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5/65)
  • 공교롭게도 이곳은 노아비크 공작저의 바로 이웃집이었다. 그러니 기사들까지 끌고 오는 요하네스를 피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그러므로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단 한 군데였다.

    나는 혹시나 여기 있었던 것이 들킬까 봐 옆에 있던 가방을 챙겨 들고 정신없이 2층으로 뛰었다. 2층에는 시온과 빈센트가 마련해 주었지만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던 ‘내 방’이 있었다.

    시온과 빈센트는 시간을 끌어 보려는 의도로 1층에 내려갔다. 그들이 마련해 준 ‘내 방’에 막 도착함과 동시에 아래층이 시끄러워졌다.

    “어? 공작님 아니신가요.”

    시온이 유들유들하게 연기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느릿한 목소리가 대놓고 시간을 끌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아침부터 여기는 왜….”

    저 능청스러운 연기가 요하네스를 상대로 오래갈 리 없었다. 나는 빠르게 옷장 문을 열어 민망하게 생긴 속옷들을 들추고 비밀 문을 열었다.

    쾅, 하고 문이 닫히자마자 세계와 단절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캄캄한 어둠 속이 새삼스러워 입구에 마련되어 있던 부싯돌로 불을 켰다.

    아무리 요하네스 노아비크라고 해도 여기까지 추적하지는 못하겠지.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가는데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이 방에는 나름대로 오랫동안 버틸 수 있도록 물이며 보존 식품, 여벌 옷과 각종 생필품까지 다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나는 피식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얼마 안 남은 생인데….’

    결국 여기서 죽는 것이 내 운명인가 싶었다. 얄궂게도 이제는 심장의 통증이 쉴 새 없이 계속해서 느껴졌다.

    요하네스가 마구 쫓아오자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는데, 완전히 고립되어 생각해 보니 내 기억 속의 요하네스를 지키고 싶어서인 듯했다.

    어쨌든 나는 마지막에 그를 속여 수면제를 먹이고 도망쳤다. 실제로 내가 수상한 사람이었다는 걸 증명하고 떠난 것과 다름없었다.

    그에 대해 캐묻는 요하네스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심문당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했다. 그런 기억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바깥에서 소리는 들리지 않고,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나는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길게 늘어진 금발, 꽤 고급스러운 원피스… 노아비크 공작 부인에 꽤 어울리는 외양이었다.

    ‘이대로, 이런 모습으로 죽는 건가.’

    사실 요하네스가 저택을 오랫동안 수색한다고 하면 이 은신처에서 나가지 못하고 이 모습 그대로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거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으로 나를 쫓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나만 진심이었던 결혼 생활에 희한한 반항심이 솟구쳐 올랐다.

    가위를 들어 어깨 위까지 머리를 잘랐다. 어린 시절 ‘에이스’에서 바바라가 언제나 대충 잘라 주었던 것처럼.

    고급스러운 원피스도 벗어 던지고 원래 악령을 사냥할 때 자주 입었던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미 은신처에 모두 구비되어 있던 것이었다.

    빈센트가 준비해 둔 총까지 드니 어느새 거울에는 아까와 완전히 다른 내가 서 있었다. 이제 그 누구도 나를 ‘엘로이즈 노아비크’라고 여기지 못할 터였다.

    나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보며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요하네스와 지냈던 10개월이 모두 꿈만 같고, 지금 이 모습이 내 본질인 것 같았다. 요하네스에게 쫓겨서 몸을 숨기는 데 급급한 신전의 범죄자 ‘푸른 루비’.

    원래 이게 내 모습이라고, 그러니 너무 서러워하지는 말자고 혼자 몇 번이고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은신처 입구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절대로 들키지 않을 것이라는 시온과 빈센트의 장담이 무색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엘로이즈는 안 왔다니까요!”

    시온의 능글맞은 목소리와 함께 구둣발 소리가 쿵쿵 울렸다. 아까 1층의 소리가 전혀 안 들렸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제 요하네스가 내 방까지 들어온 듯했다.

    “그리고 아무리 아내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여인의 방을 그렇게 함부로….”

    시온의 말과는 별개로 발자국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순식간에 옷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속옷을 뒤적이는 소리와 함께 낮고 눅눅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요하네스였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냉담한 지시가 이어졌다.

    “부숴.”

    대체 여기에 은신처가 있다는 걸 어떻게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참 단호하고도 냉철한 명령이었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등골이 서늘해졌다.

    동시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은신처의 입구에 큰 충격이 가해졌다. 어렴풋하게 ‘이래도 되는 건지….’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페이건의 목소리까지 들렸다.

    들어오는 법을 모르니 일단 부수는 게 낫다고 판단한 듯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는 시온과 빈센트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쾅, 하고 입구가 흔들렸다. 빈센트의 분노에 찬 고함 소리까지 섞여 그야말로 난리였다.

    그동안 그에게서 항상 잘 피해 왔기 때문에 이토록 빠르게 잡힌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말 지척에 와 있었다.

    “어, 어떡하지?”

    이렇게 허무하게 들킬 줄은 몰랐던지라 나는 당황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잡히고 싶지 않았다. 그의 냉랭한 눈을 보고 싶지 않았다. 왜 찻잔에 수면제를 탔는지 취조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있었던 수많은 일들을 내 입으로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내 이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누가 봐도 ‘푸른 루비’가 명백한 이 수상쩍은 외관으로 그를 마주하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그의 기억 속에 끝까지 밝은 모습으로 남고 싶었다. 어젯밤 그의 품에 내내 안겨 있던 사랑스러운 아내로 기억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내 생명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앞에서 죽어 가고 싶지 않았다.

    다시 한번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철로 만들어진 단단한 입구가 구겨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지만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있을 리 없었다. 다소 긴장한 것 같은 페이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뭔가 공간이 있습니다, 공작님!”

    이번에는 더 큰 굉음이 났다. 밖에서 ‘공작님!’ 같은 소리가 들린 것을 봐서 요하네스가 직접 입구를 부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심장이 불안함에 쿵쿵 뛰었다.

    빈센트의 비명 소리까지 들리는 것을 봐서 그가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것 같았지만… 노아비크 기사단에 대해서는 내가 제일 잘 알았다. 빈센트와 시온이 막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총을 들고 의미 없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무언가 발에 걸려 멈칫했다. 다름 아닌 내가 들고 온 가방이었다.

    입구가 벌어진 가방 안에 레오가 준 ‘시간의 돌’이 보였다.

    1596. 5. 8. 00:1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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