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60/65)
  • “제가 공작님을 가지면, 그럼 제 말 한마디에 ‘푸른 루비’를 포기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공작령에서 마주하던 날 밤, 그녀는 분명히 그렇게 물었었다.

    요하네스는 그 순간을 상당히 자주 회상했다. 그리고 요 근래에는 엘로이즈가 ‘푸른 루비’가 보낸 수하라고 막연히 추측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귀찮은 추적자를 따돌리라는 명을 받고 온 여자일 거라고.

    그때 그는 뭐라고 대답했었나.

    “‘푸른 루비’를 포기할 순 없어. 그 시점에서 아마 나는 요하네스 노아비크가 아닐 테니. 그런 원론적인 것은 빼고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누군가는 ‘푸른 루비’를 쫓는 그에게 신전의 개처럼 산다며 조롱했지만, 요하네스로서는 가장 자신의 신념에 최선을 다하는 행보였다.

    그는 노아비크의 이능을 강하게 갖고 태어나서 레이나를 곤란하게 만든 탓에 늘 자신의 존재에 회의적이었다. 그런데 그다음으로 한 일이 ‘푸른 루비’를 살린 것이라니.

    만일 그가 노아비크의 이능으로 확인한 ‘시간의 돌’의 쓰임새를 그녀에게 알려 주지 않았더라면 ‘푸른 루비’는 아마 순리대로 죽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도망치던 소녀도 ‘에이스’에 잡혀갈 일이 없었겠지.

    초대 가주 단테 노아비크는 ‘시간의 돌’만큼은 민간인에게 유통하지 말라고 못 박았다. 세상에 혼란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요하네스는 그 말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세상에 혼란을 가져온 당사자가 된 느낌이었다.

    태어나서 한 일이 모두 다 남에게 해가 되는 것들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시절의 일이니 어쩔 수 없지만 사는 내내 그의 손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게 그의 다짐이었다.

    북부는 레이나에게, 레이나가 없으니 레오에게.

    그러나 레오와 요하네스의 나이 차이는 얼마 나지 않았으므로 잘못하다가는 또 예전처럼 레오의 기반이 부실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그가 공작위를 레오에게 물려준다고 했을 때 거센 반발에 부딪힐 수도 있었다. 요하네스가 타고난 노아비크의 이능은 전례 없이 강했기 때문에.

    요하네스는 레이나 때의 일을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어린 날처럼 그가 북부를 떠나 있는 것을 선택했다.

    ‘푸른 루비’는 수도 근처에서만 나타나니까, 수도에 머물며 그녀를 추적하는 데 집중하겠다고 변명하면 모든 일이 잘 맞아떨어졌다.

    그가 살린 이가 악당이라면 늦었지만 그의 손으로 처단하리라. 아무리 늦어도 최선을 다해 마무리하는 것, 그것이 노아비크의 숙명이자 신념이니까.

    “지금 이 순간조차도 엘로이즈를 사랑해.”

    그 빌어먹을 사랑 때문에 ‘요하네스 노아비크’의 정체성 자체를 모두 갖다 버리려고 했는데, 어떻게 이제 와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대답이 나오겠는가.

    “…나도 그렇게 치면 첫사랑 있어. 분명히 좋다고 느꼈어. 오랫동안 생각하기도 했지. 사실 지금도 종종 생각해.”

    그의 인생에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한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는데.

    “키가 딱 그대만큼 작았지만 다정하고 따뜻하면서도 강한 사람이었지. 그대처럼 금발에 푸른 눈이었는데 너무 오래전 일이라 단발머리였던 것만 기억나는군.”

    짧게 잘린 금발, 다정한 축복,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 놀라운 사격 실력.

    그리고… 스물다섯 번째 생일.

    그는 여덟 살 때 엘로이즈를 만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그는 그녀를 살렸다. 그가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되짚고 있는데 레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엘로이즈 님도 공작님을 사랑한다고 했어요. 서운해서 떠난다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사랑한대요.”

    요하네스는 빤히 레오를 바라보았다. 온몸이 죄어들고 온갖 감정이 몰아쳤다.

    “어제 얻은 ‘시간의 돌’은 내가 가 보고 싶은 시기로 잠시 이동하는 거라 남들에게는 전혀 쓸모없는 거야. 심지어 돌아왔을 때 시간이 얼마나 흘러 있을 수도 알 수 없으니 위험하기까지 하지.”

    그 ‘시간의 돌’을 얻었을 때, 엘로이즈에게 주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사용자가 어느 시점으로 돌아올지 몰라서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과거로 엘로이즈가 떠난 것은 맞지만, 대체 언제 돌아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당장 10분 뒤에 돌아올지, 10개월 뒤에 돌아올지, 아니면 10년 뒤에 돌아올지.

    그래서 그녀가 그 ‘시간의 돌’을 쓸 것이라는 건 아예 계산에 넣지도 않았는데… 변수가 레오였다니.

    요하네스는 이제 더 커다란 두려움을 직면해야 했다. 사는 동안 엘로이즈를 언제 만나게 될지 몰랐다.

    이제 모든 오해가 풀렸는데, 이제 모든 진실을 알 것 같은데, 아마 그녀도 지금쯤 모든 정황을 눈치챘을 텐데.

    그가 아랫입술을 무는데 레오가 뿌듯하게 말했다.

    “서로 사랑하면, 어쨌든 결국 다시 만날 거잖아요.”

