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시점에, 이런 난리 통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도 굳이 정체를 숨겨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게다가 레오를 살리는 건 내가 이번 생에서 반드시 하고 싶은 일이었다.
비록 요하네스가 나를 속였다고 해도, 끝까지 이용만 했다고 해도… 나는 맨 처음 회귀할 때의 내 다짐을 지킬 예정이었다. 레오를 살리고 싶어 했던 요하네스의 바람을 대신 이루어 주는 것.
그는 아마 내가 무엇을 그에게 주고 싶어 했는지 끝까지 모를 것이다. 나는 레오가 있는 미래, 그래서 그가 죄책감에 비참한 표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미래를 주고 싶었다.
“사랑하는 상대에게는 뭐든 주고 싶은 게 당연한 거야.”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나는 그를 사랑하니까. 고민은 짧았다.
“마님!”
“대체 무슨….”
나는 그들에게 대답하지 않고, 다만 사정거리에 자객들이 들어오자마자 차례차례 방아쇠를 당겨 맞혔다.
레오와 세예나의 시선이 감탄과 경악을 섞은 채 내게 고정되었다.
이 아무도 없는 외진 골목길 입구에 서서, 아무리 활동하기 편한 옷을 골라 입었다고는 하지만 귀족들이 입는 고급스러운 원피스를 입고, 차분한 표정으로 장난감 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있는 내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보인다는 얼굴이었다.
“으악!”
“아아아아악!”
총은 이미 내 몸의 일부나 마찬가지였다. 한 발 한 발 조악한 소리를 내며 총알이 나갈 때마다 자객들이 비명을 지르며 휘청거렸다.
“얼른 뛰어와!”
자객들이 눈을 잡고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기 시작하자 내가 소리쳤다.
“얼른! 큰길로 나가야지!”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세예나가 레오를 안고 큰길로 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레오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옆에서 헐떡대며 함께 뛰면서도 씩 웃어 주었다.
“사냥할 땐 심장이 아니라 눈을 맞추는 거라며, 레오. 좋은 것 가르쳐 줘서 고마워.”
사실 장난감 총알으로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곳은 눈밖에 없었다. 제대로 죽일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도망갈 기회를 만들 수는 있었다.
“레오 네가 가르쳐 준 거잖아. 아주 유용하네.”
나는 싱긋 웃으며 농담까지 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레오와 세예나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둘 다 어리둥절하면서도 어딘가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빠르게 큰길로 빠져나와서야 우리는 인파 속에 몸을 숨겼다. 나는 세예나에게 목소리를 낮춰 지시했다.
“저 자객들은 죽지 않았어. 그러니까 지금 이대로 사람들이 많은 곳을 골라 얼른 레오를 공작저로 데리고 가.”
“…마님 …그, 그런데….”
“시간이 없어. 너도 많이 다쳤잖아. 최대한 빠르게 가는 게 좋을 거야. 설명은 공작저에 가서 요하네스에게 들어.”
세예나는 궁금한 게 많은 표정이었지만 상황이 급박한 것은 아는 모양인지 질문하지 않고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들를 곳이 있어. 먼저 가. 그리고….”
세예나와 레오는 둘 다 정신이 없어 보였다. 하기야, 갑작스러운 습격 때문에 죽음까지 각오했다가 예상하지도 못한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놀랄 만도 했다.
“레오, 잘 들어.”
나는 레오의 볼을 살짝 건드리며 웃었다. 짧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서였다.
“너는… 너는 내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었어. 네가 이렇게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게 얼마나 큰 기적인지, 아마 너는 평생 모르겠지….”
나를 바라보는 레오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무언가 속에서 울컥하고 치밀어 올라서 목소리가 떨렸다.
이 아이와 가까워지기 위해 쭈뼛거리며 주위를 맴돌았던 10개월 전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그때에는 경계심이 가득한 작은 고양이 같은 아이였는데.
어떻게든 친해져서 ‘시간의 돌’을 달라고 부탁해 볼까 잠시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런 말을 꺼내지 않은 건 옳은 선택 같았다.
레오 노아비크, 너를 살릴 수 있어서 내 회귀가 요하네스 노아비크에게 떳떳하니까.
“너로 인해 나는 내 삶이 부끄럽지 않고, 후회되지 않아.”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좋은 영향 하나쯤은 끼쳤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씁쓸하지 않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네게는 네 인생을 아주 소중히 여겨야 할 의무가 있어.”
나를 살리는 데 실패했어도 이 작은 소년을 구했으니 어쨌든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레오의 볼에서 손가락을 떼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한밤중에 혼자 말을 달리고… 그런 건 하면 안 돼. 넌 생각보다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으니 요하네스 옆에 딱 붙어 있어. 알겠지?”
“엘로이즈.”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세예나에게 안겨 있던 레오가 내 팔을 갑자기 잡았다.
“왜 그래요? 작별… 인사를 하는 것처럼.”
잠시 고민했다. 곧 다시 만날 거라는 말을 하면 지금이야 편하겠지만 어차피 곧 들킬 거짓말이니까.
“음.”
나는 레오를 안고 있는 세예나를 의식하면서 천천히 말을 골랐다.
“나는… 요하네스에게 조금 서운한 게 있어서, 잠시 떠나 있으려고 해.”
