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8/65)

노아비크의 인장이 수놓인, 짙은 청록색의 손수건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내가 챙겨 온 최상급 악령의 심장을 떨리는 손으로 그 손수건에 감쌌다.

“…엄청 큰 아름드리나무니까… 20년 후에도 남아 있겠지.”

떨리는 손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동안 이미 내 무릎까지 희미해지고 있었다. 혹시 모를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면서 나는 필사적으로 땅을 파고 손수건에 싸인 최상급 악령의 심장을 묻었다.

별일 없다면, 이대로 이 심장은 20년간 여기 묻혀 있을 것이다. 20년은 아주 긴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모험을 한 번 해 볼 만했다.

황제가 눈을 뜨는 것이 가장 쉬운 해결책이라고 했지만 그걸 실패해서 우리가 지금 여기까지 온 거니까.

간신히 흙을 덮을 때에는 내 가슴께까지 흐릿해져 있었고, 급하게 총과 가방을 든 뒤에는 내 형체가 완전히 반투명하게 변했다.

존재가 지워진다는 감각이 선명했다. 모든 것을 끝내고 난 뒤에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과거로 돌아온 이후 계속 자꾸만 사건이 터져서 바로바로 수습하느라 이제야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가능했다.

일단 최상급 악령이 나타나서 총을 쏴야 했고, 다급히 소년 요하네스의 입을 막아야 했고, 얼른 ‘시간의 돌’을 먹어야 했고, 그 후 베이든이 나타나 도망쳤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생각해 보니 요하네스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

시간의 소용돌이를 앞둔 상태로 나는 탄식하듯 생각했다. 그는 일관적으로 내게 진실만을 말했다.

“…‘푸른 루비’가 내게 잘못한 건 없어.”

어느 저녁 식사 때, 레오가 질문한 적이 있었다. ‘푸른 루비’가 뭘 그렇게 잘못했기에 그토록 열심히 뒤쫓고 있느냐고.

“하지만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질긴 인연으로 묶여져 있단다, 레오. 나는 ‘푸른 루비’를 만나서 물어봐야 할 것들이 있어.”

요하네스는 차분하게 대답했었다.

“오래전, ‘푸른 루비’와 나는 서로의 목숨을 살려 주었단다. 공정한 거래였어. 그러니 우리 둘 사이에 계산은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때에는 그냥 아이 앞에서 대충 지어낸 핑계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릴 때 그를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로, 기적같이 얻은 삶이니 정말 잘 살자고 약속을 했는데… ‘푸른 루비’가 한 짓은 너도 알겠지. 그때 내가 ‘푸른 루비’를 살려 주는 바람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것 같아서, ‘에이스’의 피해자가 꼭 나 때문에 생긴 것 같아서… 그래서 직접 만나서 묻고 싶은 거야. 당신은 왜 그때 내가 살려 준 목숨으로 부끄럽게 살고 있냐고,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고 있었다.

그가 두 번이나 나를 ‘푸른 루비’라고 생각하지 않고 ‘푸른 루비’의 관계자라고 여긴 이유. 바로 나이가 맞지 않아서였다. 그는 무조건 ‘푸른 루비’를 40대 중반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에이스’의 희생자인 나를 만나고 난 뒤, 그는 몇 번이고 이 순간을 회상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의 돌’이 그의 이 시간대로 한 번만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읽어 냈겠지.

그리고 하나 더 그가 내게 털어놓았던 진실이 있었다. 나는 거짓말로 치부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명백한 사실인 것.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어. 이미… 이미 다른 사람에게 줬거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이미 줬어.”

내가 과거로 오기 전, 그에게 이 ‘시간의 돌’을 요구했을 때 그가 했던 대답.

“…‘푸른 루비’에게 줬거든.”

요하네스가 나를 이용한 것이라고 믿게 만들었던 그 말들.

그가 내게 거짓말을 한다고 여겨 수면제까지 먹였다. 그런데 그는 독약을 먹을 각오까지 하면서도 내 찻잔을 받았고….

울컥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눈물이 차올랐다.

“그래서… 최대한 말하고 싶지 않았지. 하지만 그게 내… 내 원죄야.”

다시 꼬마 요하네스를 만나고 싶어도 이미 내 몸은 완전히 흐릿해져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그대로 시야마저 캄캄해졌다.

그는 내게 진실을 말했는데, 나는 그 말을 의심하여 그의 곁에 머물러 주지 않았다. 결국 결혼식 때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은 나였다.

지금 그 사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마음에 끝까지 걸리는 것은, 내가 노아비크를 둘러싼 위험은 하나도 해결해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내가 너무 먼 미래에 가게 되어서 이미 레오와 요하네스가 디에고의 흉계에 말려들었다면 어떡하지.

나는 의식이 흐릿해지는 와중에도 끝까지 기도했다. 성력을 타고났지만 난생처음으로 신에게 드리는 간절한 기도였다. 희한한 반발심 때문에, 죽기 직전까지 신에게 기도 같은 건 하지 않았는데.

너무 엉뚱한 시간대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세요. 그를 너무 기다리지 않게 해 주세요.

해야 할 말이 있고 풀어야 할 오해가 있어요. 우리 사이에 있던 그 많은 일들을 처음부터 다시 함께 이야기할 시간이 필요해요. 지금쯤은 그 역시 이 모든 사실을 추론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제발… 제발 요하네스를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그 사람이 너무 보고 싶어요.