    요하네스는 레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

    가슴이 타 들어가는 것처럼 쓰려 왔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다 알았는데 그녀를 찾아갈 수조차 없었다. 다가올 기약 없는 기다림 앞에서 그는 무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은 하나뿐이었다.

    “…결국 다시 만나겠지.”

    ⚜ ⚜ ⚜

    요하네스는 얼마간 레오와 대화를 더 나눈 뒤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엘로이즈의 방과 연결된 문은 활짝 열어 두었다.

    “공작님!”

    그를 따라 시온의 저택에 침입을 강행했던 페이건이 급히 들어왔다. 이유도 모른 채 요하네스의 명을 따르면서도 계속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랍니까….”

    요하네스와 떨어져 있던 그 짧은 시간에 페이건은 수많은 정보를 모아 왔다.

    레오가 기습을 당했으나 엘로이즈가 구원자처럼 나타나 장난감 총으로 습격자들을 공격했다는 것, 그들의 신원은 파악하지 못했으나 아마 디에고의 사람인 듯하다는 것, 시온의 저택을 마저 조사했으나 엘로이즈의 신변은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 오히려 시온과 빈센트 역시 나중에는 함께 수색에 합류하여 엘로이즈를 찾았다는 것….

    “그리고 또….”

    페이건은 조심스럽게 뒤에 따라온 하녀에게 눈짓했다. 하녀가 빠르게 다가와 커다란 상자를 열어 보였다.

    “…공작님께서 마님의 생일 선물로 주문하신 드레스가 방금 도착해서….”

    비즈가 잔뜩 달린 드레스였다.

    엘로이즈가 연회 날부터 일관적으로 갖고 싶어 하던 것. 그날 이후 요하네스가 수도의 가장 유명한 재단사에게 직접 부탁하여 선물로 준비한 것.

    “초상화도 그려야겠어. 마담 에비나트에게는 미안하지만 조금 더 세련된 드레스를 입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중에 후손들이 볼 때 그 시대 유행에도 맞지 않는 옷을 입혔다는 평가를 듣고 싶지는 않아서.”

    “네… 네크라인에 비즈가 많이 달렸으면 좋겠어요. 드레스 따위 아무거나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수도의 드레스를 보니 예쁘긴 하더라고요.”

    네크라인에 비즈를 많이 박아 찬란하게 빛나는 그 드레스를 요하네스는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날짜를 맞추느라 너무 힘들었다고 하더라고요….”

    페이건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원하시는 대로 최고급 보석을 어찌저찌 공수해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요하네스는 상자 안의 드레스를 조심스럽게 쓸어 보았다.

    엘로이즈가 스쳐 지나가듯 말한 것이라도 그는 흘려듣지 않았다.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고 싶었다. 비즈 같은 것이 없어도 그녀는 그 연회장에서 반짝반짝 빛났지만, 그래도 갖고 싶다고 몇 번을 말했으니까.

    그래서 바쁜 와중에도 수도의 의상실을 모두 조사한 뒤 가장 엘로이즈의 마음에 들 것 같은 곳을 골라 날짜에 맞추어 훌륭한 드레스를 만들어 달라고 닦달했었다. 페이건은 수도의 의상실을 조사해 오면서 ‘제가 맡았던 업무 중에 가장 낭만적인 것이군요.’라며 이죽거리기까지 했다.

    요하네스는 직접 의상실을 조사한 보고서를 열심히 읽고 신중하게 엘로이즈에게 잘 어울릴 만한 의상실을 골랐다. 사실은 드레스 같은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지만, 네크라인에 비즈를 아주 많이 넣어 달라고 부탁까지 하면서.

    평생 그런 소리를 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래서 ‘비즈를 예쁘게… 여하튼 잘 부탁한다.’라는 말을 어렵게 내뱉고 돌아오는 길에 스스로가 새삼스러워 비죽비죽 웃었었다. 그 어색하고 민망한 순간들이 싫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을 축하해 주려고 했는데. 그리고 북부로 돌아가면 초상화를 그리자고 하려고 했는데.

    그녀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을 함께 보내고 있을 여덟 살의 자신을 생각하며 그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제야 그녀를 만나고 나서 종종 느끼던 기시감들의 정체를 완전히 알아낸 기분이었다. 너무 어리고 정신이 없어서 명확하게 기억은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무의식중에 새겨져 있던 말들.

    “이런 식으로 또 만나네요… 진부하지만 우리, 운명이었나 봐요.”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운명이라면 가혹해도 받아들여야 했다. 어쨌든 엘로이즈를 살린 사람도 어린 시절의 그였으므로.

    “피가 섞여야만 가족은 아니잖아요.”

    그 말을 맨 처음 들었을 때 회상해 내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이 모든 것이 필연이었다면.

    “…에이데이가 …말 이름이에요?”

    시야가 확실하지 않아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어린 에이데이를 발견하고 나서 분명 반가워서 한 말일 것이다.

    요하네스가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밖에서 또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세예나가 들어왔다.

    “공작님!”

    세예나의 당황한 표정에 페이건조차도 긴장했다. 세예나는 요하네스와 반짝이는 드레스를 번갈아 보더니 정말 고뇌하는 표정으로 한참을 서 있었다.

    “…말해. 뭔데.”

    결국 참다못한 요하네스가 낮게 명령했다. 세예나는 그제야 정말 이런 보고를 하게 된 자기 자신의 상황이 고통스럽기 그지없다는 얼굴로 힘없이 말했다.

    “그, 그게… 지금 관공서에서 이혼 절차가 진행 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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