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7/65)

문득 우리가 가까이 있다는 것이 순식간에 의식되었다. 그동안 이렇게 자주 붙어서 잠들었기 때문에 별 위화감 없이 안겨 있었는데, 그의 탁해진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나를 가득 담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불안한지 증명해 볼까.”

그가 자조적인 미소를 한 번 지어 보인 뒤 그대로 내 몸을 돌려 내 위로 감싸듯 올라탔다. 마주한 살갗이 지나치게 뜨거웠기 때문에 온몸에 순간 전율이 흘렀다.

“네 말대로, 노아비크의 주인이라는 놈이 얼마나 한심하게 굴고 있는지….”

순식간에 포개어진 몸 위로 달뜬 숨결이 흩어졌다. 마주친 눈이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어도 아득했다. 시야에 가득해진 그의 고상한 얼굴이 열기로 일그러져 있었다.

“…네가 직접 느껴 봐.”

달라붙는 숨결마다 몸이 들썩였다. 얇은 실내복이 쉽게 흘러내렸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쉽게 성공할 리가 없지, 안 그래?”

내가 힘들게 숨을 토해 내자 그가 사납게 웃으며 속삭였다.

“빌어먹을 대신전에 들어선 그 순간부터….”

시트 위로 발이 힘겹게 헛돌았다.

“…오늘 밤은 참지 않아도 되겠지, 그딴 생각이나 하고 있었는데.”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들끓는 감정을 담고 있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그에게도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신께서도 딱히 편을 들어 주고 싶지 않으셨을걸.”

“뭐라고요?”

나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황당해서 팩 쏘아붙이고 말았다. 요하네스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었다.

“어이가 없지? 나도 이런 내가 어색해.”

느긋하고 여유 있는 말투에도 불구하고 숨길 수 없는 거센 심장 박동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그의 심장도 나만큼이나 뛰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요하네스는 피식 웃으며 냉소적으로 덧붙였다.

“보통 망가진 게 아니야.”

“잠시, 잠시만….”

그가 천천히 내 눈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내 시선 밑에 위치한 그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했다.

말해 보라는 듯한 그의 표정을 보면서도 나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가 뜻하는 ‘참지 않아도 되는 밤’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당신, 내게 20년 전에 얻은 ‘시간의 돌’을 줄 수 있냐고.

그러나 그 대답의 내용에 따라 이 밤 역시 달라지게 된다.

우습게도 지금 이 순간 그를 갖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매달려 볼 수 있는 사랑의 확인 절차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결국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머저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거의 10개월을 참아 온 그 질문을 하지 못했다. 대신 반대로 물었다.

“…나한테 …혹시 묻고 싶은 건 없어요?”

묻고 싶은 게 없을 리가 없는데. 나는 대신전 안에서 누가 봐도 수상하게 행동했는데. 내가 초조하게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그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없어.”

그 말을 할 때 그는 다소 절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너는 그저 편안히 여기에 머물기만 하면 돼.”

대답과 동시에 이어지는 급한 손길 때문에 곧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달뜬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우리가 보낸 시간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다가 쾌감으로 자꾸 끊겼다.

아.

어쩌면 나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을 거야.

빈센트와 시온의 합리적인 걱정에 각종 핑계를 대며 끝의 끝까지 그의 곁에 남아 있고 싶어 했었던 때부터.

떨리는 발이 허공을 의미 없이 가르다가 툭, 떨어졌다. 겹치는 살결이 뜨거워서 숨이 찼다. 묻지 못하는 질문과 하지 못하는 대답을 삼킨 채 우리는 대신 말없이 한참 동안 서로를 삼켰다.

“…요하네스….”

밤이 깊어 가는 시각, 나는 그에게 매달리며 속삭이듯 애원했다.

“저, 정말 쓸모 있을 거예요. 진짜로요.”

나는 이번 실패에 무감할 수 없었다. 그동안은 내가 티 내지 않고 뒤에서 돕고 있었다면, 이번에는 요하네스가 대놓고 나와 함께해 준 첫 번째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번 실패로 인해서 결국 내가 쓸모없다고 생각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시간의 돌’을 주면서까지 옆에 둘 필요는 없다고 결론을 내리면 어쩌지.

‘에이스’가 나를 계속 놓아주지 않았던 것은 내가 언제나 그들에게 쓸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살아왔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든 요하네스에게 효용성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있었다.

그동안 그를 위해 많은 일을 해 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피 엔딩에 이르지는 못했다. 일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그 사실이 나를 더 불안하고 초조하게 했다.

“최선을 다할게요… 약속했잖아요… 잘하겠다고….”

“엘로이즈.”

