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주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계속해서 느껴지던 심장 통증이 사라져서 그런지 한동안 현실감이 없었다.
‘뭐, 뭐야? 돌아온 건가?’
사방이 캄캄해서 눈이 어둠에 적응하는 데에 꽤 시간이 걸렸다. 조금 지난 후에야 내가 옷장 같은 좁은 공간에 몸을 구겨 넣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다행히 작은 틈 사이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여긴 어디지?’
20년 전의 과거에서 정신을 잃고 사라진 건 알겠는데 지금 내가 어느 장소, 어느 시점에 존재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마지막으로 ‘시간의 돌’을 삼킨 내 피난처는 아닌 것이 확실했다. 심지어 내가 지나쳐 왔던 과거도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좁은 장소에 갇혀 있던 적이 한 번도 없으므로.
‘그렇다면 내가 사라졌던 그 시각, 그 장소로 돌아온 건 아닌 모양인데… 알고 보니 몇백 년 후거나, 뭐 그러면 어떡하지?’
‘시간의 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요하네스마저도 어느 시점으로 돌아오게 될지 모른다고 했었다. 그러니 성력만 가진 민간인인 나는 더더욱 지금 내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일단 이 좁은 공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조심스럽게 눈을 굴려 볼 때였다.
“수도에서 칩거라니, 정말 끝까지 마음에 안 드는 짓만 골라 하는군.”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숨을 삼키고 몸을 움츠렸다.
“아내가 사라진 건 맞아? 그저 아무 활동도 하고 싶지 않아 대는 핑계 아니야? ‘푸른 루비’에 대한 미끼는 던져 봤나?”
다름 아닌 디에고의 목소리였다. 다행히 몇백 년 후가 지난 시점은 아닌 듯했다.
조심스럽게 문틈 사이로 빼꼼 밖을 바라보았다. 올려다본 디에고의 얼굴이 연회 때의 기억과 똑같은 것을 봐서 몇십 년 후도 아닌 듯했다.
‘음, 길어 봤자 몇 년인가….’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디에고의 얼굴을 살피는데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글쎄요. 노아비크 공작이 정말 단단히 넋이 빠진 것 같습니다. 자신을 ‘푸른 루비’로 주장하는 남자가 나타났다고까지 했는데도 묵묵부답입니다. 아예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아요.”
노아비크 공작이라는 말에 내 눈이 커졌다. 내내 보고 싶어 간절하게 빌던 그 이름이었다. 당장 나가서 디에고의 멱살을 잡고 요하네스에 대해 더 말해 보라고 하고 싶었지만 여기서 모습을 드러내는 건 자살 행위인지라 꾹 참았다.
아니, 대체 왜 하필 이런 곳에 떨어져서….
“…왠지 핑계 같아.”
디에고가 초조하게 손톱을 물고 중얼거렸다.
“그 아내라는 여자도 수상해. 서류상으로만 이혼한 척하고 공작저에 꽁꽁 숨겨 놨을 지도 모르지.”
“그렇다기에는… 잠시 들여보낸 잡상인의 말에 따르면 공작의 모습이 몹시 초췌해졌다고 하는데요. 마치 다른 사람처럼 살이 내리고 인상도 더 무서워졌다고 합니다. 사실 잠시 본 것이 전부지만 아내를 꽤 아낀 것 같기는 해서….”
“글쎄. 그 여자가 보통 여자는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겠지.”
나는 필사적으로 눈을 가늘게 떠서 디에고의 대화 상대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로 반쯤 짐작했지만 역시 대신관이었다.
“그 반쪽짜리를 납치하는 걸 실패하게 만든 장본인이야.”
디에고가 말한 ‘반쪽짜리’는 레오인 것 같았다. 아마 벨리아나스의 피와 노아비크의 피가 반반씩 섞여서 그렇게 칭하는 것 같은데….
“갑자기 나타나서 장난감 총으로 자객들을 모두 쓰러트렸다는군. 허, 참.”
장난감 총은 살상력이 없는 물건이다. 상식을 깰 만큼 활약했으니 그 사건은 절대로 묻힐 수 없었고, 내 활약은 그대로 디에고의 귀에 들어가게 된 셈이었다.
그래도 레오의 납치 이야기가 나오는 걸 봐서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미래는 아닌 것 같았다. 시간차야 좀 있을지 몰라도 아주 엉뚱한 시간대에 떨어지지는 않은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뭐, 신전에서도 총질을 좀 하기는 했습니다. 남부에서 ‘푸른 루비’를 보았다며 꽤 신빙성 있는 이야기도 하더군요. 정말 ‘푸른 루비’한테 사격이라도 배운 건지.”
대신관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디에고가 신경질을 냈다.
“레오 노아비크를 납치하라는 신전의 요구만 없었어도 진작 죽일 수 있었어. 벨리아나스와 노아비크의 혼혈이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꼭 데려오라고 그 난리를 친 거지? 그 탓에 실패해서 그 반쪽짜리도 노아비크 공작도 공작저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지 않나.”
빠르게 새로운 정보를 새겨 들었다. 레오와 요하네스는 지금 수도의 공작저에서 칩거 중인 듯했다.
