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4/65)
  • 그들은 내가 여기 있는 걸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하기야, 과거에서 갑자기 사람이 나타날 것을 예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심지어 여기는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나 역시 성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로 오는 것이 가능했다.

    확고한 믿음 때문인지 대신관과 황태자는 아무 긴장감 없이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실제로, 비밀 이야기를 나누려면 이곳만큼 보안이 보장된 곳이 없으리라.

    하지만 기적같이 나는 이 이야기를 엿들음으로써 정상적으로라면 절대로 알 수 없을 정보를 얻었다.

    그들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도 대화 내용을 추론하면 더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으리라.

    아니, 반드시 알아낼 것이다. ‘시간의 돌’은 나를 엉뚱한 곳으로 보내지 않았을 테니까.

    “어쨌든 다시 이계와 분리되는 건… 사실 뭐 가능하지도 않잖아.”

    디에고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이계가 무슨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옆 동네인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미지의 공간을….”

    이계라면… 레오의 말에 따르면 ‘보물의 방’도 이계라고 했는데.

    나는 마치 옆 동네처럼 이계를 마음대로 출입했던 레오를 생각하며 조용히 눈을 굴렸다. 아무래도 노아비크의 이능을 벨리아나스에서는 제대로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럼 노아비크의 이능을 써서 이계와 분리될 수 있다는 소리인가?’

    제발 조금 더 말하라고 마음속으로 응원을 하는데 대신관이 온화하게 대답했다.

    “설사 노아비크가 이계와 분리되는 법과 이계 출입 방법까지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제 도움이 없으면 어차피 실행하는 건 불가능하니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제 사회화가 어느 정도 된 나는 대신관이 나름대로 생색을 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자기가 없으면 어쨌든 안 된다는 건가. 디에고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는 딱히 공치사를 하지 않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어쨌든 난 이제 레오 노아비크를 죽일 거야. 신전에서 아무리 말린다고 해도 더 이상 두고 볼 순 없어.”

    이제 정말로 그의 인내심이 바닥난 듯했다. 하기야, 수도에 레오를 불러들이기 위해 연회까지 열었는데 계속 레오가 무사하니 제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이 상황에 얼마나 화가 날까.

    계속 공작저에서 칩거하고 있으니 다른 행사에 부를 수도 없고, 그러다가 북쪽으로 가 버리면 더 이상의 기회도 날리는 셈이었다.

    “마지막으로 그 말을 통보하려고 왔네.”

    디에고는 누군가가 엿들을까 봐 직접 신전까지 행차하여 비밀스럽게 말을 전할 정도로 철저한 인간이었다. 다시 한번 내게 성력이 있음이 감사해지는 순간이었다.

    “뭐… 알겠습니다. 아쉽지만 저희도 할 말은 없지요.”

    대신관은 작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리고 사실 레오 노아비크가 없어도 해결책은 있으니까요. 벨리아나스의 힘을 증폭시키는 곳이 있기는 하니까요.”

    “무슨…. 모든 수도 사람들 앞에서 황족이 악령을 조종하려고 한다고 알릴 일 있나.”

    그들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이들의 대화가 아주 중요하다는 건 눈치챘기에, 필사적으로 모든 말들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나중에 일을 해결할 때에 실마리가 되어 줄 수도 있을 테니까.

    ‘일단 하나는 확실해. 이 사람들은 거의 다 알아냈어. 악령을 조종하는 법도, 영원히 이계의 문을 닫는 법도.’

    다만 하나씩 한계가 있어서 시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엉망진창으로 언급된 말들을 어떻게든 조합하며 내가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대신관이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레오 노아비크는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저희가 시체라도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멀쩡히 죽이신다면 말입니다.”

    “아, 폭발시키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그건 걱정 마.”

    디에고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황궁으로 돌아가면 그 즉시 노아비크 공작저에 황실 기사단을 보낼 생각이야.”

    “…황실 기사단을요?”

    대신관만큼이나 나 역시 깜짝 놀랐다.

    아무리 황족이라고 해도 이유 없이 귀족의 저택에 황실 기사단을 보낼 수는 없다.

    특히나 공작저나 되는 곳에 직접 병력을 보내려면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역모 혐의로 즉시 체포하려고. 노아비크 공작가쯤 되는 집안을 구금하려면 그 수밖에 없지 않나.”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간신히 신음을 삼켰다.

    황가에서 무조건적으로 귀족들을 체포해서 구금한 뒤 조사할 수 있는 죄목은 역모뿐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증거가 있어야 할 텐데요.”

    “연회 날 그 빌어먹을 마정석 사태 때, 연회장 내부에서 요하네스 노아비크를 본 사람이 없다. 그 사실을 이용해야지.”

    디에고는 물 흐르듯이 말했다.

    “황실 기사 몇 명이 증언하게 하면 돼. 요하네스 노아비크가 일부러 마정석을 쓰러트리고 몰래 황제 폐하의 침실로 가서 암살을 시도했다고 할 거야.”

    세상에.

    그 연회 때 요하네스가 몰래 황제 폐하의 침실 바로 앞까지 갔던 건 사실이었다. 요하네스에게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내가 일부러 마정석을 쓰러트린 것도 맞고.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는 건 반대로 그 당시 요하네스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사람도 없다는 것을 뜻했다. 낭패였다.

    “결국은 풀어 줄 수밖에 없겠지만, 열흘 정도 구금시키면 레오 노아비크 하나 망가트리는 건 일도 아니지.”

    역모 혐의가 씌워지면, 한 가문의 직계들은 모조리 일단 잡혀 들어간다.

    요하네스의 역모를 핑계 삼아 레오를 데려가려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한번 황궁 감옥에 갇히게 되면… 조용히 처리하는 건 정말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게 지금 곧 벌어질 일이라고…?

    정작 유제이가 북부 독립을 외칠 때에 조용히 ‘노아비크가 원하는 건 왕관이 아니다.’라고 말했었던 요하네스가 생각나서 내가 다 억울했다.

    “아, 말하고 나니 꽤 좋은 수가 생각나는군.”

    디에고가 느릿하게 말했다.

    “레오 노아비크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신전의 사람을 한 번 들여보내 주지. 그러면 피 정도는 가져갈 수 있지 않겠나.”

    “아, 감사합니다.”

    대신관의 흐뭇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천천히 두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문틈으로 보니 실제로 두 사람이 방을 벗어나고 있었다.

    ‘…뭐야, 왜 이렇게 시간이 촉박해?’

    지금이 몇 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당장 몇 시간 뒤에 황실 기사단이 노아비크 공작저에 들이닥치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아무리 노아비크 공작가가 황실에 비견될 만한 가문이라고 해도 수도에서는 황실을 이길 수 없었다.

    대다수의 병력은 북부에 있었고, 또 황실의 역모 혐의에 대항하는 것은 중죄이니까.

    ‘요하네스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라. 노아비크의 정보력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잖아.’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쓰며 손톱을 깨물었다. 디에고가 ‘에이스’의 뒤에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는 요하네스니까 이 정도도 눈치채지 않을까?

    그래도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일단은 여기를 벗어나자.’

    그런데 벗어날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 한 번 와 본 길이라 어떻게 나가야 할지는 알겠는데 눈에 띄는 복장을 한 내가 과연 들키지 않고 나갈 수 있을까?

    하지만 시간이 없으므로 어떻게든 나가야 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내 옆에 쌓여 있던 서류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뭐지?’

    딱 봐도 굉장히 오래된 서류였다. 그리고 아주 친숙한 인장이 찍혀 있었다.

    ‘단테 노아비크!’

    단테 노아비크의 연구 문서 원본은 북부에도 많았기 때문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대신관은 이곳이 원래 연구 결과를 보관하는 데에 쓰인다고 했었다.

