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하녀가 트레이를 밀며 들어왔다.
여러 가지 찻잎과 내가 요구한 대로 찬물, 더운물까지 모두 깔끔하게 챙겨온 터였다. 내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냥 놔두고 가, 내가 직접 차를 탈 거거든.”
“아, 네.”
하녀가 싱긋 웃고 허리를 숙였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트레이만 남겨두고 하녀는 떠났고, 나는 트레이 위의 찻잔을 은근슬쩍 밀어내며 웃었다. 조금 기다렸지만 요하네스에게서는 더 이상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일단 차부터 한잔할까요.”
일부러 가볍고 태연하게 화제를 돌리는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시온이 준 찻잔에 마실까요? 남부에서는 이 찻잔 세트가 결혼 선물로 엄청 유행이래요. 함께 차를 마시면 함께 영원히 행복할 거라는 말이 있다나…. 귀엽지요? 이건 제 거, 이건 당신 거.”
나는 그의 앞에 수사자가 그려진 찻잔을 내밀었다. 요하네스 역시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 짓고 있는 여유로운 표정, 차분한 분위기, 밝게 들어오는 아침 햇살, 몸에 아득하게 남은 지난밤의 흔적들.
하녀가 흐뭇하게 웃고 별생각 없이 나갈 수 있을 정도로 평온한 광경이었으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비참하게 긴장하고 있었다.
“페퍼민트로 할까요. 아니면 캐모마일도 괜찮을 것 같은데….”
“뭐든, 그대 마음대로.”
찻잎을 골라내면서, 나는 죄어드는 마음으로 빠르게 기억을 회상했다. 회귀 전, 그 ‘시간의 돌’을 언급하면서 요하네스는 어떻게 말했더라.
“나는 쓸 데가 없었지.”
결국 자기는 쓰지 않았지만 다르게 말하면 남에게는 주었다는 이야기도 되었다. 회귀 이후 그 말을 ‘여전히 보물의 방에 있다’라고 짐작하여 새로운 목표로 살아온 내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안도하는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가 내게 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정말 못 주는 거라면. 남에게 이미 준 상태라 도저히 줄 수가 없어 이러는 거라면.
내가 곧 죽는다는 결말에는 변화가 없지만 그래도 어딘가 위안이 되었다. 그가 적어도 나를 이용해 먹을 대로 다 이용해 먹고 부탁은 들어주지 않는, 그런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리고 그 생각이 드는 내 자신이 스스로도 서러웠다. 그게 지금 이 상황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얼마 안 남은 목숨을 부여잡고서도 요하네스의 진심이나 따지고 있는 내 사랑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시간의 돌’은… 민간인한테 주지 않는다면서요.”
내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주전자를 든 채 횡설수설하자 그가 천천히 말했다.
“그래. 그래서 많이 후회했지.”
그의 낮은 목소리가 아주 느릿하게 이어졌다.
“…심지어 ‘푸른 루비’에게 줬거든.”
순간 온몸에 피가 싹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잠시 풀어졌던 마음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푸른 루비’에게 주었다니, 그건 명백한 거짓말이었으니까. 요하네스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말하고 싶지 않았지.”
그가 참담한 표정을 지어 보일수록 마음이 무너졌다.
지나가는 행인에게 주었다고 해도 이토록 거짓말임을 확신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내가 ‘푸른 루비’인 것이 슬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내….”
고요히 침묵하는 내 얼굴을 보며 그가 아득한 눈을 해 보였다.
저 생생한 표정이 연기라고 생각하니 더더욱 서글퍼졌다. 하지만 슬프게도 나는 대신전에서 그가 꽤 연기를 잘한다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한 상태였다.
“내 원죄야.”
나는 그 와중에도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회귀 후에도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요하네스는 회귀 전에도 명백히 의심 가는 나를 ‘푸른 루비’라고 단언하지 않았다.
다만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고 확신했을 뿐이다. 내가 총으로 성력을 쏘는 그 순간을 눈으로 확인하기까지 내게 ‘푸른 루비와 무슨 관계’냐고 물었다.
지금도 그는 똑같은 오류에 빠져 있었다.
그는 명백히 나를 수상히 여기고 있으며 의심이 가는 그 모든 순간들을 차곡차곡 기억해 두고 있었으나 내가 ‘푸른 루비’라고 생각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거짓말의 핑계로 ‘푸른 루비’를 대고 있는 거겠지.
“그렇군요.”
이렇게 모든 것이 끝났다. 요하네스는 내게 거짓말을 해서라도 그 ‘시간의 돌’을 주지 않겠다고 하고 있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게 도움을 받았다는 걸 이미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주전자의 물이 깔끔하게 찻잔 안으로 떨어졌다. 그동안 마음속에 새겨왔던 순간들이 어디론가 뚝뚝 떨어졌다.
최상급 악령 앞에서 나를 구해 주던 그의 뒷모습, 내가 볼에 입을 맞춘 뒤 뻣뻣하게 굳어 버리던 우스운 표정, 한때 구해 주지 못했던 소녀를 떠올리며 괴로워하던 그의 얼굴, 연회 때 굴복하듯 절박하게 이어지던 키스, 그가 나를 다정하게 끌어안았던 모든 밤의 속삭임.