아니, 그렇다면 공작저로 떨어지면 좀 좋나? 나는 ‘시간의 돌’을 원망하며 속으로 꿍얼거렸다.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 대신 꿈에서라도 피하고 싶은 사람들 근처로 올 게 뭐람. 대체 이 장소는 어디며 갑자기 여기에 왜 떨어진 건지….
“하지만 수도에 왔는데 그냥 죽이기도 아깝지 않습니까.”
대신관의 온화하지만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두 이능을 타고난 아이입니다. 얼마나 좋은 실험 도구입니까. 저희의 실험에 실마리가 될 수도 있어요. 거의 다 왔는데 막혀 있지 않습니까.”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그 끔찍한 실험이 막히긴 막혔구나. 내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는데 디에고가 툴툴거렸다.
“그건 신전의 책임이지. 누가 악령을 지배하고 싶다고 했지 악령을 이 세상에서 다 없애겠다고 했나.”
“저희도 원해서 그런 결말을 낸 건 아닙니다.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죠. 그런데 뭐… 이계의 문을 닫아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이 단테 노아비크의 숙원이었으니 그의 집필 기록이 그런 쪽으로만 남아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디에고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계가 영원히 닫히면 벨리아나스와 노아비크의 이능도 사라지는데.”
“그게 노아비크의 간절한 소원 아니겠습니까.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
“벨리아나스는 아니야. 적어도 나는 아니지. 그리고 신전의 소원도 이제는 아니지 않나.”
“…아주 오래전부터 아니었지요, 확실히.”
대화가 이어질수록 나는 숨죽인 채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니까 지금 그들은 악령을 지배하려다가 엉뚱하게 이계의 문을 완전히 닫는 법을 알아낸 것이다. 그건 지금까지 겉으로 신전이 목표해 온 바이기도 했다.
악령으로 인한 수많은 피해를 생각한다면 당장 이계의 문을 닫아야 했다. 초대 가주 단테 노아비크는 그 목적을 위해 자신의 후손 전체를 바쳤다.
그러나 제국을 수호하는 대신관과 황태자라는 인간이 악령으로 힘을 얻을 생각에 그 방법을 실행하고 있지 않는 것이었다. 새삼 나는 저 인간들이 악령보다도 더 악하다는 걸 다시 한번 상기했다.
건국제 때 악령으로부터 제국민들을 구원하겠다며 일장 연설을 한 디에고의 민낯이 역겨워서 헛웃음이 나왔다. 나를 1급 현상 수배범으로 지정한 신전조차도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때였다.
말을 이으려던 디에고가 순간 입을 다물고 눈을 굴렸다.
“…그런데 여기 누가 있는 것 같지 않은데.”
정말이지 내 숨을 멎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숨소리 하나조차 조심하며 꼼짝도 안 했는데 억울하기 그지없었지만 어쨌든 정확한 추측이었다.
빠르게 머리가 돌아갔다. 지금 내게는 총이 있었다. 하지만 장전된 실탄은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한 명을 죽인다면 디에고가 낫겠지… 사람은 한 번도 죽여 보지 않았지만 성공한다면 수많은 사람을 살리는 길일 테다. 어쩌면 디에고를 향해 지금 당장 총을 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일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대신관의 태연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입구에 견습 성녀가 와 있군요. 청소 시간인가 봅니다. 얘, 잠시만 있다가 다시 오거라.”
다행히 내 인기척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기척인 듯싶었다. 귀를 기울이니 저 멀리에서 ‘예.’ 하고 종종종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바짝 긴장했던 몸이 그제야 슬슬 풀렸다. 대신관이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시다시피 여기는 신관들이나 벨리아나스, 노아비크 외에는 들어올 수 없으니까요.”
나는 그제야 이 공간이 어디인지 알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부인. 부인께서는 어차피 저 방에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네?”
“저 방에는 부조에 새겨져 있다시피, 벨리아나스와 노아비크 그리고 성력을 가진 자들 외에는 출입하지 못합니다. 부인께서는 직계 노아비크도 아니고 성력도 갖지 않으셨으니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아… 그러면 어쩔 수 없지요.”
“사실 별것도 없습니다. 그저 아무나 출입할 수 없다 보니 보안을 유지하는 데에 좋아서 그동안의 연구 결과만 보관해 놓고 있지요.”
요하네스와 함께 대신전에 방문했을 때, 기증관을 보겠다며 가는 길에 잠시 보았던 그 방이 틀림없었다. 노아비크와 벨리아나스, 그리고 신전의 문양이 부조로 새겨져 있던 그 어두운 공간.
문득 ‘시간의 돌’이 왜 나를 이 시점 이 장소로 보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의 돌’은 어차피 인간의 내면을 읽을 수 있어. 그러니 굳이 시전자가 지정하지 않아도 알아서 작동하지.”
그러니까 ‘시간의 돌’은 아무 이유 없이 나를 무작위의 시공간으로 떨궈 놓은 것이 아니었다. 내 내면을 읽은 것이다.
내가 과거에서 사라지면서 마지막으로 빈 소원은….
‘여전히 그 사람은 위험에 처해 있으니, 제 보잘것없는 힘으로 그를 꼭 지킬 수 있게 해 주세요.’
아, 그렇구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시간의 돌’은 내가 모두를 구할 수 있도록 가장 적절한 곳에 나를 데려다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