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끔한 것이 좋아-1화 (프롤로그) (1/82)

1화.

#프롤로그

낯선 곳이 주는 공포와 설렘.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는,

“……배고파.”

허기.

생에 첫 가족 여행에서 다정은 미아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쭉 살았던 경남 밀양 산내면을 떠나, 중학교를 서울로 진학하게 된 것도 정신이 혼곤한데.

미아라니.

그것도 프라하에서.

“……대사관. 대사관이 어디 있지.”

체코어는커녕 영어도 못 하는데. 대사관이 영어로 뭐더라?

프라하성이 보이는 카를교에 앉아, 안 돌아가는 머리를 꾸역꾸역 굴러보는 다정.

“…쩝쩝.”

음?

바삭바삭한 소리와 함께 이어 경쾌하게 들려오는 맛있는 소리.

퀭한 다정의 눈길이 슥- 옆 벤치에 앉아 있는 소년에게로 향한 건 본능이었다. 하얀 피부지만 가는 눈매가 몹시 동양인다운 소년에게 이끌리듯 다가갔다. 조금은 쭈뼛거렸으나 견디기 어려운 허기는 소녀에게 용기를 복 돋아 주었다.

“안녕?”

소년은 다정의 인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무심한 얼굴이었다. 바삭바삭. 한눈에 보기에도 몹시 고급스러운 서양과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꼬르륵.

다정은 다시 심기일전하여 소년에게 말을 붙였다.

“헬, 헬로?”

그제야 소년의 시선이 다정에게까지 닿았다.

그런데.

인상이 퍽 좋지가 않다.

“으음? 체코어로 안녕이 뭐더라…….”

애초에 머릿속에 없던 것이 떠오를 리가 없다. 고민하니 배만 더 고픈 것 같다.

다정은 마음을 단단하게 먹고 다시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넌 어디서 왔니? 몇 살? 나는 한국에서 왔어. 정확히 시골에서 왔지. 이제 곧 서울로 이사가. 너 서울 아니? 코리아! 아임 프롬 코리아! 저기, 근데 너, 말을 못 하니? 헉! 왜 인상을 써? 귀찮아? 귀찮으면 그 과자 하나만 줘라! 나 이상한 애 아니야. 그냥 배고파! 부모님을 잃어버렸어! 야?! 저기요?!”

꿋꿋한 모국어 혼잣말에 지친 다정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어 노골적으로 소년을 노려본다.

“……못 알아듣더라도 하나 정도는 줄 만도 하건만. 쪼잔한 넘. 흥.”

돌아오는 반응은 역시 제로. 다정은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섰고 불만과 불안이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멀어졌다.

“아아, 핸드폰도 없고!!! 사달라고 할 때 좀 사주지!!”

땅바닥에 시선을 붙이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걷던 그 순간, 요란한 경적과 함께 웬 갈고리 같은 것이 다정을 낚아채 함께 바닥에 뒹굴었다.

“……미쳤어?”

사나운 눈을 번뜩이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방금 그 과자 소년.

다정은 소년에게 폭 안겨있는 자세로 눈을 반짝거렸다.

“하, 한국 사람?!”

소년은 골치 아픈 일에 엮었다는 얼굴로 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비키지, 일단?”

“아, 맞다!”

다정은 폴짝 자리에서 일어나, 저로 인해 바닥에 뒹군 반가운 한국인에게 손을 척 내밀었다.

“난 온다정. 열넷. 너는?”

소년이 그 손으로부터 다정의 얼굴까지 찬찬히 올려다보았다. 다정이 눈썹을 까딱이며 뻗은 손을 흔들었다.

소년은 그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서니 키가 훌쩍 크다. 다정은 고개를 뒤로 꺾어 소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난 마성후…….”

“오호, 마성후!”

평범한 중학생 소녀의 리액션일 뿐인데, 성후는 그것이 남사스러워 미간을 찌푸렸다.

“왜 자꾸 똥 씹은 얼굴이야??”

“…똥?”

소년은 찌푸려졌음이 분명한 제 미간을 꾹꾹 눌려 폈다.

“그나저나 아까 그 과자 남았어? 나 배고파!”

다정이 다시 손을 척 내밀었다.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손길에서 당당함이 묻어난다.

