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8/65)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요하네스의 미간이 천천히 찌푸려졌다.

    “…20년 전? 수도에 오면서 얻은 것 말고?”

    “네. 20년 전이요. 당신이 여덟 살 때 최상급 악령을 죽이고 얻은 그 돌 말하는 거예요.”

    요하네스의 입장에서는 황당할 법도 했다. 그는 한 번도 20년 전 얻은 ‘시간의 돌’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그 ‘시간의 돌’이 무슨 기적을 일으키는지도 발설한 적이 없을 것이다.

    “물론 당신이 ‘시간의 돌’을 민간인에게 주지 않으려고 한다는 건 알아요. 그 빌어먹게 고상하신 노아비크의 정신도 잘 알고요. 근데… 근데 그거 저 주시면 안 돼요?”

    나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던 그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자 생각보다 더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그것만 지금 저에게 주신다면… 앞으로도 열심히 도와드릴게요. 신전에서의 실패는 마음이 좀 쓰리긴 하지만 그때 제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 아시잖아요.”

    “지적하고 싶은 말들은 많지만….”

    요하네스는 낮게 말했다.

    “일단, 갑자기 20년 전의 돌은 왜….”

    그는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옅은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미안해, 엘로이즈. 결론만 말하자면 그건 내가… 그대에게 줄 수가 없어. 그러니 더 이상 그렇게 자신을 낮춰 가며 애원하지 마.”

    “…절 사랑하신다면서요. 노아비크의 사명이 저보다 더 중요해요?”

    “이미 노아비크의 사명이나 긍지 같은 건 갖다 버렸다고 말하지 않았나… 하지만 불가능한 걸 해 주지는 못해.”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세상 다정하게 나를 안아 주는 손길과는 다르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는 그 단호한 선언이 나를 무력하게 했다. 내가 잠시 무너지는 마음을 붙잡고 있는데 그가 조용히 물었다.

    “대체 왜 필요한지 말해 줄 수 있을까.”

    “…그럼 왜 불가능한지 말해 줄 수 있어요?”

    우리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어느 때보다도 불편한 정적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지 망설이고 있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설마… 내가 죽는다고 해도 주지 않으려나?’

    어쨌든 시간은 내 편이 아니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열어야 하는 사람은 나였다. 안 된다고 해도 설득해야 했다.

    “절대로 정체를 들키지 마. 말하고 싶어도 끝까지 말하면 안 돼.”

    처음부터 내 정체를 밝히는 건 지나치게 위험한 일이었다. 구구절절 사정을 다 털어놓는 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 둬야 했다.

    그러니까 애초의 계획대로, 내가 그동안 얼마나 그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설명하려고 할 때였다. 요하네스는 반드시 진 빚을 갚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내가 황궁과 대신전에서 그를 열심히 도와줬다는 이야기를 다시 한번 짚으면….

    갑자기 알싸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솔직히 내가 요하네스 노아비크라면 네 정체를 알아도 침묵할 거야. 알아서 이렇게 도움이 되어 주니 말이야.”

    지금까지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나는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는 생경한 눈으로 그를 다시 한번 빤히 바라보았다.

    대체 왜 내게 아무것도 질문하지 않지. 대신전에서 그렇게 수상하게 굴었는데. 어쩔 수 없이 ‘푸른 루비’에 대한 정확한 정보까지 떠들어 대며, 파괴력이 상당한 장난감 총까지 동원해서.

    요하네스 노아비크가 그 사실을 놓쳤을 리 없다. 분명히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다른 요인들도 이미 다 파악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

    “유혹해서 누군가를 이용한다는 건… 우리만 하는 생각이 아니라는 걸 알아 둬. 요하네스 노아비크도 거꾸로 우리를 이용할 수 있다는 소리야.”

    내 의지대로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레오를 반드시 살리고 싶었고, 요하네스를 최대한 돕고 싶었다.

    대신전에서 함께 같은 목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어딘가 설레서 실제로 무리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게 다… 결국에는 요하네스에게 도움이 되는 일들이었다.

    “…그걸 …그걸 어떻게 아는데. 요하네스가 날 이용하는지… 어떻게 아냐고.”

    “그거야말로 단순해 빠진 문제야. 만일 요하네스가 널 이용해 먹었다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네게 필요한 걸 주지 않겠지. 결론만 보면 돼, 결론만. 과정 같은 건 생각해 봤자 헷갈리기만 하고.”

    시온의 말대로 결론만 본다면… 그는 결국 내게 ‘시간의 돌’을 주지 않겠다고 하고 있었다.

    만일 정말 나를 이용만 한 거라면 결국 속내가 뭘까. 내가 ‘푸른 루비’라는 걸 눈치채지는 못했더라도 옆에 두고 감시라도 하고 싶어 하는 건가.

    내가 아는 요하네스 노아비크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으나….

