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6/65)
  •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였다.

    “사실은 딱히 성공할 거라는 기대도 안 해. 내가 이런 종류의 일을 많이 해 봐서 아는데… 첫 번째 시도가 성공해서 모든 일이 간단히 잘될 가능성은 아주 적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모조품이라니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도 쉽게 모조품을 만들었는데 그들이라고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최상급 악령의 심장은 누구나 알고 있는 최고의 치료제, 만일을 대비하는 신중한 성격인 디에고가 미리 조치를 취한 것은 어떻게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 음….”

    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신음 소리만 내뱉었다. 베이든이 참담한 목소리로 시무룩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진짜는 다른 곳에 숨겨 두었거나 아니면 폐기했을 것 같은데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심지어 내게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아무리 노아비크 공작가라고 해도 신전을 갑자기 수색할 수도 없을뿐더러, 심지어 베이든의 말에 따르면 폐기했을 가능성도 아주 높았다.

    이깟 모조품을 위해 무리해서 내 모든 것을 보여 준 셈이었다. 사실 사격 같은 건 레오가 위험에 처할 때만 하려고 했었는데 그 계획조차 지키지 않고… 비참함에 심장이 뚝 떨어졌다.

    그러나 패닉에 빠져 있는 나와는 달리 요하네스는 평안해 보였다.

    “그렇군.”

    그의 대답은 담담하면서도 명료했다. 딱히 크게 놀랍지도 않다는 얼굴이었다. 내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태연하게 말했다.

    “가장 쉽고 간단한 첫 번째 전략에서 바로 성공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나.”

    “…그, 그렇다고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어요?”

    “글쎄, 좀 아쉽긴 하지만.”

    요하네스는 심지어 살짝 웃기까지 했다.

    “난 실패에 익숙해, 엘로이즈. 실패할 때마다 충격을 받았다면 그 오랜 시간 동안 ‘푸른 루비’를 쫓지는 못했겠지.”

    그의 오래된 실패는 결국 나의 일관된 성공을 말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이 일에 대한 엇갈린 반응을 단번에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만큼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니까. 잠시 손을 잡았던 요즘이 아주 특별한 시기였고.

    그의 논리에 따르자면, 나는 그동안 실패한 적이 없었기에 이렇게 좌절스러운 셈이었다. 하지만 내 첫 실패가 하필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 이루어지다니.

    “그럼 어쨌든 황제를 살리려던 이번 계획은 여기서 접기로 하고.”

    요하네스는 마치 저녁 메뉴를 바꾸는 것처럼 느긋하게 선언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군.”

    놀랍게도 페이건과 세예나, 베이든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요하네스처럼 실패에 아주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막다른 길이 나타나면 더 이상 감정 소모하지 않고 다른 길을 찾는 게 당연한 사람들처럼.

    하지만 나는 그들과 입장이 달랐다. 내게 남은 시간은 이틀. 내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 지나면 얼마나 살 수 있을지 전혀 모르는 입장이었다.

    회귀 전에도 자정 넘어서는 살아 있었으니, 자정 이후 한 시간 정도까지는 살아 있으려나. 그러나 그 이후는 언제 숨이 끊어질지 장담하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그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로 중얼거렸다.

    “그, 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요하네스가 다정히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실패했지. 실패한 일에 매달려 있는 건 시간 낭비밖에 안 돼.”

    지극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온갖 복잡한 갈등을 무시하고 무리수까지 두며 총질까지 한 나로서는 그래도 이상하게 서운한 말이었다.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마님.”

    페이건이 씩 웃으며 거들었다.

    “공작님은 ‘푸른 루비’를 추적하는 일 외에는 딱히 크게 동요하지 않으십니다.”

    동요하지 않는다는 말은 요하네스를 표현하는 데에 꽤 훌륭한 표현이었다. 그는 항상 모든 일에 한 발짝 물러선 것처럼 보였으니까.

    일을 추진하는 당사자면서 언제나 관조자처럼, 거대한 벽을 두고 소통하지 않는 사람처럼.

    요하네스는 그의 최측근들에게도 속을 다 내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가끔 가다 마주치는 그의 낯선 모습들을 보며 놀라는 것조차 사치였다.

    그를 파악한다는 것 자체가 오만이었고, 그는 지금까지 항상 내 예상을 빗겨 갔으니까.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조금 서운한 건, 그동안 그가 내게만큼은 날것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치솟는 욕망을 숨기지 않고, 넘치는 다정함을 감추지 않고.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페이건이 달래듯 덧붙였다.

    “아직 황태자 전하께서 악령을 완전히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시간은 좀 있는 편이니까요.”

    그들에게는 충분히 있는 시간이라고 할지라도 내게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방법을 의논하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제대로 집중할 수 없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저는… 저는 오늘은 좀 쉴게요.”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세예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많이 피곤하세요? 오늘 많이 무리하셨나 봐요. 어디 아프신 데는 없고요?”

    요하네스의 얼굴에도 걱정이 스쳤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은 뒤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아, 아니야. 어디 아픈 건 아닌데, 긴장이 좀 풀리고 피곤하기도 해서 그냥 쉬고 싶은 거야.”