    “사실 별것도 없습니다. 그저 아무나 출입할 수 없다보니 보안을 유지하는 데에 좋아서 그동안의 연구 결과만 보관해 놓고 있지요.”

    나는 이미 어둠에 적응한 눈으로 빠르게 벽장 안을 훑었다. 단테 노아비크의 것이 맨 오른쪽에 있었는데 나름대로 연도순으로 정렬한 듯했다.

    ‘그렇다면… 왼쪽으로 갈수록 최신 연구라는 건가?’

    이들이 무언가 알아냈다면 반드시 가장 최근의 연구 일지에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일단은 가져가자.’

    급하게 벽장 가장 왼쪽에 있는 보고서를 되는 대로 집어 가방에 쑤셔 넣었다. 나는 당장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어도, 요하네스에게 보여 주면 나보다 똑똑한 그가 뭐라도 알아채겠지.

    그러고 보니 어쨌든 요하네스를 만날 수 있는 거구나. 이런 급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속없이 기분이 설렜다.

    실질적으로 내게는 오랜 시간이 흐른 건 아니지만, 그래도 모든 오해가 다 풀려서 그런지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모든 오해가 다 풀렸다고 해서 묻고 싶은 말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더 묻고 싶은 말도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 이전에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보아하니 요하네스는 수도의 공작저에서 계속 칩거한 모양인데 대체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일까. 그 역시 우리 사이에 있던 이 모든 일을 눈치챘을까?

    과거에 나와 만났던 것과 ‘푸른 루비’의 정체를 그가 다 알고 말았다면, 그렇다면 그 역시… 이렇게 1분 1초가 영겁과도 같은 느낌이 들었을까. 기약 없는 기다림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방에 최대한 보고서를 잔뜩 집어넣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다시 인기척이 들렸다.

    문틈으로 보니 내 또래의 성녀가 하품을 하면서 빗자루를 든 채 들어오고 있었다.

    “아… 입구에 견습 성녀가 와 있군요. 청소 시간인가 봅니다. 얘, 잠시만 있다가 다시 오거라.”

    그러고 보니 아까 청소 시간이라고 대신관이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어쩔 수 없지.’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도 없었고. 속으로 그 어린 성녀에게 미안해하면서 나는 총을 챙겨 들었다.

    ‘이제 나는 요하네스를 보러 가야겠어.’

    ⚜ ⚜ ⚜

    신전의 하루는 동이 트기 전 견습 성녀들이 신전 청소를 하면서 시작된다. 그 시기에 신전 내부를 지키기 위해 불침번을 서던 성기사들도 교대를 한다.

    평소와 같은 일상이 시작되는 동이 틀 무렵, 연구 결과들을 보관하는 ‘기록의 방’에서 청소를 마친 견습 성녀가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종종거리며 나왔다.

    오늘 새벽 ‘기록의 방’에 대신관과 황태자가 들어가는 바람에 청소가 다소 늦어진 것을 알고 있는 성기사들은 교대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별달리 그 견습 성녀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청소를 위해 머릿수건을 쓰고 코와 입술을 천으로 가린 견습 성녀의 생김새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다만 견습 성녀복이 그녀에게는 조금 작은 것 같아서, ‘성장기 애들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지, 암.’ 같은 생각만 지나가듯 했을 뿐이었다.

    물론 진짜 견습 성녀는 벽장 안에 재갈이 물린 채 갇혀 있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여인이 총을 들이밀며 협박했던 것이다.

    견습 성녀의 옷을 빼앗아 입은 엘로이즈는 그렇게 정문까지 별다른 위기 없이 유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제 정문이 문제인데….’

    엘로이즈는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든 채로 정문 앞을 지키고 있는 성기사들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은 이른 아침이었고, 건국제도 끝난 지 오래라 일반인들의 출입도 막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기사들이 별달리 긴장하고 있는 상태인 것 같지는 않았다.

    ‘사격보다 달리기 실력이 도망에는 더 필요하구나.’

    엘로이즈는 속으로 탄식했으나 어쨌든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정문을 나선 뒤 정문 앞길을 쓸기 시작했다. 일단은 정문을 나섰으니 조금이라도 기회가 있으면 그대로 달아날 예정이었다.

    그때, 놀랍게도 평온했던 수도의 아침이 그 어느 때보다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 ⚜ ⚜

    몇 시간 전, 노아비크 공작저.

    “공작님.”

    요하네스의 집무실에 페이건이 급히 달려왔다.

    “황실 기사단에 정예군 소집 명령이 내려진 것 같습니다.”

    그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심각했고, 요하네스 역시 아주 오랜만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페이건의 보고가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렇게까지 하는군. 디에고 황태자는.”

    “몰래 신전에 다녀온 것 같다는 보고입니다.”

    요하네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정예군 소집 명령.

    계속해서 칩거하고 있으니 설마 공작저에 황실 기사단이라도 끌고 쳐들어오려는 속셈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명분이 역모밖에 없을 텐데.

    이런 일을 아예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어쨌든 노아비크와 벨리아나스의 대립은 워낙에 극으로 치닫고 있었으니.

    심지어 노아비크에서 디에고가 그토록 경계하는 벨리아나스의 핏줄을 데리고 있으니 당연히 거슬려 미쳤겠지.

    엘로이즈가 과거로 떠나고, 그가 칩거한 지도 이제 3개월이었다.

    그리고 3개월간 요하네스는 집무실에서 이런저런 보고를 받아볼 뿐 그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그건 레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디에고가 정말로 레오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이 엘로이즈의 마지막 경고였기 때문이다.

    ‘역시 멍청한 짓이었나.’

    레오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최대한 빠르게 다 끌고 북부로 가야 했지만, 이대로 수도에 머무는 것은 어쩌면 디에고를 자극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엘로이즈가 마음에 걸렸다.

    ‘시간의 돌’이 엘로이즈를 어느 시간 어느 장소로 데려다줄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래도 마지막으로 없어진 곳에서 나타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다고 생각했다.

    하루만, 딱 하루만 더….

    그렇게 하루하루 심장이 타들어 가는 기다림이 그를 갉아먹었지만, 도저히 엘로이즈가 맨 처음 들이닥쳐서 그에게 결혼을 요구했던 이 저택을 떠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북부로 갔어야 하는 건가….’

    성인이라면 디에고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핑계가 많지만, 상대가 어린아이라면 말이 다르다.

    디에고가 이제 여덟 살인 레오를 딱 집어서 황궁으로 오라고 하거나 일부러 위험한 지역에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노아비크의 대다수 병력이 북부에 남아 있다고 해도, 노아비크 공작저에 있는 기사들이 레오 하나 못 지킬 수준은 아니니 납치를 기획할 수도 없고.

    그러므로 결국 레오를 잠시라도 제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은 이제 정말 극단적인 것밖에 남지 않은 셈이었다.

    “…정말….”

    페이건이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황태자 전하께서는 왜 이렇게까지 노아비크를 거슬려 하시는 걸까요? 아니, 사실 역모로 잡아넣는다고 해 봤자 증거 불충분으로 며칠 안에 풀려날 텐데….”

    페이건은 레오가 벨리아나스의 핏줄을 이은 것을 몰랐다. 그러므로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도저히 짐작하지 못했다.

    사실 ‘역모’ 카드를 꺼내 드는 것은 디에고로서도 꽤 어려운 결정이었다. 노아비크는 어쨌든 풀려날 테고, 그러면 이곳저곳에 ‘황태자 전하께서 의심이 많아서 과민 반응하셨군.’ 하는 여론이 돌기 시작할 것이다.

    특히나 요하네스는 북쪽을 수호하며 악령으로부터 수도를 지키고, 또 신전의 명을 받아 ‘푸른 루비’까지 쫓는 사람 아니던가. 그런 그를 제대로 된 증거 없이 잡아넣으면 당연히 황태자에 대한 여론은 점점 더 나빠질 테고, 그러다가 정말 역모를 꾀하던 자들을 체포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었다.