    목적을 위해서라면 대신관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요하네스 노아비크는 언제나 내 예상을 빗나가던 남자였다.

    한번 시작된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게 그를 믿고 싶었으나 안전장치는 필요한 것 같았다.

    “…우리 좀 더 깊은 대화를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나는 천천히 그의 팔을 치우고 아직 얼얼한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붙잡히지 않았다. 그와의 열기와 기억이 가득한 침대에서 천천히 멀어졌다.

    “근데 목마르지 않아요?”

    내게 남은 시간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쓸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써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실내복을 추스른 뒤 발돋움까지 해서 시온에게 받은 찻잔 세트를 꺼냈다. 그리고 싱긋 웃으며 물었다.

    “차 한 잔 마시면서 더 얘기해 볼래요?”

    요하네스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고요하게 나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상한 몸짓으로 가운을 걸친 그가 태연한 표정으로 테이블 앞의 의자에 앉았다.

    나는 설렁줄을 당겨 하녀에게 찻물을 요청했다.

    “따뜻한 물을 부으면 사람을 즉사시킬 수 있는 독이 되고, 차가운 물을 부으면 몇 시간은 쓰러트릴 수 있는 수면제가 되지.”

    더운물과 찬물, 그리고 적당한 찻잎까지 준비해 달라고 구체적으로 말한 뒤, 암사자와 수사자가 새겨진 찻잔을 꺼내며 내가 자랑하듯 웃었다.

    “시온이 줬어요. 늦었지만 결혼 선물이래요. 귀엽지 않아요?”

    “그래?”

    요하네스는 찻잔을 흘끗 보고 나서 내게 다시 시선을 고정한 뒤 나른하게 웃었다.

    “그럼 독이라도 발라져 있는 것 아닌가? 그대 오라비가 내내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네? 시온이요? 그럴 리 없는데… 혹시 시온이 무례하게 굴었나요? 적당히 권위에 잘 굴복하는 사람이라 공작님께 거슬리는 짓은 하지 않을 텐데.”

    가슴이 철렁한 것과는 별개로, 시온은 언제나 요하네스에게 유들유들하게 굴었기 때문에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빈센트와는 달리 시온은 감정을 능숙하게 숨길 줄 아는 사람인데.

    내 의아하다는 표정에 요하네스가 짓궂게 웃었다.

    “아니, 그런 적은 없어. 그런 건 본능적으로 느끼는 거지.”

    정말 놀라운 본능이었다.

    “어쨌든 그런 적은 없다는 거네요.”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농담으로 넘겼다. 하녀가 찻물을 준비해 오는 그 잠시가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제가 왜 ‘시간의 돌’을 필요로 하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

    “저는 최선을 다해 당신을 도왔어요. 그런데도… 줄 수 없는 거예요?”

    “결론만 말하자면, 그래.”

    이제 이판사판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그를 위해 노력한 것을 하나하나 말하려고 할 때였다. 그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사냥 행사에서부터 어제까지 그대가 해 준 일을 생각하면… 그대의 노력에 답해 줄 수 없다는 게 나도 미안하지.”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사냥 행사에서 내가 해 준 일은 공식적으로 없었다.

    그렇다면 무언가 눈치를 채고 있었다는 건가. 그런데 지금껏 모른 척한 거고. 사냥 행사까지 눈치를 챘다면 다른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다른 건 안 될까, 엘로이즈.”

    요하네스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간절함이 묻어 있었으나 이미 큰 충격을 받은 내게는 그 감정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내가… 내가 줄 수 있는 것으로. 제발.”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요하네스는 계산이 명확한 사람이니 그에게 도움을 주면 내 부탁을 들어줄 거라는 믿음은 그저 허상일 뿐이었던 것이다. 요하네스는 지금 고민하는 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를 사랑한다면서… 안 돼요? 제가 그게 없으면….”

    나는 목소리에 울음이 섞이는 것을 애써 참으며 덧붙였다.

    “…그게 없으면, 제가 죽어도?”

    “그게 무슨 소리야.”

    요하네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의 눈에 순간적으로 광기가 돌았다.

    “네가 왜 죽어.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런 반응 필요 없어요. 제가 원하는 건 20년 전의 ‘시간의 돌’을 준다는 말이에요.”

    “…….”

    그의 침묵은 나를 미치게 답답하도록 만들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정말… 정말 못 주는 건가요? 진짜로 제가 죽는다고 해도? 저 그거 없으면, 정말 죽을지도 모르는데요.”

    “…엘로이즈.”

    숨이 막힐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요하네스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어. 내가 갖고 있다면 이미 네가 그런 눈으로 나를 보았을 때 정신 못 차리고 당장 갖다 바쳤겠지.”

    그는 작게 한숨을 쉬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미 다른 사람에게 줬어. 아주 오래전에.”

    “네?”

    놀라서 요하네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요하네스가 내 눈을 피하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이미 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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