미친 붙임성과 뻔뻔함에 성후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졌다. 모든 살벌한 일들도 웃어버리면 끝장나는 법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카를교를 함께 걷는 다정의 손엔 과자 말고도 아이스크림과 음료수 등이 들려 있었다.

지갑을 연 덕분에 ‘쪼잔한 넘’에서 호인으로 승급된 성후에게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지는 다정이다.

“내가 왜 생판 남한테 내 얘기를 해야 하지?”

“바보. 생판 남이니까 할 수 있지. 아는 사람이면 더 말하기 어렵잖아. 어디 가서 어떤 말을 떠들지 모르는데!”

겨우 오렌지 주스나 먹고 있는 주제에.

구시렁거리면서도 아는 척 야무지게 입을 놀리는 다정에게 매료되는 성후다.

오전 내내 다정이 아득한 불안에 휩싸였다면, 성후는 심연으로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런 자신을 현실로 이끈 건 난데없이 처음 보는 소녀였다.

“뭐든 말해 봐. 나 듣는 거 잘해!”

오물오물 먹느라 바쁜 입이 또 말이라는 것을 뱉어낸다.

“……부모님이 재혼하셔.”

말을 버린다는 심정으로 던져보는 성후다. 일회성 만남에 마음을 둘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축하해.”

다정의 말에 성후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너 남 일이라고 그렇게 쉽게.”

다정은, 먹던 것을 멈추고 정색한다.

“쉽게 말하는 거 아니야.”

“됐다.”

“……너희 집 부자지?”

“뭐?”

“딱 봐도 알겠어. 나는 시골에서 커서, 단 한 번도 부잣집 애를 본 적 없어. 드라마에서나 봤지. 근데 네 얼굴 보니까…… 부티는 이런 거구나 싶어. 생긴 것도 예술인데, 걸친 옷, 발 떼는 걸음걸음. 가장 압권은 표정이지.”

성후는 소녀의 말을 전혀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이다.

다정은 개의치 않고 검지를 세워 성후의 얼굴을 척 가리켰다.

“네 그 건방진 얼굴 말이야. 마치 세상을 다 아는 듯한. 저 홀로 고독한 듯한.”

“…….”

“시골에선 말이야……. 부모는커녕, 대부분 할머니 손에서 자라. 부모님은 계셔도 한 분. 온전한 부모 아래 크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 그런데 너는 부모님이 계시는 거잖아? 새엄마 혹은, 새아빠가 너 싫어해? 괴롭혀?”

성후는 은밀히 볼 안 살을 씹다 고개를 저었다.

“거봐. 잘생긴 인물에, 돈에, 가족 구성원까지 이제 완벽하게 맞춰지는데. 대체 뭐가 문제야?”

문제가 없다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엄마의 자리를 낯선 여자와 그녀의 딸이 채운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기보다 이물감에 속이 울렁거렸다. 뭐가 아닌지도 모른 채, 그건 아니라고만 생각했다.

“호강에 겨운 줄도 모르고.”

호강이라…….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처음으로 드는 성후다.

“해외여행 자주 다녀? 아님, 여기 사나? …나는 해외라곤 여기에 처음 와봤어. 그런데 국제 미아. 이게 웬 말? 그래서 무서운데, 그래도 좋아! 눈싸움이나 물놀이 같은 거만 하다가 이런 멋진 곳에 와보니까…… 진짜 너무너무 좋아.”

그렇게 말하는 다정의 얼굴이 바보 같아 보일 정도로 맑아서, 성후는 여태 자신이 당연하게 누렸던 것들을 곱씹어보았다.

마음이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급속도로 가까워진 두 아이는 하늘이 노을에 잠길 때까지 함께 거닐었다.

완전히 해가 완전히 기울어갈 때, 어디선가 찰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친구 사귀었니?”

아버지의 연인이자 곧 새엄마가 될 여자, 선화의 손엔 오래된 필름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성후의 시선이 카메라에 붙박이자, 선화가 혀를 살짝 내민다.

“너무 그림 같아 나도 모르게 찍었지 뭐니.”

그녀의 버버리 코트와 예쁘게 말린 중단발, 버건디색 하이힐은 시골 소녀 다정의 가슴이 터질 듯 설레게 했다. 캡 예뻐……!

“안녕하세요.”