    이전이었다면 몰랐겠지만 이제 엘로이즈의 서신으로 인해 디에고가 정말로 레오를 죽일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상태였다. 레오가 그들의 손아귀로 넘어가면 며칠 안에 ‘사고로 그만 죽었다.’라는 소식을 듣게 될지도 몰랐다.

    이렇게까지 상황이 악화된 건 요하네스가 정말 엘로이즈를 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만큼은 정말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면 오히려 더 냉철할 수 있었겠지만, 사실 요하네스는 칩거를 결정하면서 이런 극단적인 상황을 다소 예상하기는 했다. 생각보다 그 시기가 빠르긴 했지만.

    그러나 정말 어쩔 수 없었던 것을 어떡하나. 엘로이즈가 돌아올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이 수도를… 정말 도저히 떠날 수가 없었다.

    엘로이즈 르노아로, 그 여자가 결국 그의 인생을 모두 망가뜨리고 또 그를 무너트릴 것 같다는 처음의 예감 그대로.

    아쉬운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인생은 애초에 그녀가 구해 준 것이었다. 엘로이즈가 없었다면 여덟 살 때 이미 그는 죽었을 테니까.

    그리고 최악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던 그 여덟 살의 시기, 그녀가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진심으로 말해 준 덕분에 여기까지 꿋꿋하게 올 수 있었으니까.

    그가 천천히 숨을 몰아쉬는데 페이건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근데 황태자 전하의 치밀한 성격상 절대로 오래 끌지 않으실 겁니다. 적어도 이틀 안에는 노아비크 공작저에 들어온다고 보고, 오늘 밤에 북부로 몰래 움직이든지 하여….”

    “아니. 이틀이 아니다.”

    굳게 다물려 있던 요하네스의 입이 열렸다.

    “디에고 황태자의 성격이라면 두 시간 안에 모든 걸 끝장낼 거다.”

    “네?”

    페이건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두… 두 시간이요?”

    “그쪽에서도 우리의 정보력을 경계하고 있으니까. 최대한 급박하게 움직이겠지. 실제로 우리가 미리 알아차렸지 않나.”

    두 시간이라면 정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페이건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애쓰며 눈을 굴렸다. 어차피 그들은 그저 디에고의 비밀을 밝히려고 한 것뿐이지 정말로 역모를 꾸민 건 아니니까.

    “그럼… 음, 그냥… 길들이기 정도라고 생각하고 며칠 버티시면 어떻게든 저희가 빠르게 빼 드릴….”

    “안 돼. 단 하루라도 잡혀 들어가서는 안 된다.”

    요하네스가 페이건의 더듬대는 말을 끊으며 벌떡 일어났다.

    “지금 당장 레오를 깨워.”

    “네? 그럼 지금 북부로 이동하실 겁니까?”

    “지금 이동하면 가는 도중에 잡혀.”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다른 방법이 없는데? 아무리 노아비크 기사단이라고 해도 수도에서 황궁 기사단과 충돌할 수는 없었다. 그거야말로 내전으로 번져서 진짜 역모로 붙잡힐 수도 있는 문제였으니까.

    게다가 노아비크에게는 정통성도 없다. 운 좋게 요하네스가 디에고를 이기게 되더라도, 매일같이 광장 중앙에 우뚝 서 있는 ‘꽃의 탑’을 올려다보며 벨리아나스에게 환상을 품어 온 군중들이 노아비크를 따를 리 없었다.

    정면충돌은 정말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페이건이 주춤하며 눈을 굴리는데 요하네스가 단호하게 명령했다.

    “대충 깔끔한 옷을 입히고 단장도 시켜서 내 방으로 즉시 보내. 함께 외출해야 하니까.”

    실로 정말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요하네스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흘끗 거울을 보았다. 3개월 전에 비하면 정말 초췌해 보였다.

    ‘결국 상황이 이렇게까지 가는군.’

    디에고 측에서 그가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 ‘역모’를 내건다면 이쪽에서도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패를 써야 했다.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하지만 언제는 그가 내키는 일만 하고 살았던가. 이미 최후의 수를 결심한 그의 눈에 이채가 어리기 시작했다.

    ⚜ ⚜ ⚜

    동이 트고 나서 얼마 되지 않은 이른 아침이었다.

    평화로운 수도의 아침은 일찍부터 소란스러웠다. 황궁에서 황실 기사단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디에고 황태자가 맨 앞에서 말을 타고 직접 기사단을 이끌고 있었다.

    평소 늦잠을 자던 아이들까지 뛰어나와서 구경할 정도로 화려한 그 행렬은 노아비크 공작저 앞에서 멈춰 섰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디에고는 턱을 치켜들며 노아비크 공작저 앞에서 크게 노아비크 공작가를 역모 혐의로 체포할 수밖에 없는 죄목을 읊었다.

    첫째, 황궁 연회 때 일부러 마정석을 쓰러트려 황궁을 혼란하게 만든 뒤 몰래 사라져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고 한 점.

    둘째, 신전에서 치료제로 쓰려고 황제 폐하를 위해 숙성하고 있던 최상급 악령의 심장을 바꿔치기한 점.

    셋째, 이 모든 일은 요하네스의 아내인 노아비크 공작 부인의 도움을 받아 이뤄졌으며, 그녀 역시 역모에 적극 참여했다는 점.

    넷째, 그리고 증거를 은폐하기 위해 이혼하고 아내를 빼돌렸다는 점.

    디에고는 조목조목 우아하게 죄목을 읊은 뒤, 이 모든 정황이 의심스럽고 관련된 증언들이 속속 밝혀지는 바 노아비크 일가를 당장 체포하겠다며 수도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언했다.

    공작저를 지키고 있던 페이건은 그 죄목들을 들으며 속으로 낭패라고 생각했다.

    ‘젠장, 맞는 말들이 너무 많아!’

    모든 것들이 다 거짓이라면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반박해 보겠는데, 디에고가 지목한 것들은 명확한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누가 봐도 노아비크가 나쁘잖아!’

    다만 그 사실에 붙인 제멋대로 붙인 이유가 진실과 다를 뿐이었다. 그러나 묘하게 진실과 맞물려서 모든 문장이 참인 것처럼 느껴지는 효과가 있었다.

    “이런.”

    베이든은 페이건의 옆에 서서 서글픈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희망을 가지게나. 정말 엘로이즈 님을 빼돌렸다면 공작님께서 이 모양 이 꼴은 아니라는 걸 모두가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 희망 지금 박살 내 드리죠.”

    페이건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공작님은 여기 안 계십니다. 그러니 그 모양 그 꼴을 대중에게 보여 줄 수가 없습니다.”

    “뭐?”

    베이든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아니, 몇 개월째 칩거하고 있을 때는 언제고 황궁에서 사람이 왔는데 요하네스가 없다니!

    “그, 그럼 누가 칙령을 받지? 이대로 문을 안 열고 있으면 역모를 인정하는 꼴이야! 죄목을 하나 더 만들어 주는 꼴이라고!”

    그 어느 상황이 닥쳐도 요하네스가 알아서 잘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어서 끝까지 느긋했던 베이든은 허둥지둥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럼 레오 도련님… 도련님이라도 가문을 대표해서 나가야 하는데. 적어도 노아비크 성을 가진 직계이니….”

    “그 희망도 박살 내 드리겠습니다. 레오 도련님도 데리고 가셨습니다.”

    드디어 베이든이 할 말을 잃었다. 열리지 않는 공작저 문 앞에서 군중들이 모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찔리는 것이 있어서 저러는 것이라느니, 지금 증거를 은폐하고 있다느니, 역시 악령을 불러낸 노아비크의 후손이라 음흉했다느니.

