고 정희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갈게요.”
버틴다고 버텨지지 않을 텐데. 괜한 반항으로 정희를 곤란하게 만든 것 같아서 미안한 기색이었다. 그런 다정이 안타깝고 또 고마운 정희다.
수간호사 실을 나와, 다정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가자, 가.”
다 월급 받고 하는 일인데. 환자를 차별하는 건 어쩌면 자신인지도 모른다는 기적의 자기 세뇌를 해본다.
물론 잘 되진 않는다.
승강기 앞에서 움찔한 다정이 잠시간 그것을 노려보다 비상구로 발길을 돌렸다.
심각하진 않지만, 폐소공포증을 앓고 있는 그녀는 웬만해선 승강기를 이용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따라서 오늘처럼 VVIP 병동인 4동 10층으로 향하는 날이면 퇴근과 동시에 기절을 감수해야만 했다.
* * *
가까스로, 정말 가까스로 VVIP 병동 비상구를 열어젖히자 그녀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전문의 의준이 보였다. 전형적인 모범생 외모의 그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채였다.
다정은 애써 당당하게 서 있었지만, 속으론 움찔했다.
어느새 완전히 다가온 의준이 도끼눈으로 찍듯이 다정을 응시했다. 눈높이가 비슷하다는 게 이럴 땐 참 곤욕이다. 슬금슬금 발을 옮기는데 완강하게 닫혀버린 비상구 문에 등이 닿아버렸다.
“차출 연락, 언제 받았어요?”
그가 정색하고서 다짜고짜 심문을 펼쳤다.
“조금 됐습니다.”
“조금? 그러니까 그 조금이 언제쯤이었느냐고요.”
“삼십 분 전쯤?”
몇 번의 반항 끝에 무수한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데 걸린 시간이 체감상 그 정도 걸린 것 같았다.
“아니, 삼십 분이나 늦었는데 왜 이렇게 당당한 거지? 당최 그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네.”
의준의 입에서 가시 같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속으론 쾌재를 불렀다.
얼마 전 유부남이 된 의준은 사실 오래전 다정에게 고백했다 차인 적이 있었다. 의사라면 사족을 못 쓰는 여성에게 차인 건 생의 처음이었고 유일한 흑역사로 기록되었다. 하필 그 상대가 같은 과 간호사라니. 다정과 툭하면 마주치는 일상은 의준에겐 고역이나 다름없었다.
그날의 치욕스러운 기억이 강물처럼 쏟아졌다.
‘널 좋아해. 사귀고 싶어. 우리 만나보자.’
‘싫어요.’
다정의 거절은 단칼이었다.
‘…내가 부담스럽나.’
‘아니요?’
‘그럼?’
튕기는 건가 생각하며 귀엽게 봐주려던 찰나,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대꾸가 돌아왔다.
‘죄송한데 촌스러우세요, 너무. 나이도 많고, 너무.’
생각도 아닌 말로 또박또박 발음하는 그 요망한 입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다음부턴 저보다 잽싼 간호사를 불러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정이 생글 웃으며 반론했다.
거짓이래도, 태연한 미소 앞에 의준의 속에서 오기가 생겼다. 웃어?
“윗선에서 내려오는 지신데 난들 어쩌겠나?”
“네. 그래서 저도 내려왔습니다. 안 오고 싶었지만 전들 어쩔 방도가 없어서 말이에요.”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건가.”
“그럴 리가요. 지금 급한 상황 아니었나요? 저희 이렇게 서 있을 시간이… 있었던가요?”
“온 선생!”
그가 소리치자, 적지만 오가는 행인들의 시선이 대놓고 그들을 훑어보았다.
“네?”
다정은 조금도 밀리는 기색 없이 의준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다.
까려면 아무도 없는 데서 좀 까라, 이 졸렬한 놈아.
그 순간, 1004호 병실에서 사람의 인영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저가 맡을 환자의 방이라서, 자동으로 눈이 환자에게로 향했다.
아직 환자복을 입지 않은 커다란 그림자는 언뜻 보기에도 낯이 익었다. 다정의 미간이 좁아진다.
“내 말은 좀 더 의식을 가지고 일하자는 겁니다. 네?”
의준이 짖어대는 소린 귓가에 닿기도 전에 부서졌다. 의문 섞인 다정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의준도 몸을 돌려 쳐다보았다.