시온과 빈센트가 아무리 경계하라 일러 주었어도 나는 나만이 볼 수 있고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오만하게도.
그러나 그런 것들은 실체가 없었다.
과정은 눈을 흐릴 뿐이니, 본질을 보려면 결과를 보라는 시온의 말은 파급력이 컸다. 그는 내가 내 목숨을 언급했는데도 거짓말까지 하며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다른 결론이 뒤따라왔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말 또한 거짓이다. 사랑한다면 이럴 수 없다.
그렇다면 나를 사랑하는 척한 건 정말 이용하기 위해서였을까. ‘푸른 루비’와 관계되어 있다는 확신 이후 나를 옭아매기 위해 지금까지 연기라도 한 것일까.
그럼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다고 느끼면 정말 나를 심문하기라도 하려나.
“…다 된 것 같아요. 이제 마시면 될 거예요.”
차 거름망으로 찻잎을 다 걸러낸 뒤, 나는 요하네스의 앞에 찻잔을 내밀었다. 이제 다음 행동에 대한 계획은 모두 세웠고 시행만이 남아 있었다.
요하네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순순히 찻잔을 받아 들었다. 잠시 찻잔을 내려다보던 그가 씩 웃었다.
“그대가 내게 차를 내려 준 건 처음이군.”
“남부에서는 꽤 내렸어요. 맛은 괜찮을 거예요.”
아까는 심장이 정말 터질 듯이 뛰었는데 오히려 지금은 또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보란 듯이 내 몫의 차도 한 모금 먼저 마셨다.
“맛있네요.”
요하네스가 의심하지 않고 마신다면 고맙겠지만, 그가 당장 사람을 불러 찻잔의 독을 검사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아침부터 페퍼민트 차를 마시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수상한 일이니까.
그래도 남은 목숨이 이제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서운 것도 아쉬운 것도 없었다.
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내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고 내 사랑 역시 보답 받지 못했다.
요하네스가 실패에 익숙하듯, 나 역시 이용당하는 데에 익숙했다.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평생을 도구로 사용당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용당했을 지라도 지난 10개월 동안 행복했으니 그걸로 되었다 싶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요하네스에게서 자유롭고 싶었다. 요하네스가 지금 한껏 느긋한 건 지금 이 공간이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에라도 당장 나를 포박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무언가 수상하다 느낀 요하네스가 나를 붙잡아 가둘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남은 시간을 오롯이 나 스스로 보내기 위해서는 그에게 시온의 찻잔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요하네스에게 심문당하다가 죽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은 그에게서 벗어나 도망가야 했다. 마지막만큼은 내가 생각한 대로 온전히 맞이하기 위해서.
그가 천천히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엘로이즈, 그런데.”
그의 낮은 목소리가 평상시처럼 느긋했다.
“사실 내게 독은 잘 듣지 않아…. 그대는 잘 모르겠지만.”
독이라는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 무슨….”
“그러니 내가 죽지 않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마.”
다 들켰나 싶어 아랫입술을 꾹 깨물던 찰나, 그가 단숨에 찻잔을 들이켰다.
“…요하네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연한 얼굴로 요하네스의 금빛 눈이 흐려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그에게 찻잔을 건넨 것은 ‘들키지 않는다’와 ‘들켜서 심문당한다’라는 두 가지 결말만 예상했기 때문이다.
알면서 그가 차를 들이켠다는 건 예상외의 행동이었다. 아니, 나 외에 모든 사람들에게 물어도 다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놓아주는 건 한 번이야, 엘로이즈. 그러니 기회를 줄 때 열심히 도망가 봐.”
그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내가 정신이 들면, 어떻게든 널 추적해서 내 곁에 붙들어 둘 테니까. 난 도망에 실패한 아내를 놓아줄 정도로 성인군자는 못 되거든.”
머리가 울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그의 금빛 눈이 나를 끝까지 응시했다.
“당신… 왜 알면서….”
그러나 내가 벌떡 일어났을 때, 요하네스는 그대로 의자에 기대어 눈을 스르르 감았다. 곧바로 대답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독, 독약 아닌데….”
나는 황당한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실제로 그가 죽음을 각오하고 그 찻물을 넘겼다는 것이 더 어이가 없었다.
“내가…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아직도 찻잔에는 찬 기운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혹시 모른다는 마음에 숨소리를 살폈다. 고르고 평안한 것을 보아서 과연 깊이 잠들기만 한 것 같았다.
“진짜….”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 예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사람이야….”
하나부터 열까지 다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거짓말까지 해 가면서 내게 ‘시간의 돌’을 주지 않아 놓고… 내가 독을 준다고 예상하고도 마시는 그 의도는 또 뭐란 말인가.
당연히 나를 그저 이용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내 사랑을 눈치챈 뒤 옳다구나 싶어 휘두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추측했다. 아득했던 어젯밤까지도 나만의 진심이었나 싶었는데.
내가 결국 그를 해치지 못할 것이라는 걸 눈치챈 걸까. 독인 것을 알고 찻잔을 건네받은 심정은 대체 어떤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