    그동안 악령으로부터 북부를 지키고 또 솔선수범하여 신전의 현상 수배범을 추적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노아비크에게는 악령을 이 세계에 불러들인 원죄가 있었으니.

    반면 악령이 출몰한 뒤 노아비크와 함께 축복을 받아 이 세계의 회복에 앞장서는 의무를 지니게 된 벨리아나스 황족에게는 언제나 경탄과 감사가 뒤따랐다.

    게다가 황제가 병환에 눕고 나서 대리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는 디에고는 국민들에게 인기가 나쁘지 않았다.

    뒤로 얼마나 나쁜 짓을 하고 있든지, 어쨌든 들키지는 않았으니까. 게다가 군중들을 현혹하는 말으로 이미지 관리도 꽤 잘했다.

    “…황실의 입김이 가장 센 수도만 아니었어도.”

    베이든은 처참하게 중얼거렸다.

    “여기가 북부였다면 이렇게까지 몰리지는 않았을 텐데….”

    드디어 공작저 밖에서, 황실 기사단의 최후통첩이 이어졌다.

    10분 내에 이 문을 열지 않으면 강제로 문을 열고 저택을 수색한 뒤 체포한다는 내용이었다.

    “페이건, 미안한데 하나만 더 희망을 품어도 되겠나. 공작님을 믿긴 믿는데, 내가 좀 불안해서 말이지.”

    베이든은 아주 난감한 얼굴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공작님께서 자네에게 기가 막힌 명령을 내리고 가신 것 맞지? 설마 이렇게 버티고 서 있는 게 명령의 전부는 아니지?”

    그리고 페이건은 세 번째로 베이든의 기대를 박살 냈다.

    “전부인데요. 그냥 끝까지 문 열어 주지 말고 버티면서 시간만 끌라고 하셨습니다.”

    “헉!”

    베이든이 아찔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탄식했다.

    “우리를 버리고 두 분이서만 튀신 건가! 역시 악… 아, 미안하네. 이건 내가 아니라 그 할망구의 의견인 것 같아.”

    페이건이 ‘정확히 말하면 두 분이서만 가신 건 아니고 세예나도 대동하셨다.’라고 대답하려던 때였다.

    “어?”

    대문 밖에서 문을 열어 주지 않는 노아비크 일가를 욕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저거, 저거… 저 사람들… 저 사람들, 노아비크 공작님과 그 아드님 아니야?”

    ⚜ ⚜ ⚜

    나는 최대한 꾸물거리며 비질을 했다.

    쓰레받기 안에는 적당히 쓸어 담은 먼지들이나 낙엽 같은 것과 함께 이것저것 잔뜩 쑤셔 넣어서 터질 것만 같은 가방이 들어 있었다.

    신전의 정문 앞을 쓰는 척하며 일단은 신전 밖으로 나왔지만, 이대로 냅다 뛰어서 도망가기에는 정문을 지키고 있는 성기사들에게 잡힐까 봐 무서웠다. 아직도 내게 실탄은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눈치를 보며 은근슬쩍 조금씩 신전 정문에서 멀어지고 있을 무렵, 갑자기 광장에 있던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들었어? 황실 기사단이 파견됐대!”

    “노아비크 공작저로 가고 있다는데?”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나오셨다고 하더라고.”

    “뭐? 설마 역모인가?”

    “구경 가자! 얼른!”

    아직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무슨 구경거리라도 난 듯 집에서 뛰쳐나오기까지 했다. 얼마 되지 않아 거리가 구경 나온 사람들로 꽉 차기 시작했다.

    “어머, 나도 구경하고 싶은데!”

    그리고 신전 앞까지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하자, 나는 빗자루를 내던지고 사람들 사이에 끼었다.

    성기사들이 ‘어이, 어디 가!’라고 외쳤지만 이미 인파에 휩쓸린 나를 곧바로 잡지는 못했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적당히 숨어서 머릿수건과 얼굴을 가리던 천을 벗고 골목길로 숨어 들어가 대충 걸치고 있던 사제복마저 벗어 던졌다.

    ‘이미 늦었어. 어쩌지?’

    차분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이미 머릿속은 패닉이었다. 이렇게 빠르게 디에고가 움직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디에고보다 먼저 공작저로 달려가 요하네스에게 위험을 경고해 주려고 했는데… 들키지 않고 잘 빠져나오려다가 좀 늦었다.

    그러나 후회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신중을 기하지 않았다면 신전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했을 테니까.

    ‘부디… 부디 미리 대비를 해 놓고 있어야 할 텐데.’

    결국 또 요하네스의 비범함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희망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해도 도저히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애초에 왜 수도에서 칩거를 해!’

    쓰레받기 속에서 가방을 챙겨 들며 나는 속으로 한탄했다.

    ‘그냥 얼른 몰래 북부로 도망가 버리지! 북부에 있었다면 이런 꼴까지는 안 당했을 텐데!’

    설마… 설마 나를 기다린 건 아니겠지. 없어졌던 바로 그곳으로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나는 이제 더 이상 그에게 쓸모가 없을 텐데, 설마 그렇게까지 멍청하게 나를 기다리지 않았겠지….

    가방까지 챙겨 들고 다시 군중 속으로 섞여 들었다. 거리가 마치 축제 때처럼 붐볐다.

    짧은 단발머리에 화려하지 않은 검은색 평상복을 입고 있는 내게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구경 나온 평민이라고 생각하기에 적당한 외양이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노아비크 공작저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노아비크를 욕하고 있었다.

    애초에 악령을 이 땅에 불러온 사람의 후손 아니냐느니, 누구에게나 오만했다느니, ‘푸른 루비’를 지금껏 못 잡은 게 일부러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 아니냐느니, 벨리아나스 황가를 상대로 역모를 꾀하다니 아주 괘씸하다느니….

    억울함에 눈물까지 나올 것 같았다.

    어둠의 세력과 손을 잡고 나같이 힘없는 고아들을 팔아넘긴 사람이 바로 황태자인데.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악령을 조종하여 완벽한 공포 독재를 꿈꾸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들이 그토록 경외하는 디에고 벨리아나스인데.

    오히려 묵묵하게 북부를 지키고 악령을 사냥하며 누구보다도 평화를 위해 침묵하는 자들이 노아비크인데, 정말 다들 아무것도 모르고….

    울컥하는 마음을 다잡으며 인파에 섞여 일단 공작저 쪽으로 향할 때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지금 남아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요하네스에게 가고 싶었다.

    ‘뭔가…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끝없이 솟구치는 무력감을 무시하며 나는 나 자신을 달랬다.

    ‘시간의 돌이 나를 그때 그 장소로 보내 줬잖아. 그래서 그 누구도 접할 수 없는 정보를 많이 들었잖아. 그러니까 분명히… 분명히 뭔가 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사람들을 헤치며 노아비크 공작저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였다. 노아비크 공작저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어?”

    누군가가 고개를 들며 크게 소리쳤다.

    “저기… 저기, 노아비크 공작님 아니야? 그 뒤의 꼬마는 아드님이신가?”

    그 사람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바로 ‘꽃의 탑’이었다.

    광장 중앙에 우뚝 선 수도의 상징. 외부에 올라가는 계단이 나선으로 둘러져 있고, 맨 위에는 벨리아나스의 흰 꽃이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은, 수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가장 높은 탑.

    “아….”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잠시 멍하니 탑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수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고 건국제 때 사람이 들끓었던 ‘꽃의 탑’이라고 해도, 축제가 다 끝난 이른 아침부터 그 높은 곳을 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그 아무도 없는 ‘꽃의 탑’의 나선형 계단을 요하네스가 올라가고 있었다. 그 뒤에는 레오가, 또 그 뒤에는 세예나가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니까 레오를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이 보호하는 것처럼.

    “…그렇구나….”