이제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고, 그 얼마 안 되는 시간 안에 이 모든 일을 해결해 줄 방 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도 더 잘하겠다는 애원뿐이었다. 그래야 내 부탁을 들어줄 테니까.

“절대 배신 안 할게요. 절대로… 절대로 그런 일 없어요. 맹세해요.”

나는 요하네스에게 안기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한 번 ‘에이스’를 배신해 봤던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약속이었다.

이제 곧 그에게 아주 어려운 부탁을 해야 한다. 내게는 생사의 갈림길이고, 요하네스에게는 노아비크의 사명이 걸려 있는 그런 부탁. 냉정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나는 어느새 또 그에게 모든 감정을 실어 애원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성공할 때까지 꼭 제 효용을 증명할게요.”

심장이 따끔거리며 아파 왔다. 이 순간에도 내 목숨이 타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경고하듯이. 숨을 헐떡이며 정신없이 물었다.

“나를 사랑하는 것 맞죠? 사랑하니까 이러는 거죠? 사랑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날 위해 해 줄 거죠?”

“그래. 사랑해.”

어둠 속에서 그의 대답은 지체 없이 빨랐다.

“그러니까….”

그가 나를 끌어안으며 한숨을 삼켰다.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마.”

“무, 무슨….”

“쓸모라느니, 효용이라느니.”

“그게 왜….”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말이 멈출 때마다 숨이 흩어졌다. 비참하기까지 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내가 너무 한심해져.”

도대체 그 말이 왜 요하네스를 한심하게 만드는 걸까.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입술을 달싹이는 것조차도 힘들 정도로 그가 밀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 ⚜ ⚜

밤이 아득했다.

생이 얼마 안 남았으므로 분명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 정신을 잃었었는지, 눈을 떠 보니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 스물다섯 번째 생일까지 24시간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잠들 여유가 있었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지독하게 시달린 밤이었다. 대체 언제 정신을 놓아 버렸는지 모를 정도로.

“일어났어?”

내가 부스스 몸을 일으키는데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며 부드럽게 익숙한 체온이 몸을 감쌌다. 지척에 느껴지는 온기가 무의식중에 반가웠다. 온몸이 욱신거리는 와중에 그의 목소리가 더없이 다정했다.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일어날 수 있겠어?”

“그럼요. 괜찮아요.”

몸이 힘든 것과 일어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에이스’에서는 이것보다 훨씬 더 악조건에서도 이를 악물고 움직였었다. 내가 몸을 꿈틀거리는데 그가 나를 끌어안고 물었다.

“괜찮으면 키스해도 되나?”

“…말이 왜 또 그렇게 돼요.”

맑게 웃으며 그에게 매달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었다. 꿈결 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해도 내 심장의 마법진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후회하지는 않았다. 나 역시 그를 가지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심장의 통증이 이제 일어나자마자 선연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요하네스.”

이름을 한 번 불러 놓고 잠시 망설였다. 이상하게 무언가가 자꾸만 두려웠다. 입술만 달싹이고 있는 내게 그가 말해 보라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까. 최대한 내가 ‘푸른 루비’라는 건 숨기고 싶은데. 어떻게든 최소한의 정보만 노출해서, 엘로이즈 노아비크로 남은 인생을 살고 싶은데.

속임수에 기만이라고 해도… 그냥 나는 그러고 싶은데. 평생 들킬지 모르는 두려움에 덜덜 떨며 불안해하더라도 그런 삶을 살고 싶은데.

정체를 들키고 결국 쫓겨나는 것과, 평생 거짓말이라도 하면서 곁에 머무는 것 중에 고르라면 무조건 후자였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나는 모든 것을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무조건 유혹해 놔. 너를 사랑할 수 있게. 너와의 거래에 응해서 네 부탁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야 한단 말이야.”

나는 시온의 말을 마치 기도문처럼 머릿속에서 되뇌이며 신중하게 물었다.

“정말 나를 사랑해요?”

내 질문에 요하네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고는 나른하게 대답했다.

“미친놈처럼 사랑하지. 여러모로 정신 나간 거 안 보여? 간밤에 충분히 표현했다고 생각하는데.”

마치 당연한 걸 묻는다는 어조였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단숨에 말했다.

“그럼…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떠난다는 것 빼고 다 들어주지.”

그가 어렵지 않다는 듯 내 머리카락을 쓸며 속삭였다. 그 와중에도 내가 남부로 떠날까 봐 불안한 모양이었다.

정말, 정말 시온의 말대로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다 해 줄 수 있는 상태일까. 어젯밤을 떠올려 보면 당연히 그럴 것 같은데.

“20년 전에 당신이 최상급 악령을 처치하고 얻은 ‘시간의 돌’ 말이에요.”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요구했다.

“그거… 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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