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3/65)
  • 그리고 그 질문에 의미를 둔 사람은 나뿐인 듯했다. 요하네스는 결정적인 순간에 내게 대놓고 거짓말을 했다. ‘푸른 루비’를 앞에 두고서 ‘푸른 루비’에게 줬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다니….

    “네.”

    나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둘 다 그 맹세를 지키지 못했어요.”

    요하네스는 진실을 주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그의 곁에 머무를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명백한 결말이었다. 요하네스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내 대답에 신관은 수염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지.”

    그래, 그럴 수 있었다.

    “은근히 흔한 일이오.”

    그 와중에 흔한 일이었나. 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이혼은 관공서에서 직접 지금 내가 처리하겠소. 혹시나 마음이 바뀐다면… 내일 안에 이혼 철회 서류를 갖고 오면 바로 취소 처리는 될 거요.”

    “네.”

    희미하게 웃어 보이고 뒤를 돌았다. 내일이라니, 공교롭게도 내 생일이었다.

    여신상과 늙은 신관, 나를 보며 열심히 꼬리를 흔들어 대던 작은 개. 결혼식 날 보았던 풍경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어서 어딘가 서글펐다.

    다시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걸음을 옮겼다. 뒤를 돌아보면 그동안의 결혼생활이 다시 와르르 머릿속에 밀려들 것 같았다.

    요하네스는 얼마나 잠들어 있으려나. 시온의 말에 따르면 못해도 반나절은 죽은 듯이 잔다고 했었는데. 이제 공작저를 나온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으니 여유는 있었다.

    요하네스만 잠들어 있으면 공작저에서 나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신변이 자유로웠다.

    다음 행선지는 정해져 있었다. 이제 처리할 건 다 처리했으니 시온과 빈센트를 만나러 가야 했다.

    내가 걱정되어 여기까지 와 준 내 가장 오래된 동료들. 굳이 죽는 모습까지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지막 인사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어쨌든 내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 여기까지 와서 건국제가 끝날 때까지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하필 이웃집이라 다시 공작저로 돌아가는 모양새가 되어 기분이 묘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최대한 태연하게 굴어야지.’

    그들 역시 마음이 복잡할 게 뻔했다. 그러니 괜히 침울한 모습을 보여 줄 필요는 없었다.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회귀 전에 생일을 맞이했던 때처럼.

    그렇게 내가 매일같이 드나들었던 공작저의 이웃집, 시온과 빈센트의 저택에 막 들어서려던 참이었다.

    “엘로이즈 님!”

    갑자기 공작저에서 레오가 뛰쳐나왔다.

    “레오?”

    레오가 당연히 공작저에서 치료를 하고 쉬고 있을 거라 예상했던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심지어 호위도 없는 상태였다.

    “내가 너 위험하다고 했잖아! 왜 혼자 여기에….”

    정신없이 다그치려고 할 때였다. 레오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이거요.”

    레오의 손에 들려 있는 작은 돌은 나도 예전에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우와! 이 ‘시간의 돌’을 쓰면 1596년 5월 8일, 0시 15분으로 다녀올 수 있다는 거죠? 5분 동안?”

    수도에서 올라오는 길에 요하네스가 처리했던 최상급 악령이 떨어트린 ‘시간의 돌’. 요하네스가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으로 5분간 갈 수 있게 해 준다는, 전혀 쓸 데가 없어 보이던 그 ‘시간의 돌’이었다.

    레오가 내게 그 ‘시간의 돌’을 쥐여 주며 말했다.

    “제가 지금 ‘보물의 방’에서 꺼내 왔어요.”

    나는 아연한 눈으로 그 ‘시간의 돌’을 바라보았다.

    1596. 5. 8. 00:15. 5'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