    요하네스가 왜 레오를 데리고 ‘꽃의 탑’을 오르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거야말로 요하네스가 디에고의 뒤통수를 가장 확실하게 칠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가 이렇게까지 했다는 건….

    “진짜 막다른 곳에 몰린 모양인데.”

    나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저건, 정말 요하네스가 최후의 순간에 쓰려고 생각한 방법일 텐데.

    그리고 그 이후 곧바로 요하네스를 쫓아서 ‘꽃의 탑’에 오르기 시작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디에고였다. 모두가 그 모습을 보면서 흥미진진하다는 듯이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와, 정말… 수도 사람들 앞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어?’

    그리고 그 사태를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보고 있다 보니,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사실 레오 노아비크가 없어도 해결책은 있지요…. 벨리아나스의 힘을 증폭시키는 곳이 있기는 하니까요.”

    “무슨…. 모든 수도 사람들 앞에서 황족이 악령을 조종하려고 한다고 알릴 일 있나.”

    나는 가방을 추켜들었다. 이 대화 내용은 요하네스가 꼭 알아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바쁘게 ‘꽃의 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탑은 높았고 나선형 계단은 가팔랐다. 결국 중간부터는 요하네스가 레오를 안고 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요하네스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탑을 걷지 않고 오르는 수는 없었다. 그것은 저 밑에서 따라오고 있는 디에고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속도를 따지면 요하네스와 세예나가 빠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튼튼하기로 유명한 북부 혈통 중에서도 최정예였기 때문이다.

    “레오.”

    빠른 속도로 계단을 오르면서 요하네스는 품 안의 레오에게 조용히 말했다.

    “어쩌면….”

    레오는 빤히 요하네스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너를 이용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요하네스는 그 눈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면서 말을 이었다.

    “미안하다. 그래도 이게 최선인 것 같구나.”

    “…….”

    “물론 끝까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괜찮아요.”

    요하네스의 고요하지만 참담한 말에 레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공작님은 제게 최선을 다하셨잖아요. 잘 알아요.”

    레오는 요하네스의 목을 끌어안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저는 공작님을 믿어요.”

    요하네스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 절대적인 신뢰에 최선을 다한 것은 맞는가.

    이렇게까지… 기약 없이 여기서 엘로이즈를 손 놓고 기다려야만 했을까. 디에고가 과격한 수를 쓸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면서.

    역시 레오를 데리고 밤에 몰래 북부로 갔어야 했나. 그리고 꽁꽁 문을 걸어 잠근 채 외부인을 철저히 통제했어야 했나.

    요하네스는 레오의 눈을 잠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래 봤자… 대체 언제까지.’

    북부에 틀어박힌다고 해 봤자 노아비크는 벨리아나스의 밑이다. 그렇게 북부에서 5년이고 10년이고 버틴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도 아니었다. 디에고는 악령 조종 실험 성공을 목전에 둔 것 같고,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북부는 그 실험의 결과로 악령의 소굴이 될 텐데.

    요하네스가 저택에 틀어박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정보를 모으고 추론을 거듭했다.

    그래서 디에고와 신전이 합작하여 거의 실험을 성공 직전까지 완성한 것도 알아챘다. 맨 처음 악령이 이상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몇 달 전보다 훨씬 조종 방법이 정교해졌을 거라는 사실도.

    ‘어차피 언제까지나 피할 수는 없다.’

    탑을 오르는 데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건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디에고도 마찬가지였다. 디에고 역시 저 밑에서 어쩔 수 없이 그 긴 계단을 급히 뛰어오르는 중이었다.

    “레오.”

    요하네스는 레오를 꼭 안고 말했다.

    “네 어머니는 너를 많이 사랑했고, 그래서 널 꼭 지켜 달라고 내게 몇 번이나 부탁했지.”

    새벽같이 일어나 요하네스와 ‘꽃의 탑’으로 향할 때에도 침착했던 레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요하네스가 그의 어머니에 대해 말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난 너를 지킬 거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공작님….”

    “엘로이즈도… 널 꼭 지켜 달라고 부탁했으니까.”

    엘로이즈라는 이름에 레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였다. 실제로 몇 번이나 눈앞에서 그를 구해 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요하네스 역시 엘로이즈라는 이름을 내뱉자마자 가슴이 찡하게 울려 왔다.

    어이없게도 이렇게 급박하고 몰려 있는 상황에서도 그녀가 보고 싶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그녀를 끝내 못 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또 그녀가 언젠가 돌아왔을 때에 그를 만나고 싶어 할까 봐, 그 아쉬움 한 자락이 걱정됐다.

    아직 못 한 말이 너무 많은데.

    혹시라도 그 위태로운 행복이 조금이라도 깨질까 봐 진심도 다 전달하지 못했는데.

    엘로이즈는 알까. 하룻밤, 그녀와 그가 서로를 서로에게 새겼던 그 밤의 기억이 그동안 그에게 얼마나 큰 환희와 고통을 주었는지.

    드디어 행복의 절정을 맛보았다고 생각한 그 밤이 지나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 엘로이즈가 도망쳤으니 그녀는 그에게 상당히 잔인했던 셈이었다.

    그리고 요하네스는 드디어 레오를 안고 마지막 계단에 올랐다.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른 아침부터 광장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리고 탑 중간쯤에 디에고가 황실 기사단을 이끌며 탑을 올라오고 있었다.

    “와라, 디에고 벨리아나스.”

    요하네스는 황금빛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선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군중을 이용하는 건, 너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 ⚜

    탑을 올라가는 디에고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냥 올라가자마자 죽여.”

    그가 신경질적으로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황실 기사단에게 말했다.

    “어차피 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시민들이 알 게 뭐야.”

    가파른 탑을 최대한 빠르게 올라가느라 숨이 찼다. 디에고는 이를 갈며 거듭 명령했다.

    “탑에 올라가자마자 실수인 척 애는 밑으로 떨어트려 죽이고, 요하네스도 사살해. 요하네스가 탑 위에서 역모를 인정하고 황실을 모욕했다고 하면 그만이야.”

    어차피 높은 탑 위에서 하는 평범한 대화가 광장에 들릴 리 없었다. 목소리 증폭 마정석이 있는 것이 마음에 살짝 걸렸지만, 벨리아나스인 자신이 작동시키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요하네스 노아비크, 감히….”

    디에고는 위를 올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감히 네가… 벨리아나스를 상대로 협박을 시도해?”

    레오 노아비크를 벨리아나스의 꽃 근처로 데려가다니, 요하네스의 의도는 명백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레오가 벨리아나스의 핏줄을 이은 것을 증명할 생각이겠지.

    실제로 요하네스가 레오를 지금까지 철저하게 숨겨 온 것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 요하네스 역시 위기에 처했다는 뜻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레오 노아비크가 벨리아나스의 직계임을 밝힌다면… 특히나 그들에게 역모죄를 씌우려는 지금….

    ‘분명히 무슨 수가 있는 거야.’

    디에고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좋지 않은 예감에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요하네스 노아비크가 내 뒤통수를 칠 만한 뭔가를 갖고 있는 거야.’

    군중을 등에 업고 공작저로 들어갔지만, 군중이 무서운 것은 디에고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황실을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그는 아직 황제가 아니었다.

    레오를 대놓고 벨리아나스의 꽃 앞으로 데려간다는 생각은 조금도 해 보지 못했는데, 요하네스가 대체 어떤 카드를 들고 있을지 몰라서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무슨 짓을 하기 전에, 무조건 죽여. 아무 짓도 못 하게 하란 말이다.”

    디에고는 초조하게 몇 번이나 강조했다. 무슨 짓을 할까 봐 일단 쫓아가기는 하는데 이상하게 요하네스의 수에 당한 느낌이었다.

    물론 그를 따르는 황실 기사단의 표정은 당연히 어두웠다.

