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6/65)
  • 물론 내가 소년 요하네스를 보기 위해 과거로 돌아온 건 아니었다. 그저 잡히는 것이 싫어서 충동적으로 온 것일 뿐이었다. 그러니 굳이 그를 보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대로 조용히 혼자 5분을 보내다가 다시 미래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지도 몰랐다. 굳이 요하네스의 과거에 난입했다가 괜한 결과를 초래하고 싶지 않았다.

    ‘아닌가? 이미 그 결과가 초래된 현실을 살았으니까… 아, 복잡해….’

    어쨌든 내가 있던 미래에서 요하네스는 지나치게 건강했다. 그거면 된 것 같기도 하고, 생각이 괜히 복잡했다. 그런데 요하네스는 왜 이 시점으로 다시 한번 돌아가고 싶어 했을까.

    ‘그런데 여덟 살짜리가 왜 한밤중에 이 깊은 숲속에 와 있던 거지?’

    그가 레오에게 여덟 살은 한밤중에 돌아다니면 위험하다며 펄펄 뛰었던 것이 생각나 헛웃음이 나왔다.

    완전히 몸을 세워 일어섰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총이 떨어져서 급히 잡아채는데 팔에 가방끈이 스르르 달려 왔다.

    “뭐야, 이것도 같이 온 건가?”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시간의 돌’을 삼켰을 때 내가 가방과 총을 소지한 상태이기는 했다. 가방에서 ‘시간의 돌’을 꺼냈고, 혹시 몰라서 총을 계속 들고 있었으니까.

    다시 한번 가방과 총을 챙기는데 갑자기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키에에에에에엑!”

    최상급 악령의 울음소리였다. 벌써 세 번째 듣는 울음소리인데도 섬뜩함에 소름이 끼쳤다.

    20년 전의 최상급 악령이라니,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이… 나는 더 복잡한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나도 모르게 곧바로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튀어 나갔다.

    “악!”

    동시에 준수하게 생긴 소년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황금빛 눈을 하고, 커다란 검을 든 채 덜덜 떨고 있는 어린 남자아이.

    그리고 소년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년은 겁에 질린 와중에도 침착하게 검을 휘둘렀지만, 최상급 악령의 기운이 워낙 세다 보니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키에에에엑!”

    나름대로 최상급 악령의 공격을 날래게 피하던 소년이 순간 발을 헛디뎠다. 돌 하나가 데구르르 굴러가는 것을 보니 돌에 걸린 듯했다.

    소년은 그대로 넘어졌다. 그리고 그때를 맞춰 최상급 악령이 돌진했다.

    순간적으로 소년의 얼굴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죽음을 예상한 표정이었다.

    “안 돼!”

    나는 홀린 듯 뛰어가 최상급 악령의 심장에 총을 겨누고 재빠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오랜만에 성력을 폭발하듯 분출했다.

    “키에에에에엑!”

    최상급 악령이 그대로 비명 소리와 함께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그새 넘어진 소년을 일으키며 급히 말했다.

    “거의 다 죽였어. 한 번만 제대로 찌르면 돼. 할 수 있지?”

    “…네!”

    여덟 살의 작은 소년, 그러니까 꼬마 요하네스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곧바로 검을 들어 최상급 악령에게 달려들었다.

    이미 치명타를 맞아 죽어 가고 있던 최상급 악령은 제대로 된 움직임조차 보이지 못한 채 요하네스의 검에 바로 죽었다.

    “키에에….”

    조약돌 모양의 단단한 심장과 함께 ‘시간의 돌’이 투둑, 하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최상급 악령이 사라지자 이제 소년이 헐떡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사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긴장감에 몸을 떨고 있던 소년의 눈이 어느새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총을 든 채로 한동안 멍하니 굳어 있었다.

    맹세코 나는 소년 요하네스의 인생에 굳이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괜히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상급 악령에게 공격당하고 있는 소년을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나는 지금까지 레오를 항상 악령에게서 지켜 왔다. 레오를 연상시키는 꼬마 노아비크를 지키기 위해 반사적으로 움직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죽을 뻔했어요.”

    꼬마 요하네스는 그 와중에도 아주 공손하게 인사했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황금색 눈이 초상화에서 보았던 그 꼬마 그대로였다. 나는 허탈하게 웃고 나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 또 만나네요….”

    요하네스에게 도망치려고 과거까지 왔는데 이렇게 또다시 마주쳐 버렸다. 그다지 그의 어린 시절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어린 요하네스의 눈을 마주하며 속삭였다.

    “진부하지만 우리, 운명이었나 봐요.”

    아무리 눈앞의 아이가 어리다고 해도 요하네스는 요하네스였다. 곱상하고 단정한 이목구비며 곧게 허리를 세운 자세까지 너무 익숙해서 나도 모르게 경어가 튀어나왔다.

    멀리서 볼 때에는 레오와 너무 유사했는데, 가까이서 자세히 뜯어보니 레오와는 상당히 달랐다. 어린 소년에게 이런 표현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훨씬 더 음울하고 날카로워 보이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 어리고 앳된 얼굴 속에서도 현재의 요하네스 노아비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 자꾸만 시선이 갔다.