다정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인사했다. 선화는 우아한 미소를 느리게 지었다. 꼭 귀족 같았다.

“그래, 안녕. 놀러 왔니?”

성후는 멋쩍어 입을 꾹 다물었다.

다정의 말을 듣고 재혼에 대한 생각을 달리 해보아야겠단 마음을 먹었지만, 닥치니 아직은 일렀다.

“네, 그런데 부모님이 사라지셨어요…….”

“쿡쿡. 네가 없어진 게 아니고?”

정답.

화려한 퍼레이드에 시선이 뺏긴 다정이 그것을 넋 놓고 졸졸졸 쫓다 부모에게서 멀어져 버렸다.

“그, 그런 것 같기도.”

“그럼 성후랑 잠깐만 여기에 있을래? 아줌마가 부모님 모셔올게.”

“…어떻게요?”

“다 방법이 있단다.”

성후에게 다정을 부탁하고 멀어지는 선화.

다정의 두 눈에 별이 박힌 채 성후를 바라보았다.

“새엄마?”

성후가 고개를 주억였다.

“진짜, 진짜 캡 멋지시다. 와, 연예인 같아.”

“연예인은 무슨.”

“내가 봤던 아줌마 중에 너희 새엄마가 최고 예뻐. 착해도 보이시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래 봬도 내가 싸람을 얼마나 잘 본다고~. 촌년의 무서운 육감을 무시 말라!”

“……큭큭큭… 아하하하!”

얼마 지나지 않아 선화가 다정의 부모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러자, 다정이 입술을 삐죽삐죽하더니 그대로 부모에게 돌진했다.

“엄마!! 아빠!!”

와락.

안기는 모습이 가히 생동감 넘친다.

소녀의 부모는 진탕 울었는지, 엉망이 된 얼굴로 으스러지듯 딸을 안았다. 그리고 다시금 펑펑 눈물을 쏟는다.

대체 어디에 갔었냐고 울음 섞인 훈계와 그래도 무사히 있어 줘서 고맙다며 말끝을 흐리기까지.

성후 역시 드라마에서만 봤던 평범한 가족의 모습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부럽기도 했다. 와중에 쿨하게 손을 흔드는 다정의 모습이 왜 이토록 미운 걸까.

온갖 감정이 성후의 속에서 교차 되었고 마지막으로 남은 감정은 우습게도 섭섭함이었다.

“전화번호는 교환했니?”

선화의 말에, 성후는 아차 싶다.

소년의 얼굴을 보고 직감한 선화가 밉지 않게 얼굴을 찌푸린다. 성후의 마음에 공감을 표하는 얼굴이다.

“진짜 인연이면 언젠가 반드시 만나게 될 거야. 너무 섭섭해하지 말렴.”

“섭섭하기는 누가… 요.”

꽤 오랫동안 자신을 투명 인간 취급하던 성후가, 처음으로 대꾸라는 것을 해주자 선화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내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저녁은 뭐 먹을까?”

“……아무거나요.”

다시 돌아오는 대답에, 선화의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래, 뭐라도 다 같이 먹자꾸나.”

가족의 탄생, 그 시작의 순간이었다.

1화. 수치사를 부르는 눈빛

가끔 그때의 꿈을 꾸곤 한다.

너무나도 평범해 뇌리에 각인된 그 기억의 꿈.

“…허억, 허억….”

악몽도 아닌데, 익숙한 장면의 반복에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나는 성후.

“…젠장.”

낡은 기억 속 소녀는 얼굴도 기억도 희미했다. 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만큼은 바로 어제의 것처럼 귓전에 선했다.

“…굿이라도 해야 하나.”

저에게 어떤 의미라서, 그 소녀가 이따금씩 꿈에 나타나는지 모르겠다. 그리움에서 기인했다고 하기엔 아무런 감정이 없다. 잠깐 맛봤던 동경의 감정 역시 어른이 되고 잊힌 지 오래다.

‘평범’을 부러워하기엔 그는 이미 훌쩍 커버린 것이다.

헌데, 왜?

침대에서 미련 없이 내려와 욕실로 직행했다.

말끔하게 샤워 후 테라스에 앉아 있자, 익숙한 차가 저택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10초… 20초… 30초… 1분, 그리고 2분.

똑똑.

“들어와.”