    슬프게도 요하네스와 세예나 두 명을 상대로 디에고의 명을 수행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수적으로 너무나 우세하니 결국에는 진압을 하겠지만, 디에고가 원하는 대로 올라가자마자 곧바로 처치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진압도… 설마 가능할까….’

    요하네스 노아비크는 바보가 아니었다. 세예나 하나만 데려왔다는 건 더 이상의 병력은 걸리적거린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탑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요하네스는 마치 지옥을 지키는 수문장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너희 따위는 상대가 안 된다는 듯한 오만한 자태, 청량한 아침 공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선득한 분위기, 호위를 하나밖에 두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태생적으로 남에게 군림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위압감.

    디에고는 잘 모르겠지만, 몸을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요하네스의 괴물 같은 실력은 유명했다. 실제로 그를 곧바로 제압하기 위해서라면 이것보다 세 배는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들이 탑을 올라가면서 요하네스의 목소리가 들릴 정도가 되었을 때였다.

    레오는 탑 꼭대기에 있는 꽃 바로 앞에서 세예나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당장 고개를 들어서 볼 수 있는 사람은 요하네스뿐이었다.

    “전하.”

    요하네스가 그들을 내려다보며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기회를 드리지요.”

    마치 아랫사람에게 큰 자비라도 베푼다는 어조였다. 디에고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할 정도로 치욕스러워하는데 요하네스의 느릿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대로 대충 웃고 악수 한 번 하고 내려간 뒤 모든 오해가 풀렸다고 하시면 이전까지의 위태로운 평화를 약속드리겠습니다.”

    “…너… 지금… 무슨….”

    “하지만 정말로 끝을 보신다고 하면.”

    비릿하게 웃는 요하네스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짝 휘날렸다.

    “정말로 제국의 평화를 위해 역모라도 일으킬 수밖에.”

    “요하네스 노아비크!”

    그 말에 디에고가 분노에 차 외쳤다.

    “네가… 네가 그러고도 노아비크인가? 제국을 수호하고 벨리아나스에 참회하는 노아비크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

    디에고의 비난에도 요하네스는 아무런 타격이 없어 보였다. 다만 단검을 품에서 하나 꺼내서 무심하게 휙 던져 가장 앞에 있던 병사 하나를 맞추어 쓰러트렸다.

    탑을 오르던 대열의 순간적인 무너지는 것을 여유롭게 바라보고 있던 요하네스가 피식 웃으며 나른하게 대답했다.

    “그 자격 포기한 지가 언제인데. 그리고 황태자 전하께서도 이미 벨리아나스의 사명 같은 건 안중에도 없지 않으십니까.”

    천천히 검을 빼어 드는 그의 표정은 한결같이 평온했다.

    “어쨌든 협상은 결렬됐군요.”

    그리고 디에고와 함께 탑을 오르던 황실 기사단은 그 평정심이 오히려 더 무섭다고 생각했다. 이미 요하네스 노아비크가 만든 판 위에서 놀아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그의 얼굴이 어느 순간 곧바로 당혹감에 물들었다. 순간적인 그의 분위기 변화를 느낀 기사 몇 명이 그의 시선을 따라 탑의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어? 전하! 민간인이… 민간인이 올라오는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탑을 통제하라고 했잖아!”

    모두의 시선이 못 박힌 그곳에서는, 어깨까지 오는 짧은 금발을 한 체구가 작은 여인이 정신없이 달려오고 있었다.

    세예나와 레오는 탑 꼭대기의 중앙에 위치한 ‘벨리아나스의 꽃’ 바로 앞에 있었다.

    그러므로 광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모습이 보일망정 나선형 계단을 올라오는 디에고와 황실 기사단의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계단의 상황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디에고가 탑을 올라오며 요하네스와 짧은 대화를 주고받을 동안, 세예나는 심호흡을 하며 검을 잡은 채로 레오의 앞에 서 있었다.

    세예나는 요하네스의 기사단 중에서도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최측근인 페이건이 아닌 그녀를 대동했다는 것은 오늘 전투가 상당히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정말 역모를 생각하셨다면 나 하나만을 데려오셨을 리 없는데.’

    레오를 바로 곁에 두고, 세예나는 검을 고쳐 잡으며 불안함을 애써 잠재웠다.

    ‘무슨 생각이 있으시겠지?’

    요하네스는 세예나에게 그저 레오를 지키라는 명령밖에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세예나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게다가 상대가 황실 기사단이라면… 정말로 이것이 노아비크와 벨리아나스의 정면충돌이라면….

    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는 노아비크에 충성하는 북부의 기사였다. 요하네스든 레오든 그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하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요하네스가 차갑게 마지막으로 선언했을 때였다.

    “어쨌든 협상은 결렬됐군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세예나의 뒤에서 망설이던 레오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뒤를 돌았다. 세예나가 ‘공자님? 왜 그러시죠?’라고 채 묻기도 전이었다.

    레오가 탑 꼭대기의 커다란 꽃에 작은 손을 갖다 대었다. 마치, 건국제 때 디에고가 한 것처럼.

    “고, 공자님!”

    그리고 그 즉시 광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탄성이 터져 나와 마치 탑이 흔들릴 것만 같았다.

    “…왠지….”

    어느새 새빨갛게 물든 꽃의 앞에서 레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럴 것 같더라고.”

    세예나는 차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눈으로 레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만히 꽃에 손을 대고 있는 작은 소년의 얼굴은 담담했으나 오히려 그래서 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탑 꼭대기에 부는 바람 한 자락이 레오의 머리카락을 살짝 건드렸다. 태양만큼 붉게 물든 꽃, 그 앞에 선 아름다운 소년. 세예나는 자신도 모르게 경건한 마음이 들어서 무릎을 꿇을 뻔했다.

    벨리아나스….

    고대 언어로 ‘신의 선택을 받은 자’.

    그녀는 오래도록 노아비크에 헌신해 왔고 또 요하네스의 충복으로 살았으나 이토록 차원이 다른 경외감을 느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수도의 제국민들이 왜 그렇게 황가를 사랑하는지, 건국제 등의 행사에서 황족이 나타나 벨리아나스 꽃을 붉게 물들이는 광경을 손꼽아 기대하는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사실 ‘꽃의 탑’에 레오와 함께 올라올 때부터 혹시 레오가 벨리아나스의 피를 이은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한 것은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계산하고 움직이는 요하네스가 괜히 레오를 데리고 ‘꽃의 탑’에 오를 리가 없었으므로.

    그리고 평정심을 잃은 채 미친 듯이 쫓아오는 디에고와 황실 기사단을 보면서 조금 더 확신했었다.

    “공작님은 바보예요.”

    레오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한테 이걸 만지라는 말도 끝까지 못 하고.”

    그 말에 세예나는 레오가 왜 갑자기 돌발 행동을 했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탑에 오르면서도 요하네스는 끝까지 레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렸지만 그래도 정말 최후의 최후까지 그의 출생을 알리고 싶지 않아 하는 듯한 태도였다.

    “아마 계속 못 했겠지요.”

    그리고 레오는 요하네스의 ‘협상은 결렬되었다.’라는 말을 듣자 바로 실행에 옮겨 버린 것이다.

    ‘…그럼 공자님은… 그러면….’

    세예나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레오는 노아비크 원로원에서 인정한 노아비크의 직계였다.

    벨리아나스에는 현재 직계 여성이 존재하지 않으니 경우의 수는 하나였다.

    그리고 노아비크와 벨리아나스 양쪽 집안의 직계이기 위해서는….

    ‘설마 레이나 공녀님의….’

    벨리아나스의 황실 기사단은 공식적으로 황족을 공격하지 못한다. 그들은 벨리아나스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많은 군중들 앞에서 기사단은 레오를 해칠 수 없다. 적어도 레오의 안전만은 보장된 셈이었다.

