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1/65)
  • 이상하게 아귀가 맞지 않는 순간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분명한 추론을 만들어 냈다.

    그 많은 악령을 혼자서 다 처치하고 나서도 목걸이의 보석을 늘리지 않았던 유제이. 빈센트의 손에 가득했던 상처들. 에멘타의 주술을 빌려 온 이후, 엘로이즈만 보면 마치 주인을 보는 개처럼 정신을 못 차리던 베이든.

    연회 때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일어난 폭죽 사고, 지나치게 정확한 사격 솜씨, 대신전에서의 어이없을 정도로 놀라운 활약….

    그 모든 것을 모르는 척하는 건 요하네스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필사적으로 눈을 감고 싶었다.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아니라고 하면 모르는 척해 주고 싶었다.

    그쪽이 더 황홀했기에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바보라서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살지는 않는 법이다. 그저 어쩔 수 없는 것뿐이지.

    그녀가 ‘푸른 루비’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이미 ‘푸른 루비’를 알고 있으니까. 지금쯤 마흔다섯 살 정도 되었으려나.

    아마 ‘푸른 루비’의 관계자일 것이다. 어쩌면 ‘에이스’ 출신일 수도 있겠지.

    제프가 말했던, ‘에이스’가 폭발하던 날 도망가던 두 남녀가 그녀와 빈센트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관계일지도.

    그러나 그 무엇도 그녀에게 질문할 수 없었다. 질문하기는커녕, 오히려 최측근들에게도 숨겼다.

    연회 날 그녀에게 절망적으로 입을 맞추었을 때부터 그는 노아비크의 긍지, 인생의 신념, 추구하던 목적과 그 자신에게 떳떳하기 위해 노력해 온 그 수많은 시간들을 모두 다 버렸다. 그 자신을 버렸다.

    엘로이즈의 앞에서 그의 인생이 멋대로 통제를 벗어나 날뛰는 걸 자각하고 있는 기분은 비참하기 그지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었다.

    그를 무력하게 만들었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냥… 제가 좀 눈에 띄지 않아서요?”

    수많은 반짝이는 것으로 둘러싸인 연회에서도 그녀밖에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다소 자신의 옷차림에 자신 없어 했으나 그 또한 시리도록 예뻤다.

    마치 아주 평범한 부부처럼 춤을 추었을 때 그녀가 간절한 눈으로 속삭였었다.

    “…돌아가고 싶어요, 북부에. 요하네스, 당신하고 함께.”

    아마 거짓말이었겠지, 그건.

    “야영을 가요. 이젠 소풍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가고 싶어요.”

    그래도 그 말을 들은 후로, 야영을 가면 좋을 만한 북부의 명소들을 내내 생각했었는데.

    “밤중에 요하네스가 제 방문 앞에서 서성거리면서 못 들어오고 있으면….”

    그 머저리 같았던 밤들조차 그리웠다. 적어도 그녀의 옆모습은 실컷 볼 수 있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그때에도 그 방문 앞에서 돌아서는 것이 힘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제 침대에 끌고 와서… 옆에 눕도록 한 다음에 만지게 해 줄게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유혹에 전혀 소질이 없었다. 그때 그 말을 할 때조차도 장난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장난에도 온몸이 달아올랐던 걸 보면 그가 이미 단단히 홀려 있었던 거겠지.

    “최선을 다할게요… 약속했잖아요… 잘하겠다고…. 절대 배신 안 할게요. 절대로… 절대로 그런 일 없어요. 맹세해요.”

    첫 잠자리에서조차 그런 말로 그녀는 그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엘로이즈는 그가 마치 언제라도 그녀를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확실히 자신을 경계했다. 정작 그는 그녀를 의심할 수조차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버리려고 했다. 어떻게든 레오에게 완전한 후계자 자리를 줘야겠다는 다짐도, 자신이 벌인 일에는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노아비크의 본능조차도. 레오가 준 가언이 새겨진 조약돌은 일부러 처박아 두고 보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손을 잡고 북부로 돌아가려고 했다. 디에고의 계획을 저지하고 싶었던 건 그저 그녀와 머물 북부가 더 안전하길 바라서였다. 그녀가 결국 자신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대체 왜 20년 전의 ‘시간의 돌’을 요구했던 걸까. 처음부터 그게 목적이었겠지.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자 바로 나를 독살하고 도망쳐 버린 걸까.

    그러니 손끝 하나 꼼짝할 수 없는 지금에도 이 모든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알고서 속았고 모르는 척 그녀를 안았다. 다만… 노아비크는 선천적으로 독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그녀는 잘 모르겠지.

    만일 내가 죽지 않으면 어쩌려고, 엘로이즈.

    그녀에게 죽어 줄 수는 있어도 그녀를 놓을 수는 없다. 그는 독까지 친절하게 먹어 주는 호구 새끼 중 호구 새끼였으나 계산은 정확한 사람이었다.

    실패하면 실패의 값을 치러야 한다. 만일 그녀가 도망에 실패한다면 무조건 다시 붙잡아 와 그의 곁에 데려올 것이다. 그때야말로 그녀를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 후는… 그리고 그 후는….

    그는 그녀를 미워할 수 없었다. 방긋 웃으며 독이 든 차를 건네는 그 얼굴을 보고도 무력할 만큼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를 붙잡아 와서 곁에 두고 다시 한번 안아 입 맞추면 그녀는 자신을 미쳤다고 하겠지.