깨끗한 이목구비에 냉랭한 기운을 머금은 연석은 성후의 비서이자 부친의 그룹, <가르니크>의 끄나풀이었다.

“오늘 조찬 모임이 있습니다.”

“알아.”

“기대하셨나 보군요. 웬일로 기억을 다 하시고.”

“몹시 혐오스러워, 기억되더군.”

“아아.”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기계적인 연석의 리액션이 뻔뻔하기 짝이 없다.

준비를 위해 샤워 가운을 벗어 던지자 성후의 야성적인 근육질 몸매가 드러났다. 특히 남성의 나체에 관심 없는 연석이 고개를 획 돌렸다.

모시는 남자의 몸이 초콜릿 같은지, 눈사람 같은지 그게 다 자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느새 슈트를 멋지게 차려입은 성후가 연석의 눈앞에서 넥타이를 고쳐 맨다. 빈틈없이 완벽한데도 불구하고 어딘지 불량스러워 보였다.

“가지.”

성후의 말에 연석이 그의 뒤를 따랐다.

문을 열고 나가자, 시드니의 아침이 쾌청하다.

* * *

‘야야, 마성후 나왔어!!’

‘음? 이런 모임은 질색한다고 들었는데.’

‘와우, 계 탔네!’

‘오늘은 분명 한국인 피아니스트만 모인다고 했었지?’

‘그랬지! 살짝 그의 테이블에 가봐야겠어.’

‘관두래도. 마성후 성질 더럽기로 유명하잖아?’

‘재벌이면 착한 거고, 천재 피아니스트면 착한 거고, 잘생기면 착한 거야. 오케이?’

‘동감.’

‘나도 동감!’

‘<가르니크> 아들이라는 거, 계속 숨기던 눈치더니, 이번에 기사 뜬 거 봤냐?’

‘그래, 소문이 확신이 되는 짜릿한 순간이었지.’

‘아아, 저 남자의 곁에서 짜릿하고 싶다.’

‘동감.’

‘옳소!’

‘큭큭큭.’

남성 연주자들의 파트너 자격으로 온 여성들이 술렁거린다. 자신의 본분을 잊고서 온 마음과 시선이 성후에게 머물러 있다.

“오전부터 전부 빡세게 차려입었군.”

성후가 낮게 얘기하자, 연석이 따라 조그맣게 대꾸했다.

“튀는 행동은 삼가셔야 합니다. 저번처럼 기사에 나기라도 한다면…….”

연석의 말에 성후가 몸을 빙글 돌려 그를 척 가리켰다.

“내가 튀어서 기사가 난 게 아니라, 기자가 온통 나만 주시한 거라고.”

“그게 그거죠.”

“엄연히 달라.”

“언제나처럼 쭉 정신승리를 하시는군요.”

성후는 연석의 귓가로 바짝 다가가 속삭였다.

“내 옆에 몰리는 성가신 존재나 잘 처리해.”

“여부가 있겠습니까.”

성후가 아무리 위협 조로 말해도 어려서부터 봤던 연석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그때, 성후의 대학 동문이자 자칭 라이벌인 승우가 다가왔다.

차가운 은테 안경을 올리며 입꼬리를 올리는 게 영 께름칙하다.

이어, 얇은 입술이 열렸다.

“이야, 이런 데서 널 보고. 항간에 당분간 쉰다는 소문이 있던데. 진짜냐? 손가락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 아냐?”

자신 미만 모두 잡이라 여기는 성후가 피식 웃음을 흘린다.

“뭐냐, 그 웃음은.”

“그 입 놀릴 시간 있으면 손가락이나 더 놀려.”

“난 무식하게 연습 안 해.”

“게으르단 얘길 자랑스럽게도 하는군.”

“오오, 이건 게으른 게 아니야. 날 사랑하는 거지. 고로, 날 아끼는 거고.”

승우는 자신을 꼭 껴안으며 능청맞게 대꾸했다.

“네 헛소리 들어줄 시간 없다.”

저벅저벅.

승우를 지나쳐, 제 이름표가 부착된 의자를 빼서 앉는다.

조찬 모임이 끝나는 동안, 성후의 등에 무수한 시선이 꽂혔다. 어려서부터 단련된 익숙한 시선이었다. 따라서 그는 타인으로 인한 동요는 느끼지 못했다.