    ‘하,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상황을 완전히 반전시키기 어려운데?’

    겨우 레오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건가? 그럼 탑에서 내려간 그 이후는? 세예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요하네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요하네스의 시선은 탑 아래에 못 박혀 있었다.

    ‘이게… 무슨?’

    이런 중대한 시기에 저렇게 얼어 있을 일이 뭐가 있나? 게다가 이렇게 군중들이 웅성이는데, 바로 뒤에서 레오가 탑의 꽃을 붉게 밝힌 것도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세예나가 조심스럽게 요하네스를 부르려고 할 때였다. 요하네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엘로이즈?”

    그리고 거짓말처럼 엘로이즈의 뒤에서 새된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있는데!”

    뺀질거리는 얼굴의 시온 르노아로였다.

    ⚜ ⚜ ⚜

    노아비크 공작저에 요하네스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난 뒤 내가 곧바로 향한 곳은 이웃집이었던 시온의 저택이었다. 바로 옆이니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엘로이즈? 너 대체….”

    놀랍게도 시온과 빈센트는 남부로 내려가지 않고 그대로 저택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구는 그들을 보며 더 황당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왜 여기 있어?”

    “그럼 어딜 가는데?”

    “밖에 구경 안 가? 난리가 났는데?”

    “엘로이즈.”

    시온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이 집에서도 잘 보여. 너도 어디 숨어 있다가 이 난리가 나니까 구경하러 온 것 아니야?”

    “…구경할 생각은 있었어?”

    “당연하지. 드디어 노아비크가 망하는데. 아주 고소하다, 야.”

    시온은 오랜만에 나를 보면서도 천연덕스럽게 대화를 이어 갔다. 물론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던 빈센트는 시온보다는 정상인이라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근데 너…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거면….”

    정확한 날짜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 지난 것은 확실했다. 나는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 ‘시간의 돌’은 받았고, 나 그 빌어먹을 마법진 지웠어. 이제 심장이 아주 튼튼할 거야, 아마도.”

    “…요하네스 노아비크가… 줬다고?”

    “응. 그래서 말인데.”

    나는 빈센트에게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시간이 없는데 얼른 이 총에 맞는 총알 좀 줘. 최대한 많이.”

    “…뭐? 실탄?”

    “어. 얼른 줘.”

    사실 빈센트와 시온에게도 할 말이 많았지만, 그리고 그들도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아 보였지만, 지금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감격적인 재회를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빈센트와 시온은 한때 시간이 생명이었던 암흑 조직에서 일해 본 사람들답게 감정적인 교류보다는 주어진 임무에 충실했다.

    얼떨떨한 얼굴로 수많은 질문을 쏟아 내면서도 빈센트는 총알을 잔뜩 갖다 주었고, 나는 그 총알들을 완전히 장전한 뒤 터질 것 같은 가방에까지 꾹꾹 쑤셔 담았다. 그리고 곧바로 뒤를 돌았다.

    “그럼 다음에 봐!”

    “엘로이즈?”

    “살아 있다면 말이야.”

    “어딜 가는데!”

    빈센트의 다급한 질문에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남편 구하러.”

    이상하게 빈센트의 얼굴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기색이 보였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시온이 재빠르게 빈센트의 앞에 서며 얼른 가라고 손을 내저어 보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정문을 나가는 순간 시온이 따라붙었다.

    “엘로이즈, 마지막으로 내가 도움 될 일은 없을까? 너도 저 ‘꽃의 탑’에 올라가려는 거라면, 내가 황궁 기사단의 위조 신분증을 들고 있으니 입구의 경비병을 따돌리는 일 정도는….”

    “아.”

    당연히 혼자 가려던 나는 시온을 가만히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체 황궁 기사단의 신분증은 언제 위조해 둔 건지.

    궁금한 게 많았지만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는 어쨌든 그의 손을 빌려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사양하지 않고 빠르게 말했다.

    “그럼 도와주면 고맙겠어. 같이 가자.”

    물론 입구에서 우리를 막는 관리인이 하나 있었지만 시온이 위조된 기사단의 신분증을 내밀자 그대로 물러났다. 정말 디에고의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는 당사자들이 모두 탑을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와 시온은 함께 ‘꽃의 탑’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사격을 잘한다고 해서 다른 신체적 능력이 뛰어나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끔찍하게 많은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면서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어쩌지 못했다.

    다만 마치 만성 질환처럼 붙어 있던 심장의 통증이 완전히 사라진 것 하나만으로 힘을 내서 그 끔찍한 계단을 하나하나 오를 수 있었다.

    “어휴, 다리 터질 것 같다.”

    내가 별다른 투정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던 것은 뒤에서 시온이 충분히 투덜댄 탓이기도 했다.

    “…아까 요하네스는 레오를 안고서도 빠르게 잘만 오르던데….”

    “그건 그 인간이 괴물이어서 그런 거고.”

    시온이 짜증스럽게 투덜거렸다.

    “어린애는 고사하고, 서류 한 장도 무거운 것 같다.”

    탑을 오르는 동안, 시온은 내 뒤에서 열심히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바로 내가 신전에서 가지고 온 악령에 대한 최근 연구 결과 보고서였다.

    시온은 위조 전문가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문서를 나보다 훨씬 더 많이 다뤘었고, 따라서 속독과 암기에도 능했다. 범죄도 머리가 좋아야 계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탑에 오르면서 내용이라도 어떻게 파악해 보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리고 이거 되게 어려워… 상징적인 말이 많아서.”

    “그래도 일단 머리에 쑤셔 넣어 봐.”

    그렇게 꽤 올라간 후에야 황실 기사단과 요하네스가 나와 시온의 정체를 눈치챈 것 같았다. 수군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선이 몰렸다.

    ‘심지어 좀 늦긴 했지…. 근데 어쩔 수 없었어.’

    공작저에서 바로 출발했다면 조금 더 빨랐을지 몰라도, 실탄 하나만 가지고 이 상황에 끼어드는 건 자살행위처럼 느껴졌다. 그러므로 시온의 집에 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

    그리고 드디어 요하네스와 눈이 마주쳤다.

    “엘로이즈?”

    그가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다소 쉰 목소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디에고를 상대하면서도 느긋하고 오만했던 그의 얼굴은 더 이상 여유롭지 못했다. 나조차도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얼굴을 하고,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도 있는데!”

    시온이 제대로 산통을 깨고 싶다는 듯 외쳤지만 전혀 들리지 않았다.

    시간으로 치면 얼마 되지 않았는데, 너무 오랜만에 만난 것 같아 갑자기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요하네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 꽤 많은 거리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이 다소 초췌하다는 게 바로 느껴졌다. 상황과는 맞지 않는 걸 알면서도 마치 우리 둘만 빼고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요하네스 노아비크, 당신을 떠나면서도 당신이 보고 싶었어.

    당신에게 배신당했다고 믿었을 때에도 당신을 사랑했는데.

    물론 감상은 길지 못했다. 워낙에 상황이 긴박했던 것이다.

    “어?”

    나는 그의 뒤에 보이는 커다란 ‘벨리아나스의 꽃’의 색깔이 변하는 것을 보며 그대로 현실로 돌아와 경악했다.

    분명히 흰 종이처럼 하얗게 빛나던 그 커다란 꽃은 새빨갛게 물들어서 모든 사람의 시선을 빼앗고 있었다.

    정작 건국제 때 지금 유일하게 벨리아나스의 꽃을 붉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며 추앙받았던 디에고는 나와 같이 탑을 오르고 있는 신세인데!

    “…레오?”

    멍하니 중얼거렸다. 꽃을 그렇게 붉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레오뿐이었다. 요하네스가 레오를 데리고 ‘꽃의 탑’에 오를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아직 디에고와 본격적인 마찰도 시작되지 않았는데 저렇게 일을 친다고?