    그리고 요하네스를 보며 겨우 발랄하게 덧붙였다.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나중에 결과만 알려 주세요.”

    이미 하루를 마무리하는 늦은 시간이었으므로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한 번 더 웃어 보이고 나서 집무실을 나서자마자 다리가 살짝 휘청였다.

    방에 돌아오는 동안 억지로 생각을 갈무리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이 일이 실패했어도 내가 요하네스에게 도움이 된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오히려 다음 일을 도모해야 하니까 나를 더 필요로 할 수도 있었다. 나는 곧 죽을 운명이라고, 그러니 ‘시간의 돌’만 준다면 계속해서 당신의 편이 되겠다고.

    ‘…믿을까? 믿겠지?’

    설마 ‘시간의 돌’만 받고 도망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까지 생각을 이어 가면 자꾸 부정적인 생각만 들었다.

    방에 돌아와 침대에 엎어졌다. 침대에 엎어지자마자 그와의 기억들이 몰려들었다. 그동안 밤마다 찾아와 내가 잠들 때까지 곁에 있어 주던 그의 다정한 모습들이 어쩔 수 없이 머릿속에 떠다녔다.

    냉정한 얼굴로 대신관을 속이던 요하네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실패를 넘겨 버리던 요하네스, 그렇게 모든 것에 벽을 두고 한 발짝 떨어져 있던 요하네스. 오로지 유일한 예외는 ‘푸른 루비’를 잡겠다는 비이성적인 집착뿐.

    “사랑하는 상대에게는 뭐든 주고 싶은 게 당연한 거야.”

    하지만 일이 잘 안 되더라도, 그가 나를 정말로 사랑하면 어떻게든 나를 살려 주지 않을까. 사랑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시온이 장담한 사실이었으니 아마 맞을 것이다.

    어쨌든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제 그가 측근들과 모든 의논을 마치고 돌아오면 이제 어떻게든 말을 꺼내 봐야 했다.

    솔직히 두려웠다. 대신전에서 나는 요하네스가 의심할 만한 일을 너무 많이 했고, 그것들에 대해 세세하게 질문한다면 어디까지 그럴듯한 거짓말을 할 수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미루고 싶다고 해도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무력하게 침대에 얼굴을 묻고 요하네스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 ⚜ ⚜

    어느새 까무룩 잠이 든 모양이었다. 방에 어둠이 새카맣게 내려앉아 있었다.

    눈을 살짝 뜨자마자 고요한 금빛 눈과 마주쳤다. 요하네스가 평소와 같은 밤처럼 내 곁에 누워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자고 있는 모습을 보인 게 한두 번이 아닌데 문득 민망했다. 내가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하며 횡설수설 말을 꺼냈다.

    “와, 왔으면 말을 하지…. 이러고 오래 있었어요?”

    “아니.”

    일어나려던 내 몸이 요하네스의 단단한 팔에 막혀 그대로 침대에 눕혀졌다. 그의 단단한 몸이 느릿하게 나를 가두듯 붙어왔다.

    “얼마 안 됐어.”

    그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잠겨 있었다. 가만히 내 이마에 입술을 누른 그가 평소와도 같은 다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많이 서운해? 실패해서?”

    아까 내가 눈에 띄게 실망하는 걸 놓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미 다 끝난 주제인 줄 알았는데 다시 한번 세심하게 짚어 주니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너무 마음 쓰지 마. 방법이 그것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왜요, 정말 황궁에 쳐들어가기라도 하려고요?”

    “그것도 방법이지.”

    요하네스가 낮게 웃었다. 반란이 그렇게 쉬운 일인가 싶어 나는 옅은 한숨을 쉬고 그를 노려보았고, 그가 달래듯 내 볼을 쓰다듬었다.

    “엘로이즈, 그대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이번 계획에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나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내 사정은 내 사정이라고 쳐도 요하네스 입장에서는 북부가 악령의 소굴이 될 수도 있는 일인데 어쩜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나 싶었기 때문이다.

    “디에고가 꾸미고 있는 일의 실체를 알면서 어떻게 그렇게 태연해요? 그래서 노아비크의 영주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러게.”

    그가 피식 웃으며 내 눈꺼풀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근데 노아비크의 긍지 따위는 이미 갖다 버려서.”

    “아니, 진짜 불안하지도 않아요?”

    “…더 불안한 게 있어서 그런가 봐.”

    내 등 뒤를 감싸기 시작한 느릿한 체온을 느끼며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대충 장난하지 말고요. 건성으로 대답할 일이 따로 있지….”

    그가 성의 없게 대답하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그가 느긋하게 말을 내뱉을 때마다 나름의 여유로운 매력이 느껴졌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중요한 대화를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그의 무성의한 대화 태도에 화가 났다.

    “…글쎄.”

    내 투덜거림에 요하네스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에 간신히 걸려 있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손에 감은 채 조용히 물었다.

    “난 장난한 적 없는데. 너무 참아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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