    언제까지나 무의식에 잠겨 있을 줄 알았는데 손끝이 움직였다. 요하네스는 몽롱한 정신을 어떻게든 끌어모았다.

    노아비크의 핏줄이 강하긴 한 모양이지, 얼마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의식이 돌아오고 있는 걸 보면.

    엘로이즈가 상상하지도 못한 빠른 속도로, 그는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 ⚜ ⚜

    사실 내가 레오를 따라간 것은 대단한 일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어차피 세예나도 따라갔으니까.

    다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경고를 해 주고 싶었을 뿐이다. 정원 파티에서는 그 어떤 음식도 먹지 말라고.

    황궁에서 여는 연회에서 독살이 나온다면 황실의 권위가 떨어지는 일이라 디에고 입장에서는 그런 무리한 계획을 세우기 어렵다. 그러나 한낱 수도 귀족의 정원 파티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타이밍이 너무 좋아. 대신전 일 때문에 우리 다 긴장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레오를 직접적으로 노리고 있다는 건 나밖에 모르는 사실이고!’

    나 또한 내 죽음에 정신 팔려서 챙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 막 출발했다고 했으니 따라잡아서 한마디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뭔가 불안하니까 그냥 집으로 돌아오라고 해도 될 것이다. 굳이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으니까.

    달려가는 내내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마지막으로 레오 얼굴은 보고 싶었다.

    다시 못 볼 가능성이 높은데 작별 인사도 하고, 모든 걸 말해 줄 수는 없지만 네 목숨이 위험하니 꼭 요하네스 옆에 붙어 있으라는 당부도 해야지.

    요하네스를 꼭 닮은 소년의 귀여운 얼굴을 생각하니 이상하게 울컥했다.

    멋대로 회귀해서 내 수명을 늘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 소년을 살렸으니 됐다. 레오의 장례식을 치르지 않고, 그 때문에 요하네스가 쓸쓸하게 어두운 밤을 헤매지 않게 했으니 그걸로 됐다.

    성력은 내 인생에 저주 같은 힘이었다. 그러나 그 저주 같은 힘으로 해낸,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값지고 착한 일.

    남에게 평생 나쁜 일에 이용만 당했던 내 성력이 처음으로 좋은 일에 쓰일 수 있어서 기뻤다. 레오를 구할 때만큼은 ‘내게 왜 이런 힘이 존재해서….’ 같은 회한은 들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악령을 처치하면서 그렇게 기분이 좋은 순간은 내 인생에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레오를 더더욱 보고 싶었다. 달리기가 빠른 편도 아니고 지구력이 높은 편도 아닌데 발이 빠르게 움직였다. 아마 정신력인 것 같았다.

    그렇게 마차의 예상 경로를 따라서 외진 골목에 들어섰을 때였다.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내 눈에 믿기지 않는 풍경이 들어왔다.

    나는 당황해서 살짝 멈칫했다.

    “이, 이건….”

    노아비크 공작저의 마차가 널브러져 있었다. 이미 말과 마부는 피를 흘린 채로 죽어 있는 채였다. 명백한 습격이었다. 그리고 검을 들고 벌벌 떨고 있는 레오 앞에서 세예나가 고전하고 있었다.

    “…마님!”

    내 기척을 눈치챈 세예나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며 소리쳤다.

    “여긴 어떻게… 얼른 도망가세요! 얼른요!”

    검을 든 자객들이 모두 여섯이었다. 이미 셋은 세예나에게 처치되었는지 저 구석에 쓰러져 있었으나 세예나 역시 타격을 입은 듯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어깻죽지에 길게 자리한 검상이 보였다.

    이 난리가 났는데도 골목에 있는 주택가에서 그 누구도 내다보지 않았다. 이미 레오를 없애려고 단단히 준비를 마친 상태인 듯했다.

    말도 안 돼… 레오를 죽이려고 한다면, 심지어 티타임 초대였으니 독살이라는 편한 방법이 있을 텐데, 대체 왜 시내 한복판에서 굳이 이런 습격을….

    “엘로이즈 님! 도망가요!”

    쓰러진 마차와 세예나의 사이에 있던 레오가 크게 외쳤고 내 등장에 움찔했던 자객들이 다시 세예나에게 달려들었다. 드레스 차림의 젊은 여자가 썩 이 일에 변수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빨리요!”

    세예나 역시 검을 크게 휘두르며 소리쳤다.

    “여기 계시면 다칩니다! 얼른 가서 도움을 요청해 주세요!”

    그러나 사실 그건 좋은 판단이 아니었다.

    이미 이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매수가 되어 있으니 멀리 가야 할 텐데, 거기까지 가서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 세예나와 레오는 당할 것이다. 적의 수가 워낙에 많았고 세예나는 레오를 지켜야 했기 때문에 움직이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렇게 한낮에, 수도의 한복판에서 적나라한 습격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방심한 것이다. 레오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시끌벅적한 큰길까지 닿지 않았다. 하필 건국제 바로 다음 날이라 여전히 축제 분위기로 소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달려가면서 가방에서 장난감 총을 꺼내 들었다. 세예나와 레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제대로 된 무기도 아닌 장난감 총을 꺼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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