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4/65)
  •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요하네스마저도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오만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끼어들었다.

    “우와! 엘로이즈 님, 그럼 ‘푸른 루비’를 직접 본 적이 있는 거예요?”

    내가 대답하려는데 대신관이 먼저 심각한 얼굴로 질문했다.

    “부인께서는 어떻게 그런 것을 아십니까? 여기 노아비크 공작님께서도 오래도록 추적에 실패하셨는데.”

    “오빠에게 들었어요.”

    일단 개연성 없는 일에 핑계를 대는 데에는 시온 르노아로만한 인간이 없었다.

    “시온 르노아로라고, 남부에서 좀… 외모와 끼로 유명한데, 어쨌든 ‘푸른 루비’와 가벼운 모임에서 만났었대요. ‘푸른 루비’도 여자니까 시온에게 끌렸을 수밖에 없겠죠.”

    “흠.”

    대신관은 눈을 굴리며 수염을 쓸었다.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아니면 내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가늠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남부라면 범죄자가 숨어 살기에는 좋은 선택이기는 하겠군요. 남부에 갔다는 것 자체가 악령 사냥을 관두었다는 얘기니 추적당할 일도 없고, 거기야말로 돈만 있으면 신분을 세탁하기에 딱 좋은 곳이니.”

    우리도 딱 그 생각으로 남부에 터전을 잡은 것이기도 했다. 역시 사실만큼 그럴듯한 대답은 없었다. 미소를 지은 채로 대신관의 다음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데 놀랍게도 저 멀리서 요하네스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그 ‘푸른 루비’와 그 측근들은 남부에서만 지낸다고 하던가?”

    나는 살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금빛 눈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알고 있을 텐데 마치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가 재차 물었다.

    “어디 잠깐 다녀오더라도… 결국 남부로 돌아가 머물 거라고?”

    “…그것까지는… 제가 그것까지 어떻게 알겠어요.”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지만 그럭저럭 대충 잘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굴리다가 덧붙였다.

    “지내다가 남부가 불편하면 더 편한 곳에 자리 잡을 수도 있겠죠.”

    “그래.”

    요하네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장 중요하지.”

    더 이상 대답할 말이 없어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대신관이 옅은 한숨을 쉬며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그냥… 헛소문일 수도 있는 이야기군요. 누가 자신을 ‘푸른 루비’라고 주장하며 헛소리를 한 것일 수도 있고요.”

    “그렇게 여기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챙겨온 것이 있지요.”

    나는 가방에서 챙겨온 장난감 총을 꺼냈다. 대신관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재빨리 달칵거리는 조악한 총구를 톡톡 치며 말했다.

    “이건 장난감이에요. 그래서 문지기도 통과시켜 줬어요.”

    “…이걸 왜….”

    “대신관님께 보여 드리고 싶어서요. 글쎄, 세상에… ‘푸른 루비’가 사용하는 무기는 총이래요! 짐작하셨나요?”

    내 말에 가장 크게 반응한 사람은 레오였다. 레오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를 내며 눈을 크게 떴다.

    “진짜요? ‘푸른 루비’가 총을 쏜대요? 근데 총은 되게… 되게 불편한 무기라고 들었는데.”

    “근데 ‘푸른 루비’는 잘 쏜대.”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다.

    너무 멀리 가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 요하네스 앞에서 너무 많은 사실을 얘기한 건 아닐까, 지나치게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나중에 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요하네스가 날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으면 어쩌지, 지금 막 충동적으로 생각해 낸 일인데 어딘가 빈틈이 있지는 않을까.

    “와, 공작님만큼 잘 쏠까요?”

    그러나 내 옆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레오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내 스물다섯 번째 생일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니까 더 몸을 사릴 이유도 없었다. 지금 어떻게 보면 디에고의 손에 악령이 들어가느냐 안 들어가느냐의 문제이기도 했다.

    내가 어떻게 되더라도 레오만은 안전한 세상에서 살아야 했다. 그리고… 그리고 지금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요하네스도.

    악령을 지배하는 디에고의 손에서 세상을 구하느니 마느니 하는 대단한 사명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요하네스에게 쓸모를 증명해서 어떻게든 심리적 빚을 지우고 싶었고… 또 내 앞의 두 남자가 끝까지 안전했으면 했다.

    ‘레오만 살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회귀할 수 있게 해 준 요하네스 노아비크에게 빚은 다 갚는 거겠지.’

    요하네스가 최상급 악령에게서 나를 구해 주지만 않았더라도, 나는 회귀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거머리처럼 자꾸 달라붙는 삶에 대한 욕심도, 요하네스에게 끝까지 좋은 사람이고 싶다는 소망도 조금 가벼워졌다.

    “…무기가 총이라….”

    대신관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가 도발하듯 물었다.

    “대신관님은 신관들 중에서도 가장 큰 성력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총으로 성력을 쏜다면 ‘푸른 루비’만큼의 악령 사냥꾼이 되실 수 있지 않으실까요?”

    “허허.”

    내 말에 대신관은 살짝 기분 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신은 악령 사냥을 다니는 다른 신관들과는 급이 다르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사실 고위 신관들이 악령 사냥을 자주 나가는 것에 비해 대신관은 절대 신전 안을 벗어나지 않았다.

    “저만큼 성력을 많이 갖고 있으면 악령 사냥 같은 것보다는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답니다. 예를 들어 이계와 악령에 대해 연구를 하거나, 뭐 그런 일들 말입니다.”

