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4/65)
  • 나는 내게 쓸데없는 ‘시간의 돌’만 안기고 쏜살같이 사라지는 레오를 차마 붙잡을 수 없었다.

    아무리 요하네스가 잠들어 있다고 해도 일단 나는 도망 나온 처지였고, 요하네스가 너무 죽은 듯 자는 것에 대해 누군가 이미 지금 나를 의심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남부 문양이 찍힌 찻잔마저 그대로 두고 나왔기 때문이다.

    “…하아.”

    결국 나는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시간의 돌’마저 가방 속에 넣었다. 딱히 쓸 데가 없다고 하더라도 아무 데나 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빠르게 몸을 돌려 시온과 빈센트의 집으로 향했다.

    중간에 레오 때문에 살짝 변수가 생기기는 했지만 어쨌든 내게도 행선지라는 것이 있었다.

    아직 시간은 많이 흐르지 않았고 시온과 빈센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 시간은 충분했다.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해야 할 텐데, 회귀 전처럼…. 빈센트와 시온도 굳이 슬픈 내색은 하지 않을 게 뻔하니까.

    하지만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이 와중에도 빈센트가 ‘그럴 줄 알았다.’라며 요하네스의 욕을 하면 또 그의 편을 들어 주고 싶은 생각이 들 것 같았다.

    정말 바보 천치가 따로 없었다. 나는 나 스스로가 한심해서 비죽비죽 웃었다.

    아직도 요하네스의 욕이 듣기 싫다니, 마치 여전히 그의 부인이라도 된 것처럼.

    그의 정확한 진심을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는 내게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내 나름대로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계단으로 시온과 빈센트가 뛰어 내려왔다. 시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엘로이즈?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야? 하긴, 원래 연락은 안 했지만….”

    “찻잔 잘 썼어.”

    나는 싱긋 웃으면서 시온에게 감사 인사부터 했다. 아예 상관없는 가벼운 화제부터 꺼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주 잘 듣더라. 곧바로 의식을 잃던걸.”

    “…의식을 잃었다고?”

    빈센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생각해 보니 시온이 내게 찻잔을 건네줄 때 빈센트가 없었던 것 같아서 나는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응. 요하네스 노아비크를 재우고 오는 길이야.”

    그다음 이어지는 말도 원래는 다 준비해 두었다.

    역시 요하네스 노아비크는 내게 이로운 일은 하지 않는다는 둥, 유혹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 내려는 것도 보기 좋게 실패했다는 둥, ‘시간의 돌’은 절대로 내어 주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는 둥….

    머릿속에서는 그 말들이 거침없이 떠다니는데 정작 목에 걸려 잘 나오지 않았다. 내 입으로 그 모든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새삼 또 어려웠다.

    그러나 내 망설임을 들키기도 전에 빈센트가 조용히 물었다.

    “아침은 먹었어?”

    “아.”

    그러고 보니 항상 내 끼니를 챙겨 준 사람은 빈센트였다. 회귀 전에도 집안 살림을 맡는다는 이유로 언제나 요리를 담당했었고, 저번에도 내가 좀 출출하다고 하니 온갖 음식을 대접해 주었다.

    “…아니.”

    나는 다소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안 먹었어….”

    “일단 들어와. 간단히 차려 줄 테니까.”

    터벅터벅 걸어 들어가 응접실에 앉았다. 곧이어 빈센트가 따뜻한 수프와 함께 햄과 야채를 끼운 간단한 샌드위치를 가지고 들어왔다.

    “더 좋은 걸 해 주고 싶지만.”

    빈센트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내게 접시를 내밀며 말했다.

    “어차피 잘 안 먹힐 것 같아서.”

    “어?”

    “네가 그런 표정일 때 잘 먹는 걸 본 적이 없으니까.”

    “…어떻게 알아?”

    “넌 ‘에이스’에서 내가 시도 때도 없이 가장 많이 마주친 사람이야. 거의 10년 넘게 말이야.”

    그의 명료한 설명에 나는 피식 웃어 버렸다. 하긴, 내게 맞는 무기를 개발하라고 라르딘이 얼마나 난리를 쳤는지 빈센트는 하루가 멀다 하고 내 방에 들락날락거리곤 했다.

    항상 바바라의 감시하에 있었기 때문에 크게 빈센트와 소통한다고 느껴 본 적은 없는데, 그의 입장에서는 내 습관이나 일상 같은 것들을 관찰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가라앉히고, 이따 점심도 같이 먹어.”

    크게 샌드위치를 베어 먹는데 빈센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녁도 같이 먹고.”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 전, 마지막 날에도 그들은 나와 마지막 식사를 함께해 주었다. 비슷한 끝이라면 꽤 괜찮은 결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시온이 말했다.

    “뭐 하러 재우고 왔어. 그냥 죽이고 오지.”

    “응?”

    “억울하지도 않아? 내가 대신 죽이고 싶네.”