    “나오고 말고를 떠나서, 최상급 악령은 고작 여덟 살짜리가 쫓아가서 해치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기운을 느끼더라도 절대로 나가서는 안 된다.”

    “공작님은 여덟 살 때…!”

    “말 들어, 레오. 여덟 살은 혼자 최상급 악령을 상대하지 못해. 그러니 허튼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마라.”

    문득 예전에 그저 흘려 넘겼던 일화들이 생각났다.

    “네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여덟 살은 최상급 악령을 죽이지 못한다, 레오. 기억해. 앞으로는 절대 이런 무모한 짓은 하지 마.”

    요하네스는 일관적으로 ‘여덟 살은 최상급 악령을 혼자 죽이지 못한다.’라고 말해 왔다.

    그동안은 레오를 단속시키기 위해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실제 경험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요하네스가 굳이 최상급 악령을 자기가 죽인 게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 건….

    나는 급히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건 당신이 죽인 걸로 해요. 제 존재는… 음, 비밀이고요.”

    괜히 지금 내 존재를 말했다가는 소년 요하네스는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리고 만다. 나는 지금 이 시점에서 5분밖에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푸른 루비’가 활동하게 되는 건 지금으로부터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다. 그러니 여덟 살 요하네스가 ‘총으로 악령을 죽이는 여자가 있었다.’라고 아무리 주장해 봤자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게 뻔했다.

    나름대로 요하네스를 배려해서 한 제안이었는데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신관이 아니시군요.”

    “네? 음….”

    하기야, 지금 내 차림새는 신관과 완전히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하네스는 내가 쓴 힘이 성력이라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물론 최상급 악령에게 한 방으로 그렇게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힘이 성력뿐이기는 했다.

    “마지막 일격을 굳이 제게 맡긴 건, 남들이 보기에는 악령을 꼭 제가 죽여야 했기 때문이지요?”

    나는 꼬마 요하네스의 차분한 질문을 들으며 다시 한번 생각을 정정했다.

    이 아이는 레오와 분위기만 다른 게 아니라 내면까지 완전히 달랐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의심과 추론과 심문 능력이 훌륭하게 완성되어 있을 수가. 누군가 악령의 심장을 분석해서 총상이라고 결론 내릴까 봐 요하네스에게 마지막을 맡긴 것인데 그 의도가 완전히 간파당한 듯했다.

    “허가 없는 성력을 쓰는 건 불법이라고 배웠는데….”

    요하네스가 천천히 검을 내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최상급 악령의 심장과 ‘시간의 돌’을 주울 생각인지 허리를 숙였다. 요하네스의 작은 손이 몇 번 땅을 짚었다. 나는 왈칵 걱정이 들어 물었다.

    “…어디 다쳤어요?”

    한 번에 주울 수도 있는 돌을 몇 번이나 헤매며 붙잡는 게 이상해서 미간을 찌푸리며 요하네스에게 다가갔다. 요하네스가 민망해하며 중얼거렸다.

    “시야가 좀… 아까 눈 주변에 연기를 가까이 해서요.”

    “어머, 어떡해.”

    요하네스는 심장과 ‘시간의 돌’을 붙잡는 데에 성공했지만, 그래도 눈이 다쳤다는 건 심각한 일 같아서 나는 빠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한쪽 무릎을 꿇고 그의 어깨를 짚은 뒤 가만히 그의 황금빛 눈을 바라보았다.

    “많이 심각해요? 지금도 아파요?”

    “저, 저, 점점 더 나아지고… 있어요. 괜찮아요.”

    요하네스는 당황한 내색을 숨기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를 피하지는 않았다. 내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더 다친 곳은 없어요?”

    “네… 하지만….”

    내가 요하네스의 무릎을 툭툭 털어 주는데 그가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사실 그냥 죽었어도… 괜찮았을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죽는 게 괜찮다니요.”

    “괜히 태어나서 공작성의 세력만 둘로 갈라지게 하고… 가뜩이나 전쟁 때문에 불안한 와중에….”

    아무리 의심과 추론과 심문에 놀라운 재능을 가졌어도 아이는 아이였다.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는 모습이 이상하게 처연했다. 내가 처음 보는 요하네스의 약한 모습이기도 했다.

    지금 이 시점의 요하네스는 여덟 살… 그러니까 레이나의 후계 구도에서 방해가 된다며 수도로 쫓겨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

    다독여 줄 부모는 애초부터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세상 단 하나뿐이었던 보호자에게서 거부당해 홀로 먼 길을 온 아이의 심정은 아마 말도 못 하게 문드러져 있을 것이다.

    “아니에요.”

    그래서 나는 단호하지만 따뜻하게 말했다.

    “그런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요. 이렇게 지금도 이렇게 멋지니 자라면 더 훌륭한 어른이 될 거거든요.”

    “제가… 훌륭한 어른이 된다고요?”

    “그럼요. 정말 멋지고 훌륭한 어른이 될 거예요.”

    요하네스가 흐린 시야에도 불구하고 나를 관찰하듯 빤히 바라보았다.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와 눈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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