    ‘설마 레오 독단인가.’

    요하네스는 정말 끝의 끝까지 레오를 이용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아마 레오가 충동적으로 한 일일 것이다.

    역시 시온이 예전에 한 말대로, 아이들을 무슨 계획에 끼워 넣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아이들은 어떤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 그러면… 이제 대화나 타협의 여지도 없다는 건데….’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 일을 어떻게 끝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엄청난 상황을 잘 마무리할 수 있는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보는 눈은 끔찍할 정도로 많고, 디에고도 요하네스도 둘 다 막다른 길에 선 셈이었다.

    시온 역시 일이 점점 더 커진다는 것을 느꼈는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게 수습은 되는 건가.”

    이미 탑 밑에 있는 사람들은 레오의 정체에 대해서 수군대고 있었다. 수많은 추측이 오고 가는 와중에 레오가 디에고의 자식이 아니냐는 끔찍한 소리까지 들렸다.

    “와.”

    시온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극단으로 상상하는 건 알아줘야 해. 조금만 놔두면 레오가 너와 디에고의 아들이 되겠어.”

    “네가 제일 극단인 것 같은데.”

    물론 지금 이 상황이 가장 당혹스러운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디에고였다.

    “당장 죽여! 얼른! 요하네스 노아비크를 죽이라고!”

    탑에 거의 다 오른 디에고가 소리쳤다. 그는 분노에 휩싸여 정당한 절차고 뭐고 기분 나쁜 놈부터 죽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동시에 황실 기사들이 요하네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황실 기사단은 차마 자신이 벨리아나스임을 방금 증명한 레오를 해칠 수는 없었으나, 요하네스 노아비크라면 사정이 달랐으니까.

    “설마 혼자 있는 놈 하나도 못 해치우는 건 아니겠지!”

    혼자 있는 놈….

    그 말에 이제야 겨우 탑의 중간 정도에 오른 상태였던 나는 그대로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들고 있던 총을 장전했다.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이 정도 사정거리면 충분했다.

    “누가….”

    가방에 가득한 총알이 그 어느 때보다도 든든했다.

    디에고는 세예나가 레오에게 묶여 있으므로 사실상 요하네스가 혼자라고 판단한 듯했지만, 그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 줄 차례였다.

    “누가 요하네스가 혼자래?”

    그리고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와.”

    내 뒤에서 시온이 그 와중에도 정신없이 보고서를 팔랑거리며 중얼거렸다.

    “오늘 수도 사람들 좋은 구경하네. 누가 아침부터 이런 광경을 볼 거라고 예상했겠어? 나조차도 못 했는데.”

    시온의 말마따나 광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며 놀라고 있을 것이 뻔했다.

    여자 하나가 갑자기 그 수많은 황실 기사단 사람들을 처치하는 모습이라니 놀랍긴 하겠지.

    아래에서는 내가 총을 정확히 명중하고, 또 위에서는 요하네스가 한 명 한 명 차분히 기사단을 쳐 내기 시작하면서 디에고를 감싸고 있던 병력이 순식간에 줄기 시작했다.

    우리를 향해 드문드문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으나 위에서 요하네스가 나를 공격하려 하는 병사부터 처리해 주어 그마저도 금방 끊겼다. 시온은 조금도 긴장감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엘로이즈, 드디어 요하네스 노아비크랑 합을 맞춰 보는 기분이 어때.”

    생각해 보니 그동안 한 번도 요하네스와 무슨 일을 함께해 본 적이 없었다. 쫓기고 쫓기는 관계에서 서로 경계하거나, 혹은 뒤에서 몰래 도와주기만 했었다.

    “오랫동안 의식하던 사이라서 그런지 잘 맞네.”

    나는 장난스럽게 대꾸하며 실탄을 장전했다.

    “근데 그 일이 황실 기사들을 해치우는 거라니….”

    “그러니까 말이다. 너희가 난생처음으로 합을 맞춰 보는 게 반역이라니. 아주 상징성 있고 좋다, 야.”

    시온이 서류를 놀라운 속도로 넘기면서도 입을 쉬지 않으며 떠들었다.

    “그리고 이로써 나 역시 요하네스 노아비크가 이기지 못하면 꼼짝없이 역모죄로 감옥에 끌려 들어가겠군.”

    “적어도 억울하지는 않겠네. 사실 언젠가는 갈 줄 알고 있었잖아?”

    나는 여유롭게 대꾸해 주며 침착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디에고를 명중시킬 수는 없었다. 몇 겹이나 되는 병사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멀리 황궁에서 지원군이 달려오기 시작했으나 당연히 높은 탑을 오르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총알을 다 쓰고 대다수의 병력을 처리한 나는 헉헉거리면서도 다시 열심히 계단을 오르며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뒤에서 시온이 따라오며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근데 진짜 무슨 속셈이야? 요하네스 노아비크는 대체 어쩌려고 저러는 건데?”

    사실 나도 그게 궁금했다.

    이제 병력이 많이 줄었으니 요하네스는 쉽게 디에고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눈앞에서 디에고를 해치워 봤자 좋은 결과를 얻을 수는 없었다.

    아직 역모 혐의도 벗지 못했는데 디에고를 죽여 버리면 정말로 황족 시해죄로 잡혀 들어갈 것이었다.

    내가 마지막 실탄 한 발을 남겨 두지 않은 건 바로 그 이유에서였다. 어차피 디에고를 내가 죽여 봤자 상황이 해결되지 않을 테니까. 요하네스가 언제든지 디에고를 죽일 수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

    아무리 직계가 디에고뿐이라고 해도 방계에도 황위 계승권을 가진 이가 존재했다. 황위 계승 서열 순위가 높은 자가 황위를 이어받으면 제일 먼저 노아비크를 쳐낼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이제 레오 노아비크라는 다른 직계가 존재한다는 걸 전 국민이 알았다고는 하지만 아무런 명분 없이 황태자를 죽인 반역자가 북부에서 내내 키운 꼬마를 누가 제대로 된 황족으로 인정하겠는가.

    오히려 반역죄가 함께 덧씌워져 나중에 실형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다. 어쨌든 제국은 나름의 체계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국가였고, 황태자 하나 죽인다고 해서 모든 제국을 휘어잡을 수는 없었다.

    ‘정말로 디에고를 없애려면 그때 말했던 것처럼 암살을 했어야지…. 물론 불가능했겠지만.’

    어쨌든 남들 앞에서 디에고를 죽여 봤자 노아비크 공작가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물론 악령에 대한 실험은 중단시킬 수 있겠지만 그걸 누가 알아준단 말인가.

    “알지? 요하네스 노아비크는 지금 수도에서 여론전으로는 완전 밀려. 황태자와 맞설 수 있는 명분이 하나도 없다고.”

    시온은 보고서를 끊임없이 바꿔 들면서도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말했다.

    “그런데 이 상황을 어떻게 반전시킬 거야?”

    “글쎄….”

    수도에서 정치적 기반도 없고, 국민적 지지도 못 받는 요하네스가 지금 여론을 바꿀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여기는 북부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여론과 명분을 둘째 치고서라도 더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디에고도….’

    불길한 예감을 도저히 떨쳐 버릴 수 없어서 마른침이 넘어갔다.

    ‘저렇게 아무 생각 없이 다혈질로 쫓아올 사람은 아닌데….’

    디에고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물론 지금 많이 화가 난 것 같기는 했지만, 열받았다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막무가내로 요하네스를 쫓아올 사람은 아니었다.

    ‘분명히 서로가 짐작할 수 없는 카드를 하나씩 쥐고 있는 거야.’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비밀로 한 결정적인 그 카드를 제삼자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나는 부디 요하네스의 카드가 훨씬 더 강력하기를, 그리고 디에고가 예상하지 못했기를 빌면서 열심히 다리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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