그것이 곧 그의 정서다.

수많은 피아노 콩쿠르나 연주회에서 단 한 번도 주눅 들었던 적 없던 성후는 연주 도중 넥타이를 거칠게 풀거나, 구두를 벗은 뒤 다시 연주를 재계하는 둥, 무대가 마치 놀이터인 것처럼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런 그를 보는 시선이 딱 두 가지로 극명히 나누어졌다.

압도되어 완전히 그에게 매료되거나, 신성한 연주회에 대한 모독과 혹은 시기로 비난을 퍼붓거나.

범접하기 힘들 만큼 우월하면서도 주변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개 쌍 마이웨이 기질까지.

온갖 구설이 그를 따르고 지천으로 적이 깔렸지만, 성후는 오늘도 완벽한 모습으로 만인의 앞에 앉아 있다.

당당하게.

늘 그랬던 것처럼.

-모처럼 얼굴 보기 힘든 분이 오늘 조찬 모임에 참석하셨네요.

작은 마이크를 든 사회자의 말에 수많은 시선이 성후에게 꽂혔다. 훔쳐보고 있었는데 마침 잘되었다는 듯이.

통유리로 된 높은 천장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모두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성후를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해서 피아니스트 마성후 님의 품격 있는 연주를 들어볼까 하는데, 어떠세요?

사회자의 말에 박수를 받아 버린 성후.

그리고 그의 눈치를 슬쩍 살피는 연석.

비웃음을 날린 준비를 마친 승우와 몇몇 피아니스트들.

자리에서 일어선 성후가 인파를 가르고 작은 무대로 나왔다. 이내 제 앞에 놓인 새하얀 피아노에 그의 시선이 닿았다.

유난스러운 프로 연주자들은 보통 피아노의 모델을 많이 따졌는데, 지금 비치된 모델은 디자인만 그럴듯하지, 소리에 깊이가 없는 전형적인 보급형 피아노였다.

그런 그를 쳐다보던 승우가 조소를 머금었다.

“마성후 공연이 얼마짜린데, 여기서 놀아줄 리가…”

그 순간, 성후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 올려졌다.

그리고 이어 새소리 같은 아름다운 곡이 고음을 타고 흘러나왔다.

마치 살아있는 새가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 음색은 간단한 손놀림에 비해 깊이가 굉장했다. 통째로 빌린 커다란 홀 안에 색색의 새가 채워진 듯한 환영이 보일 정도였다.

사람들은 일제히 마음을 열고 음악을 즐겼다.

모두가 그의 포로가 되는 순간이었다.

조찬 모임을 등지자, 연석이 슥 따라붙었다.

“연주를 다 하시고, 오늘따라 아주 낯섭니다. 형님.”

‘형님’ 소리가 거슬렸지만 어렸을 때처럼 ‘형’이라 부르며 졸졸 따라다니는 건 더더욱 싫었다.

“당분간 튀는 행동 삼가라며.”

어쩔 수 없이 참여했다는 뉘앙스에 연석이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아, 그랬죠. 그리고 다음 일정은 한국입니다. 한 번에 몰아둬서 며칠 머무르셔야 할 겁니다.”

“……어.”

자동차 뒷좌석에 앉은 성후가 주먹을 쥐락펴락한다. 약지와 소지의 느낌이 묘하다. 근육이 말을 잘 듣지 않고 오그라드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싸한 기분을 삼킨다.

별일 아니겠지.

자기 세뇌도 잊지 않고서.

“어디 안 좋으십니까?”

룸미러로 성후의 얼굴을 흘끔 바라보며 연석이 물었다.

“아니야.”

연석의 시선이 기민하게 성후의 손으로 향한다.

“한국 도착하면 병원부터 가시죠.”

* * *

“신규 쌤, 뭐해?”

신입 간호사는 ‘신규 쌤’이라고 부른다.

“아아, 아니에요.”

“재미있는 거 보던 거 같은데. 같이 좀 봐.”

“아 그게……”

“얼른.”

저가 보던 핸드폰 화면을 삐쭉삐쭉 내미는 신입 간호사 누리. 그것을 받들어 찬찬히 화면을 내려 보는 부연. 누리가 보던 건 다름 아닌 인터넷 기사였다.

“어머? 마성후 한국 들어온다네?”

