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7/65)
  • 요하네스 노아비크는 내가 아는 가장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었다. 나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아주 사랑을 받게 될 거예요. 진짜요.”

    그가 지금 막 누나인 레이나에게 쫓겨나듯 수도에 왔다는 걸 고려한 말이었다. 과연 요하네스가 바로 시무룩하게 반박했다.

    “…이미 글렀는걸요. 이미 날 소중하게 여기는 노아비크는 아무도 없어요.”

    “글쎄요.”

    내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피가 섞여야만 가족은 아니잖아요.”

    “…….”

    “그러니까 나중에 생길 당신의 소중한 가족들을 위해서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요.”

    나는 소년의 볼을 살짝 쓰다듬으며 조곤조곤 속삭여 주었다. 소년의 얼굴에 겹쳐지는 성인 요하네스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나 역시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키도 많이 클 거고, 음, 지금만큼 귀엽지는 않겠지만 아주 잘생겨질 것 같은데요. 여자들이 많이 좋아하겠어요.”

    “그, 그건….”

    “영리하고 차분해서 아랫사람도 많이 따를 거고… 아, 춤도 아주 잘 출 거예요. 춤에 재능이 없는 파트너조차 정말 편안할 정도로.”

    요하네스의 귀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이 우스워 또 피식 웃었다.

    “눈… 눈도 괜찮아질 거예요.”

    그의 불안한 눈동자를 보며 내가 다정하게 말했다. 실제로 어른 요하네스의 시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므로.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말고, 치료 잘 받아요.”

    “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할 말은 다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떠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동안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이상한 ‘시간의 돌’이 나왔네요.”

    침묵이 민망한지 요하네스가 손안의 ‘시간의 돌’을 굴리며 화제를 돌렸다.

    “원하는 신체 부위의 일부만을 원하는 시점으로 돌려 주는 거네요. 이런 게 무슨 쓸모가 있담.”

    반쯤은 꿈꾸는 것처럼 몽롱한 기분으로 있다가 갑자기 화들짝 놀랐다. 어린 요하네스를 꿈처럼 바라보느라 내 목숨이 얼마 안 남은 것조차 잊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여덟 살 때 가진 돌은, 원하는 신체 부위의 일부만을 원하는 시점으로 돌려주는 돌이었어.”

    그래, 그러니까 지금 소년 요하네스가 들고 있는 ‘시간의 돌’이 바로 나를 살릴 수 있는 그 돌이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이자 계기가 된 것.

    나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물었다.

    “…그럼 그거, 나 줄래요?”

    20년 후에도 그에게 하게 될 말. 이 말을 하고 싶어서 회귀 후에 지겹도록 그의 곁에 붙어 있었다. 소년 요하네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네?”

    “나는 곧 죽어요. 근데 그 ‘시간의 돌’이 있으면 살 수 있어요.”

    내가 급히 말을 꺼낸 것은 정말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5분밖에 이 과거에 있을 수 없다고 했었다.

    어린 요하네스가 ‘노아비크의 사명’ 어쩌고 하면서 망설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얻어 내야 한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게다가 심장의 통증이 날카롭게 온몸에 퍼져 나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마 생의 끝이 다가와서 그런 듯했다.

    계속해서 울리는 경고음처럼 느껴지는 통증은 자연스럽게 나를 다급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꼬마 요하네스에게 강제로 뺏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간신히 부드럽게 물어본 것이었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여기요.”

    오랫동안 망설일 줄 알았던 요하네스는 곧바로 내게 그 ‘시간의 돌’을 내밀었다. 내가 눈을 크게 뜨자 그가 머쓱한 듯 중얼거렸다.

    “당신도 나를 살려 줬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드려야죠.”

    심지어 조심스럽게 덧붙이기까지 했다.

    “그거… 삼키면 돼요. 먹는 거예요. 그럼 돼요.”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시간의 돌’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삼켰다.

    ‘시간의 돌’을 세 번째로 삼키는 셈이었다.

    “‘시간의 돌’은 어차피 인간의 내면을 읽을 수 있어. 그러니 굳이 시전자가 지정하지 않아도 알아서 작동하지.”

    요하네스가 예전에 설명한 바에 따르면 굳이 내가 무언가 하지 않아도 ‘시간의 돌’은 알아서 작동할 것이다.

    순간 내 몸에서 작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소년 요하네스가 놀란 눈으로 숨을 삼켰다.

    잠시 내뿜어져 나왔던 빛이 사그라들 무렵, 내 심장에서는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 하루 종일 따끔거리며 죄어들었던 것이 거짓말처럼 전혀 아프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시간의 돌’이 내 심장에 새겨진 마법진을 지웠음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내 심장의 마법진을 7세 이전으로 돌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렇게 아예 처음부터 없던 것으로.

    “…된 거죠? 그럼… 이제 안 죽는 거죠?”

    소년 요하네스가 조심스럽게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 흑, 요.”