    나는 그 말 하나로 시온과 빈센트가 모든 상황을 대충 짐작했음을 알았다. 하긴, 그들은 처음부터 요하네스를 믿지 말라고 말했으니까. 어쩌면 제삼자의 눈에는 내 무모함이 객관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까지 네 인생에는 도움이 안 되는 놈이었어.”

    빈센트는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처음부터 너를 북부로 보내지 말걸 그랬나 봐.”

    빈센트의 말에 ‘결국에는 이렇게 될걸’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음은 뻔히 알 수 있었다. 하기야, 내일이 내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라는 건 언급만 하지 않았지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면.”

    나는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먹으면서 무심하게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았어야 했는데?”

    “계속 남부에 있었어야지.”

    “난 남부 싫어했어. 내가 말만 하면 다들 이상하다며 수군거리고… 알잖아.”

    “한적한 바닷가 같은 곳에서 지내면 될 일이야.”

    “그런 곳은 비싸잖아.”

    “적당한 무기 암매상만 통하면, 시간이 조금 걸릴지라도 살 수 있어.”

    “아, 그래?”

    어차피 다 의미가 없는 일이었기에 나는 별다른 감흥 없이 대충 추임새만 넣었다. 빈센트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너 옛날에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었잖아.”

    “내가 그랬었어?”

    “열다섯 살, 겨울에.”

    “그랬었나.”

    딱히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아마 그때는 어디라도 도망가고 싶어 했을 때니까 아무 데나 먼 곳을 동경하는 마음에서 한 말일 것이다.

    “기억이 안 나네.”

    “…나는 기억하는데.”

    내 무성의한 말에 빈센트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시온이 옅은 한숨을 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대화에 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저 빈센트를 보며 혀만 몇 번 찰 뿐이었다. 빈센트는 시온을 무시하며 참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런 곳에서 편안히… 그저 하고 싶은 거나 하면서 지내지 그랬어.”

    “…하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라… 회귀 전에 사실 그런 건 딱히 없었다. 뭘 해 봤어야 하고 싶은 것이 있지 않겠는가. 내가 멍하니 중얼거리자 빈센트가 조용히 덧붙였다.

    “널 위해서 무기 말고, 다른 것들도 충분히 만들어 줄 수 있었는데.”

    “다른 것 뭐?”

    “무엇이든.”

    뭐, 상상에 돈 드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샌드위치를 다 먹을 때까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기 말고 빈센트가 내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래서 내가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었을까.

    생각을 마친 나는 샌드위치를 다 먹고 나서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됐어. 그래도 총 말고는 딱히 들고 싶은 게 없네.”

    “…총은 들고 싶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악령을 없애는 총질은 지긋지긋했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레오를 구할 수 있었던 건 조악한 총이라도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빈센트의 초록색 눈을 보며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불가능하겠지만, 다시 시간을 돌리더라도 난 똑같이 북부로 갈 것 같아.”

    “뭐?”

    “또 요하네스와 결혼하겠지. 그리고 다시 한번 최선을 다할 거야.”

    결국 후회가 없다는 말이었다. 빈센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뭐라고 하려고 할 때였다.

    “엘로이즈?”

    창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시온이 벌떡 일어섰다.

    “너… 요하네스 노아비크 재운 것 맞아?”

    “응?”

    내가 얼떨떨하게 묻는 동안 시온은 아예 창가까지 바짝 다가가 있었다. 그러고는 심각한 얼굴로 다급히 말했다.

    “지금 저기 기사들을 끌고 3층에서 내려가는 사람, 요하네스 노아비크 같은데.”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나는 아연한 얼굴로 급히 반문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3층이라면 내 방이 있는 곳이고… 그가 기사들을 끌고 계단을 내려간다는 건 잠에서 깨었다는 얘기인데.

    빈센트 역시 벌떡 일어나서 시온의 옆에 섰다. 그러고는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맞아. 여기서 3층의 계단이 보이거든.”

    빈센트가 미간을 찌푸리며 설명했다.

    “저 체격이면 요하네스 노아비크가 맞는 것 같은데? 심지어 기사단도 잔뜩 이끌고 대체 어디를 가는 건지… 무슨 일이 있나?”

    그렇다면 지금 깨서 방을 나섰다는 건가? 하지만 시온의 말로는 몇 시간 동안 죽은 듯 잠을 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그에게 찻잔을 건넨 지 두 시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순간 갑자기 레오의 말이 떠올랐다.

    “아… 노아비크와 벨리아나스는 독이 잘 통하지 않아요.”

    “…뭐?”

    “아예 안 통한다, 뭐 이런 건 아니고… 선천적으로 내성이 강하다고 들었어요.”

    독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건, 결국 수면제도 잘 통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나는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가 기사단까지 이끌고 향하는 곳은….

    “내가 정신이 들면, 어떻게든 널 추적해서 내 곁에 붙들어 둘 테니까.”

    손이 덜덜 떨렸다. 평생 그에게 쫓겨 온 것이 이제야 실감 났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의 지척에 있었다.

    “젠장, 그놈이 지금 널 잡으러 오는 거야!”

    빠르게 상황을 눈치챈 시온이 달려와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급했다.

    “도망가, 엘로이즈. 얼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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