여전히 그 사람은 위험에 처해 있으니, 제 보잘것없는 힘으로 그를 꼭 지킬 수 있게 해 주세요.

⚜ ⚜ ⚜

마지막으로 입구를 직접 부순 사람은 요하네스였다. 눈앞에 펼쳐진 공간은 누가 봐도 피난처였다.

오래 몸을 숨길 수 있도록 준비된 저장 식품 및 여러 가지 잡화를 본 그의 눈에 조소가 어렸다. 저택의 바로 옆에 이런 공간을 숨기고 있었단 말이지.

그러나 그의 승리감에 찬 얼굴은 금세 굳어 버리고 말았다. 밀폐된 공간 그 어디에도 엘로이즈가 없었던 것이다.

“…어?”

그리고 그의 앞에서 필사적으로 시간을 끌던 시온의 입에서도 황당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얘가… 어디 갔지?”

온갖 무기를 동원해 달려들다가 기사들에게 붙잡힌 빈센트마저도 어리둥절한 눈으로 빈방을 바라보았다.

초대받지 않은 침입자도, 그 침입자들을 열심히 막아 대던 집주인도 입을 다물어 잠시 정적이 흘렀다.

요하네스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바닥에 흩어진 긴 금발 머리를 집었다. 가위가 옆에 떨어져 있는 걸 보아 직접 자른 듯했다.

그 옆에는 오늘 아침만 해도 그녀가 입고 있었던 원피스가 개켜져 있었다. 엘로이즈가 여기 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다른 비밀 공간이 없다는 것도 확실했다. 요하네스의 명으로 기사단 소속 기사들이 네 면의 벽을 모두 수색했으나 물리적으로 더 이상 나올 공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곳으로 도망갈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던 것도 아니었다.

요하네스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정예 기사단을 이끌고 바로 시온의 저택으로 쳐들어왔다. 엘로이즈가 자신을 끝내 죽이지 못한 것이 실수라고 여기며.

그는 분명 그녀에게 기회를 주었다. 요하네스 노아비크에게서 달아날 기회.

아무리 그가 독에 당하지 않는다고 해도, 정말 죽일 마음이었다면 그대로 심장에 칼을 찔러 넣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저 잠시 잠들었을 뿐인 그를 그대로 두고 떠났다. 이제 요하네스는 그가 죽지 않는 이상 그녀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붙잡아서, 내 곁에 붙들어서…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의 곁을 떠나도록 그냥 두지는 않을 셈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잡으러 가는 길에 막 저택에 들어오는 레오를 마주쳤다.

“무, 무서운 얼굴 하지 말아요, 공작님.”

레오는 요하네스에게 벌어진 일을 눈치채지는 못했으나, 엘로이즈가 떠났다는 건 알고 있는 듯했다.

“엘로이즈 님은… 음, 조금 서운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최대한 부드럽게 대해 주셔야 해요. 화내지 마시고요. 그럼 돌아오실 거예요.”

물론 이미 당장 추적할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찬 요하네스는 그 말을 그저 흘려들었다.

“어차피 제가 엘로이즈 님이 갖고 싶어 하던 것도 방금 드리고 오는 길이고… 그러니까 저를 봐서라도 돌아오실 거라니까요.”

요하네스는 레오의 말에서 ‘방금 드리고 오는 길’이라는 것에 주목했다. 레오는 이제 막 저택에 들어오는 길이었으니, 그 말은 엘로이즈가 있는 곳은 공작저에서 가깝다는 뜻이었다.

이 근처에서 엘로이즈가 도망갈 수 있는 장소는 단 한 군데라고 생각했으므로 요하네스는 망설이지 않고 이웃집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엘로이즈가 이곳 외에 있을 수 있는 곳이 없는데…. 심지어 빈센트와 시온마저도 ‘얘가 대체 어디에 갔지?’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자신이 놓친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는 요하네스의 손아귀에서 긴 금발 머리카락이 사르륵 빠져나갔다.

“어차피 제가 엘로이즈 님이 갖고 싶어 하던 것도 방금 드리고 오는 길이고….”

갖고 싶어 하던 것….

그녀가 요구한 건 20년 전의 ‘시간의 돌’이지만, 어차피 그건 그 누구에게도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미 20년 전에 한 여자가 먹어 없앴으니까.

그때 그는 눈을 좀 다쳤었기에 시야가 밝지 않았다. 그래도 어깨까지 오는 금발 머리의 다정한 여자가 허가받지 않은 성력을 써서 그를 구해 주었다는 건 똑똑하게 기억했다.

여덟 살의 그는 너무 어렸고, 또 갑작스러운 일들이 연속으로 벌어져 내내 정신이 없었다. 그 이후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기억이 또렷할 리 없었다.

“나도 여덟 살 때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아무리 열심히 기억해 내려고 해도 선명하지 않고 희미해. 그저 강렬했던 어떤 사건과, 그때의 내 행동만이 짧게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지.”

예전에 엘로이즈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때의 그 기억은 사실 선명하지 않고 희미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는 그 여자와의 약속을 지켰다. 여자가 자신이 성력을 써서 최상급 악령을 해치운 것을 말하지 말라고 강조했으므로, 지금까지 그 진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이다. 여덟 살 때 최상급 악령을 물리쳤다는 민망한 소문이 내내 따라붙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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