    너무 많은 감정이 몰려들어서 목이 메었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드디어 죽음을 각오했을 때에, 이런 방식으로 이렇게 살아남다니. 너무 오랫동안 걱정하던 것이 사라져서 그런지 회한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에도 울지 않았는데. 내 볼에 눈물이 흐르자 소년 요하네스가 놀라서 물었다.

    “우, 우는 거예요?”

    심지어 매너 좋게 품속에서 그의 손수건을 꺼내 주기까지 했다. 나는 얼떨결에 그 손수건을 받아 들며 코를 훌쩍였다.

    “고마워요… 스물다섯 살이나 먹어 가지고 애 앞에서 별꼴이네요….”

    내 말에 요하네스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스물다섯 살이라고요? 더 어려 보이는데….”

    “사실 스물다섯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긴 해요. 그래도 곧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긴 하고… 제가 키가 원래 좀 작아서.”

    그때, 우리의 뒤에서 푸르릉, 하는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에이데이?”

    요하네스가 놀라서 뒤를 돌았다. 작은 말 하나가 주인을 찾아 다가오고 있었다. 수많은 회한을 뒤로한 채, 나는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어 물었다.

    “…에이데이가 …말 이름이에요?”

    갈기부터 발끝까지 새카만 것이 에이데이가 확실했지만, 훨씬 더 어려서 그런지 크기가 꽤 작았다. 내 질문에 요하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그때였다. 저 멀리서 누군가 말을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공자님! 공자님!”

    훨씬 더 젊은 목소리였으나 베이든의 외침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여기서 베이든에게 들켜서 좋을 것이 없는지라 나는 빠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어? 진짜 괜찮은 것 맞아요?”

    요하네스가 나를 바라보며 새삼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발이 조금….”

    나는 깜짝 놀라 내 발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내 발끝부터 다소 불투명하게 변하고 있었다. 마치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인 것처럼.

    하지만 어린 요하네스를 놀라게 할 수는 없어서 나는 빠르게 둘러댔다.

    “멀쩡한데요? 지금 당신의 눈이 조금 다쳐서 그런가 봐요.”

    역시 여전히 시야에 문제가 있었는지, 소년 요하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급히 말했다.

    “…그럼 전 갈게요. 눈 치료 얼른 하시고요.”

    생각해 보니 곧 사라질 것 같은데 그런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것도 없었다. 당황해하는 요하네스를 두고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살려 줘서 고마워요. 저를 만난 건, 꼭 비밀로 해 주세요. 부탁이에요.”

    “저, 저야말로 살려 주셔서 감사해요.”

    “…요하네스. 우리 둘 다 기적같이 얻은 삶이니, 정말 잘 살아 봐요. 약속이에요.”

    뒤를 돌아 수풀 속으로 몸을 숨기는데 소년 요하네스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네! 약속할게요!”

    동시에 저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도 들렸다.

    “공자님! 대체 언제 나가신 겁니까! 아이고, 설마 최상급 악령을 처치하신 거예요?”

    젊은 베이든인 것 같았다. 나는 다급하게 몸을 숨기고 달려서 최대한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이 시간대에서 떠날 시간이 다가왔는지, 어느새 발목까지 반투명하게 변하고 있었다. 나는 총과 가방을 들고 간신히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아래에 기대어 숨을 헐떡댔다.

    갑작스러운 달리기에 숨이 차서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 외에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새삼스럽게 또 감격스러웠다.

    ‘그럼 이대로… 여기서 사라지면 어느 시간대에 가는 걸까.’

    어느 시간대와 어느 장소에 나타나게 될지는 요하네스조차도 모른다고 했다. 내가 ‘시간의 돌’을 먹고 사라진 그 시점으로 돌아가게 될지, 아니면 짐작할 수도 없는 먼 미래로 가게 될지 미지수였다.

    ‘…다시 현재로 돌아가는 게 그래도 제일 가능성 있는 이야기겠지?’

    소망에 가까운 예측이었다. 먼 미래로 가는 건 내게도 너무 두려운 일이었으니까.

    총 한 자루와 얼떨결에 딸려 온 이 가방만을 가지고 내가 모르는 시간대에서라도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는데 퍼뜩 묘수가 하나 떠올랐다.

    ‘혹시라도 만일… 만일 다시 현재로 돌아간다면!’

    “원래 약재로는 최상급 악령의 심장을 최고로 치는데요…. 그게… 원래 최상급 악령의 심장은 10년 넘게 숙성시켜야 제대로 된 효능이 나오는 법이라서요.”

    내 가방에는 요하네스가 준 결혼 선물, 최상급 악령의 심장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로부터 20년 전.

    “…악령은 이계에서 옵니다. 그리고 그 이계의 시간은 우리와 아예 다르게 움직입니다.”

    유제이의 말에 따르면, 악령의 시간은 우리와 완전히 다르게 움직인다. 악령이 우리의 시간을 살지 않는다면 그 부속품인 악령의 심장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손수건 같은 것에 싸서 보관하면 아주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을 거야.”

    내 손에는 아까 소년 요하네스가 건넨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갑작스러운 베이든의 등장에 돌려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가져온 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