살짝 홍조를 띤 부연의 말에 누리가 얕게 고개를 주억인다.

“신규 쌤도 마성후 팬?”

“현존하는 사람 중에 피아니스트 마성후 팬이 아닌 사람도 있을까요…….”

“그렇지……. 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지.”

이번엔 고개를 좀 더 격하게 끄덕이는 누리다. 두 간호사는 이내 기사와 이미지 사진을 정독했다. 마성후를 포스팅한 블로그도 파고들었다.

188cm에 달한다던 그의 키에 조그마한 얼굴. 비율로 보면 190cm는 우습게 넘을 것만 같았다.

무대 위 턱시도, 인터뷰를 위한 슈트, 파파라치가 찍은 일상복 등. 화보가 아닌 게 없었다. 특히 에메랄드 바다 앞에서 찍힌 수영복 차림의 그는 이 세상 피지컬이 아니었다. 크게 조각난 근육을 뒤덮은 것이 땀인지 물인지, 분간도 못 하고서 침만 삼키는 두 사람이다.

“서양 피가 섞였을 거야…. 분명해.”

부연은 곧 성후의 얼굴을 최대한 크게 확대했다.

“눈빛 봐. 배운 남자가 뭐 이렇게 도발적이래?”

“콧대는 어떻고요. 성형외과 의사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꼽는 코가 마성후 코라고 하더라고요.”

두 사람의 눈이 날렵하고 오뚝한 성후의 콧대로 향한다. 동시의 끄덕이는 고개가 암묵적인 동의를 뜻했다.

“모든 면이 다 멋있지만, 나는 이날 것의 눈빛이 마음에 들어. 이 눈빛에 백 번도 더 쓰러졌다니까. 마성후 유튜브 영상은 안 본 게 없어요.”

누리가 수줍게 맞장구쳤다.

“저도요…. 그런데 저는 과감한 피아노 연주도 너무 좋아요. 섹시하단 말로도 부족할 만큼, 섹시해요.”

“하……. 연주. 그래, 미쳤지. 미쳤어.”

그때였다.

“11-2번 환자 확인해 봤어요?”

무심하게 등장하는 간호사는 온다정. 모두 비슷한 헤어스타일과 똑같은 간호사 유니폼 차림인데 유난히 다정의 것들만 완벽한 각을 자랑했다.

“확인이요?”

당황한 누리의 눈빛이 흔들린다.

“어젯밤 허리 통증이 심하셨다면서요.”

“그분은 인공관절 수술 때문에 입원하셨는데요….”

무책임한 대꾸다. 다정은 찰나의 침묵 이후 딱딱하게 웃었다.

“무릎 수술로 입원하시면 아프다는 허리는 내버려 둬도 돼요?”

눈이 전혀 웃지 않는 미소에 싸늘한 물음이 더해지자 누리는 주눅이 확 들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후다닥 누리가 사라진 이후 이번엔 다정의 차가운 눈빛이 부연에게로 향했다.

“신 선생님은 아침부터 신규 쌤이랑 노닥거리셔야겠어요?”

“라운딩도 했고 떨어진 처방도 다 이행했는데 무슨 상관? 그리고 우리끼리 있을 땐 그 존댓말 좀 쓰지 말자.”

코를 찡그리며 대꾸하는 부연은 다정과 대학 동기이자, 입사 동기이다.

다정은 무심하게 차트를 훑으며 대꾸했다.

“남들이 듣습니다, 신 선생님.”

“좀 들으면 어때?”

“3-4번 환자 수술 부분 드레싱 했어요?”

“…흡!”

익숙한 상황이다. 부연의 광대뼈가 움찔하는 걸 놓치지 않은 다정이 평이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녀올게요.”

“아, 네네, 그러시죠.”

저만 잘났어.

입을 삐죽이는 부연을 등지고 다정은 3-4번 환자에게로 향했다.

“아버님, 좀 어떠세요?”

반듯한 이마와 동그란 앞 광대가 가을 햇살을 머금은 듯 화사하다.

“오오, 간호사 선생님! 이거 좀 드셔보셔. 아들 내외가 사 왔는데 엄청 맛있구랴!”

환자가 웃자 두꺼운 주름이 깊게 팬다.

“이게 뭐예요? …자몽? 쓰지 않아요?”