    “성력이 연구에도 필요한가 봐요?”

    “당연합니다. 사실 각종 연구와 실험에 가장 필요한 힘이 성력이니까요.”

    대신관은 내 어리둥절한 얼굴을 보면서 차분하게 설명했다.

    “단테 노아비크로 인해 이계의 문이 열린 후로 이 세상에는 세 가지 힘이 존재하게 됩니다. 악령과 가장 가까워 ‘시간의 돌’을 추적하고 이계의 문을 열 수 있는 노아비크, 그리고 제국을 수호할 봉인의 힘을 가진 벨리아나스, 마지막으로 악령과 이계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성력이지요.”

    “성력이… 이계에도 타격을 줄 수 있나요?”

    “연구 중입니다. 뭐, 단테 노아비크 님의 서적을 보면 결국 이계의 문을 닫기 위해서는 노아비크와 벨리아나스의 이능 그리고 성력 이렇게 세 가지 힘이 모두 필요한 것 같다고 쓰여 있습니다.”

    구구절절 설명하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대신관 정도의 위치씩이나 되어서 악령 따위를 사냥할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난 뒤 장난감 총을 들어 보였다.

    “뭐, 어쨌든 ‘푸른 루비’의 무기는 총이라고 했어요. 요하네스가 대신관님께도 직접 보여 드리라고 했는데 한번 보실래요?”

    “…제가 총은 처음 봐서….”

    “그래서 갖고 온 거예요. ‘푸른 루비’가 오빠한테 설명한 바에 따르면 성력을 여기에 투입해서… 음, 저는 성력이 없어서 설명하기가 힘드네요… 어쨌든 여기 총알이 들어가는 곳에….”

    제대로 된 자세를 잡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 넓은 과녁을 대충 맞추는 건 일도 아니었다. 총부리가 유리 케이스에 가게 방향을 잘 맞춘 나는 재빠르게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고 조악한 총소리와 함께 그대로 유리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졌다. 유리 케이스 옆에 있던 요하네스가 빠르게 망토로 제 몸을 감싸 산산조각 난 유리 조각을 피했다.

    “으아아악!”

    유리 조각을 정면으로 맞을 뻔한 사람은 요하네스인데 깜짝 놀란 대신관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두 사제가 놀라서 뛰어 들어와 대신관을 부축하고 내게 장난감 총을 빼앗아 들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니… 이거 장난감인데….”

    나는 놀란 눈으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제가 실수로 방아쇠를 누르긴 했지만, 이거 정말 장난감이에요. 못 믿으시겠으면 제 손에 한 번 쏴 보셔도 돼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애초에 공격용으로 가져온 것이었다.

    이렇게 유리를 깨기 위한 용도로 가져온 건 당연히 아니었고, 원래는 레오를 지키기 위해서 챙겨 왔다. 내가 디에고라면 비무장 상태의 우리 셋을 가만둘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가 레오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고, 대신전도 한 패인 것이 분명한 이상 레오의 신변을 보장할 수 없었다.

    우리가 건국제 기간이 끝나면 곧 북부로 올라갈 것은 명백하므로 디에고는 그 전에 레오를 죽이려고 할 것이라 예측했다. 건국제는 곧 끝나니 조급한 디에고가 대신전 안에서 레오를 대상으로 암살을 시도할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그래서 무기를 챙겼던 것이었다.

    처음부터 과녁 겨냥용 장난감 총이었기에 작은 총알이 열 개 정도 들어갈 수 있었는데, 나는 빈센트에게 크기는 같지만 이것보다는 파괴력이 조금 더 있는 총알을 제작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리고 혹시 몰라서 번갈아 가며 장전해두었다. 장난감 총알, 개조 총알, 장난감 총알, 개조 총알 이런 식으로. 처음에 문지기에게 보여 줄 때 장난감 총알을 사용했고, 개조 총알로 유리를 깨트렸다. 그러니 지금은 장난감 총알이 나갈 차례였다.

    과연 사제가 나를 직접 쏘지는 못하고 다른 유리를 쏴 보았는데 틱, 하고 튕겨 나가기만 하지 깨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요하네스가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이쪽 유리가 좀 약해져 있었나 보군. 작은 충격에도 깨진 것을 보면 말이야.”

    그는 이미 작은 유리 조각이 박혀 있는 망토를 벗어 바닥에 둔 채였다.

    “엘로이즈, 총을 잘 못 다루면 조심했어야지. 여기서는 천방지축으로 굴면 안 돼. 내 눈에서는 사랑스러울지라도 남들은 황당할 수 있으니.”

    나는 그의 태연한 표정을 보고 내가 세 사람의 시선을 돌려놓은 사이 바꿔치기가 성공했음을 눈치챘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된 건가? 그럼 다 계획대로 끝난 건가?

    여러모로 요하네스가 수상하게 여길 만한 순간들이 많았지만, 지금 유리가 깨진 것 자체에 대한 변명도 아직 생각해 내지 못했지만 어쨌든 초기의 목적은 이뤄 냈다.

    “사실은 딱히 성공할 거라는 기대도 안 해. 내가 이런 종류의 일을 많이 해 봐서 아는데… 첫 번째 시도가 성공해서 모든 일이 간단히 잘될 가능성은 아주 적어.”

    문득 대신전에 오기 전, 요하네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으나 나는 억지로 불안감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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