…저벅저벅.
흰 셔츠에 청바지가 단데, 흡사 일류 모델 포스를 뽐내며 다가오는 자는 자신의 담당 환자, 마성후였다.
심신이 미약한 선배 전문의가 수술이 밀렸다는 핑계로 자신에게 넘긴 환자였다. 기회라 여긴 의준은 선배의 부탁을 냉큼 수락했었다. 뛰어나지도 않은 수술 실력으로 수술방에 사는 것보다, 화려한 인맥을 구축하는 것이 훨씬 나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저분이 여길 왜…?
난감한 마음도 잠시.
다가온 성후와 다정이 묘한 눈빛을 교환한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 의준의 눈이 점점 커졌다.
설마 둘이 아는 사이? 일개 간호사가 <가르니크> 아들을? 아니면 유명 피아니스트라서?
후자라고 결론을 내리려던 찰나, 다시금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마성후 표정은 왜 저래??
그때, 완전히 다가온 성후가 의준의 뒤로 서자, 머리 위로 큰 그림자가 졌다. 여러모로 굴욕적이다.
“아무리 터져도…”
높은 곳에서 성후의 저음이 들려왔다.
“스커트가 잘 어울리는데 말입니다.”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지만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 것 정돈 가늠할 수 있는 의준이었다.
그것도 터진 스커트라.
의준이 제 입을 흡 하고 틀어막았다.
“치마 기우면 다시 입고 올게요.”
친절하나 사무적인 미소로 답하는 다정이다. 영혼 없는 미소엔 분명히 선을 긋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묻어났다. 그래서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안 기워도 되는데.”
그녀의 철벽에 찬물을 확 끼얹는 성후의 목소리.
“네?”
“내가 좀… 외설적인 것을 추구하는 놈이라.”
그의 말에 경악으로 얼어붙은 것은 다름 아닌 의준이었다.
“그런데 선생님?”
성후의 시선이 드디어 의준에게 머물렀다. 눈을 과하게 까내려야 마주치는 시선이 또 한 번 굴욕적이다.
“네, 넵.”
“저희 대화 다 듣고 계실 겁니까? 보다시피- 이 분과 할 얘기가 있는데.”
“아아, 네, 그럼 먼저 병실에 가 있겠습니다.”
“아니요.”
딱 잘라 말하는 성후의 말에, 찔리기라도 한 듯 움찔하는 의준이다.
“금식만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이해했으니 그만 선생님 볼일 보시죠.”
“…아. 예, 그럼 쉬세요.”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과하게 숙인 의준이 아차 싶어 몸을 똑바로 세운다. 그리고 도망치듯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무슨 의돈가요.”
분명 오전에 처음 봤던 남자다.
아까는 얼핏 봐서 몰랐지만, 양아치처럼 도발적인 눈빛에 딱 어울리는 시건방진 표정이 심히 거슬린다. 아마 또 어느 재벌의 몇 번째 망나니 아들쯤 되는가 보다 하고 속단하는 다정이다.
순식간에 차가워진 다정의 표정에 성후는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
“무슨 의도가 있어야 했나.”
떠보듯 던지는 말에 거부감이 들었다. 그녀의 미간이 희미하게 모인다.
운 좋게 물고 태어난 금수저 때문인지, 아니면 드물게 빼어난 용모 때문인지 몰라도 자신이 싫어하는 유의 인간이라는 점은 확실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그것이 다정의 지론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비친 마성후는 타인을 우습게 여기는 오만방자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몸에 밴 습관과도 같은 예의도 차리기가 힘들어졌다.
다정이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침잠한 눈으로 성후를 올려다본다.
그 눈빛이 시사하는 바를 눈치챈 성후가 속으로 웃었다.
“시끄러워 그랬습니다.”
드센 여자겠어.
“시끄러워요?”
앙칼진 반문이다.
“아까 저 난쟁이 똥자루만 한 의사 양반 호통이 시끄러워서요. 딱히 당신을 위해 나선 건 아니니까 재미없는 오해는 마시죠.”
냉정한 그의 대답에 오히려 안도 되는 그녀다.
“그러죠.”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파란 불꽃이 점화되었다. 앞으로 펼쳐지게 될 팽팽한 기 싸움을 예고하는 새파란 불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