다정이 부드럽게 대답한다.

시간에 긴박하게 쫓기지 않는 이상, 환자들의 일상적인 수다에도 기꺼이 참여하는 그녀다.

“글쎄, 이건 엄청 달더라니까!”

“에이~”

“하하, 속고만 살았나. 내 얼른 깎아줄게!”

“헛, 놔두세요. 제가 씻어올게요.”

다정의 싹싹한 태도에 다인실 환자들 만면에 웃음이 번진다.

환자를 케어하고 복도를 나서는데, 누리가 다정의 곁에 따라붙어 말을 붙여 왔다.

“밖에 대단한 사람이 오나 봐요.”

누리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다정이 작달막한 간호사를 내려다보았다. 누리는 잔뜩 흥분한 마음을 애써 죽인 목소리로 한 번 더 말했다.

“밖이 엄청 소란스럽더라고요. 인파가 몰렸어요.”

“…신규 쌤.”

“네, 온 선생님.”

“이곳에 오는 사람 중 대단한 사람은 없어요.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거나, 치료를 해주는 사람- 그 둘뿐입니다.”

“……아아 네.”

“음주 운전 환자는 어떻게 됐어요?”

“그게 아직….”

다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직도요?”

바짝 주눅 든 누리가 고개를 주억이자, 그녀는 어딘가로 거침없이 향했다.

* * *

“우선은 건초염으로 보이는데 더 자세한 건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정밀 검사라.”

성후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신 김에, 건강 검진까지 모두 마치시죠.”

“거기까진 됐습니다.”

“마 회장님께서 특별히 부탁하신 사항이십니다. 마성후 님이 오랫동안 해외에 계셔서 회장님이 걱정이 많으셨습니다.”

의사의 말에 성후는 극성맞은 가족들이 떠올랐다.

피곤해지는 건 질색이다.

“입원, 해야 합니까?”

“물론이죠. 금식도 하셔야 하고요. 병실은 어떻게…?”

힐끔.

의사를 쳐다보는 성후의 눈에 익숙한 권태가 깃들어있다.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눈빛이다.

“VVIP 병동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개중에 가장 쾌적한 곳이면 좋겠습니다.”

진료실 밖으로 나오자 연석이 자연스레 성후를 따랐다.

그때였다.

“교수님 이건 아니잖아요!”

어디선가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그의 귀를 사로잡았다. 잡다한 소음을 뚫고도 단박에 들릴 만큼 높고 청량한 목소리였다.

긴 다리를 멈칫하고서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경찰이 음주 운전 죄의 경중을 따져 묻기 전에 저희가 조속히 처리해야 하는 건! 환자의 으스러진 목뼈를 고정하는 수술입니다. 범법자라고 해서 수사 협조로만 시간을 보낸다면 손상된 신경이 돌아올 확률이 매우 희박해요. 아시잖아요!”

“의사는 나고, 본인은 간호사야!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지 말라고. 어, 제발!”

상대 의사는 지긋지긋하다는 말투로 다그쳤다.

“아니, 교수님!”

하지만 드센 간호사는 꺾이지 않고 더욱 목청을 높였다.

세상사에 무관심한 성후였지만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에 자석처럼 이끌렸다. 해서 그녀의 곁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당황한 담당의가 그를 따르며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가끔 있는 해프닝입니다. 마성후 님이 신경 쓰실 것 없어요.”

성후는 담당의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중심으로 들어섰다.

아치형 눈썹 사이를 좁게 찌푸린 여자의 얼굴. 그보다 더 시선을 잡아끈 건 가로로 길게 터진 여자의 스커트였다.

15cm? 18cm?

터진 치마 사이로 하얗고 매끈한 허벅지가 아슬아슬하게 드러난다.

성후의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지자, 다정도 쏘아대던 말을 멈추고 시선이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쳐다보든 말든 뻔뻔한 얼굴로 자신의 다리를 쳐다보고 있는 웬 남자가 시야에 잡혔다. 뭐야, 이놈은?

그녀는 싸움닭 모드였다. 따라서 성후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고 쏘아붙이기 위해 입을 연 순간이었다. 시선을 거둔 성후가 산책하든 무심한 태도로 다정을 스쳐 지나갔다.

쯧쯧, 칠칠찮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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