세예나의 눈 역시 크게 떠졌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구한 것도 사실이기에 무작정 요하네스 앞으로 끌고 갈 수 없는 듯했다.
“공작님이요? 공작님은… 공작님은 원래 그래요…. 서운해도 기다리면 좋아질 거예요.”
레오가 간절하게 말했다.
“지금도 많이 좋아지셨잖아요. 네? 대체 공작님이 엘로이즈 님께 뭘 그렇게 잘못한 거예요?”
“별것 아냐, 레오. 그냥 내가 가지고 싶은 게 있었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레오가 요하네스에게 반감을 가지지 않을까 고민하면서 말을 뭉뚱그렸다.
“그걸 공작님이 안 주셨거든. 근데 그건 공작님 잘못은 아니야. 내 물건도 아닌데 욕심 부린 내 탓이지. 사실 안 주는 게, 뭐, 여러모로 맞긴 하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레오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그래도 공작님을 사랑하시죠?”
그 질문은 마치 기습처럼 느껴졌다. ‘사랑하지 않는다, 이혼하려고 한다, 다시는 볼 일이 없다.’라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심장이 따끔하게 죄이듯 아파 왔다. 평소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결국 나는 체념하듯 말했다.
“…사랑해.”
지금 이 상황에서도 그 말밖에 나오지 않는 나 자신이 우스웠다.
“서운해 미치겠는데도, 사랑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 바보 같지.”
힘겹게 말을 마무리한 나는 레오의 팔을 살짝 떼어 냈다. 결국 레오의 앞에서는 끝까지 거짓을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세예나를 향해 단호하게 명령했다.
“어쨌든 이제 얼른 가. 저택으로 돌아가고, 다시는 호위를 한 명만 붙이는 짓은 하지 마. 이제 알았겠지만 생각보다 레오는 여기서 많이 위험해.”
“마, 마님… 하지만 마님도 위험….”
나는 세예나의 헛된 걱정에 제대로 대답하지도 않은 채 장난감 총이 들어 있는 가방을 툭, 쳐 보였다. 세예나는 눈을 굴리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네, 그럼 일단 저도 부상이 심하니 공작저로 가겠습니다. 그런데 마님….”
레오를 다시 추켜 안으면서도 한마디 더 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흔한 부부간의 기 싸움이니 제가 끼어들 여지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너무 오래 떠나 있지 마세요. 아마 하루만 지나도 공작님은 버티시지 못하고 모든 걸 주겠다고 달려오실 겁니다.”
흔한 부부간의 기 싸움….
‘흔하다’라는 말이 나오니 이 와중에도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정말 내가 봐도 나는 맘이 약했다. 내가 나도 모르게 헤벌쭉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세예나가 묵례한 뒤 빠르게 레오를 안고 공작저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대로 가장 가까운 광장의 여신상으로 향했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 ⚜ ⚜
공교롭게도 옛날 요하네스가 묵던 여관이 그냥 공작저가 된 셈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가장 가까운 여신상은 우리가 간이 결혼식을 올렸던 곳에 있었다.
“어허… 흠.”
여신상을 지키고 있던 늙은 신관이 꾸벅꾸벅 졸다가 내 모습을 보고 눈을 비비며 일어섰다. 그가 일어서자 그의 발치에서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던 개 역시도 깨서 왈왈 짖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무슨 일로 오셨소?”
우리의 결혼식을 진행했던 그 늙은 신관은 10개월 동안 전혀 변한 것이 없었다. 내가 이혼 서류를 조용히 내밀자 그제야 그가 돋보기안경을 찾아 쓴 뒤 미간을 찌푸렸다.
“…이혼?”
“네.”
“어디… 어디 보자. 그… 1년 전의 그 부부 아니오.”
정확히 말하면 1년은 아니고 10개월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관은 옅은 한숨을 쉬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최근 몇 년 새 진행한 약식 결혼식이 그거 하나뿐이어서 선명히 기억하고 있지… 잘 협의된 거요?”
“네.”
이상한 감상에 젖어 들기 전에 얼른 처리하고 싶었다. 나는 오히려 더 무뚝뚝하게 재촉하듯 말을 이었다.
“서류는 완벽해요. 맞죠?”
“…그건 그렇다만.”
요하네스 노아비크의 이름에 찍힌 노아비크의 인장은 위조하려야 위조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신관은 천천히 서류를 받아 들고는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안타깝지만 서로가 원하는 걸 서로에게 주지 못했나 보오.”
이 자리에서 요하네스와 결혼식을 치렀다. 몇 가지 질문으로 된 우습지도 않은 약식 결혼.
그때만 해도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이런 공식적인 절차 자체가 감동적이었는데.
그래서 지나치게 진지하게 임했었나. 진실을 원한다니…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 수상해 빠진 대답이었다.
“그럼 요하네스 노아비크 공작, 여신상 앞에 맹세코 사랑하는 이에게 진실을 줄 수 있겠소? 그리고 엘로이즈 르노아로 영애, 여신상 앞에 맹세코 사랑하는 이에게 머무름을 줄 수 있겠소?”
그때 우리는 망설임 없이 알겠다고 했었다. 꽤 오래전 일인데도 불구하고 기억이 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