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3/65)

내 말에 대신관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부인. 부인께서는 어차피 저 방에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네?”

아니, 손님이 들어갈 수 없다는 것도 아니고 꼭 집어서 나? 내가 반쯤은 반항적인 어조로 반문하자 대신관이 오해하지 말라는 듯 빠르게 설명했다.

“저 방에는 부조에 새겨져 있다시피, 벨리아나스와 노아비크 그리고 성력을 가진 자들 외에는 출입하지 못합니다. 부인께서는 직계 노아비크도 아니고 성력도 갖지 않으셨으니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아… 그러면 어쩔 수 없지요.”

대신관의 대답에 나는 곧바로 어쩔 수 없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절대 저 공간에 들어가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성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저곳에 들어가는 순간 정체를 들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별것도 없습니다. 그저 아무나 출입할 수 없다보니 보안을 유지하는 데에 좋아서 그동안의 연구 결과만 보관해 놓고 있지요. 그래서 ‘보관의 방’이라고 불린답니다.”

“연구 결과라면… 다시 이계의 문을 닫고 악령의 출입을 막으려는 연구 말씀하시는 거죠?”

“예. 신전의 오랜 숙원이지요.”

감탄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속으로는 욕이 다 나왔다. 대신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친절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 아니지… 사실은 제국 전체의 숙원이라고 해야 말이 맞겠군요. 벨리아나스와 노아비크, 신전이 함께 힘을 모아 어려움의 시대를 극복하는 것이 모두가 원하는 결말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거짓말을 하는 중이긴 하지만, 신관이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다니. 악령의 출입을 막기는커녕 그들이 악령을 지배하기 위해 여러 실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이 대화 내용이 가증스럽게만 느껴졌다.

“우와, 너무 멋있어요.”

물론 나도 가증스러운 대화를 이어 가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다.

“지금이 정말 어려움의 시대이긴 하지요. 여러모로요.”

그 이후 꽤 복잡한 길로 안쪽까지 들어간 이후에야 꽤 넓은 방이 하나 나왔다. 방을 확인한 나와 요하네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아, 이게… 이게 아닌데.

우리의 표정을 확인하지 못한 대신관이 뿌듯하게 웃으며 말했다.

“값진 기증품들은 여기에 모두 잘 있지요.”

“아, 그렇군요.”

대신관의 말에 자연스럽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레오뿐이었다. 물론 레오의 대답에 대신관이 손뼉을 한 번 쳐 보이며 자랑스러운 표정까지 지어보였다.

“기부해 주신 물건들을 이렇게 신전 깊숙한 곳에 잘 보관하고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나와 요하네스가 낭패라는 표정을 순간적으로 지어 보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물건들이 유리로 만든 커다란 케이스 안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모든 걸 잘하는 요하네스라고 해도 틈 하나 없는 유리 케이스를 통과해서 물건을 바꿔치기할 수는 없었다.

당연히 창고 같은 곳에서 꺼내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체계적으로 보관하고 있었다. 요하네스는 태연하게 기증품들을 둘러보는 척하며 말문을 열었다.

“벌써 20년이 다 되었군요. 최상급 악령의 심장은 오래 묵힐수록 그 효능이 뛰어나다지요.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아, 이쪽에 있습니다.”

대신관은 입구 쪽의 전시 유리를 가리키며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한 번 확인해 보시고 이제 응접실로 이동하지요.”

나는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이번 기회를 놓치고 그냥 응접실로 이동한다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아무리 요하네스가 대단한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무기도 없이 여기서 유리 케이스 안쪽에 있는 심장을 다짜고짜 훔쳐서 나와 레오까지 챙겨 달아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어느새 건장한 사제들이 두 명 따라와서 방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

흘끗 본 요하네스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어차피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을 예상했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무엇을 각오하고 있는지 뻔히 알고 있었다.

“그럼 황궁에 잠입해서 황제 폐하와 디에고를 죽여야겠지.”

아주 단순하고 즉각적인 해결책이었으나 결국 반란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디에고가 장악한 황실은 전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태연하게 말했으나 결국 이쪽에서도 사활을 걸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까지 일이 진행된다면, 나는 정말로 그에게 쓸모가 없어질지도 모르는데. 내가 먼저 실탄으로 디에고를 암살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면 내가 ‘푸른 루비’인 것을 밝혀야 하는데?

황족까지 살해할 마음을 품은 사람이니까 ‘푸른 루비’의 손을 잡는 것도 괜찮을까? 그러나 그는 오래도록 ‘푸른 루비’를 추적해 왔는데 과연…. 실패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실패에 대한 면역이 없었다. 목표한 바가 있다면 언제나 성공해 왔기 때문이다. ‘에이스’를 무너뜨렸고 시간을 돌렸으며 레오를 살렸고 연회에서도 요하네스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간단히 실패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내가 눈을 굴리고 있는 동안, 요하네스는 대신관이 안내한 곳으로 가서 까맣게 숙성된 심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좀… 처음에 기증했던 것보다 작아진 것 같은데.”

“설마요.”

대신관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여덟 살의 기억이니 실제보다 더 크게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지요.”

“꺼내어 볼 수는 없습니까?”

“예. 유리로 단단히 봉합되어 있고 열쇠는 저 멀리 있어서요.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눈으로만 감상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미 소유권은 신전에 넘어갔으니 기증자에게 딱히 호의를 베풀지는 않겠다는 어조였다. 이제는 더 이상 나눌 대화가 없어 보였다.

나는 대화가 끊긴 두 사람의 등을 보며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요하네스는 이미 이번 계획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시간이 없어.’

당장 내 스물다섯 번째 생일은 눈앞에 다가와 있었고, 심장 통증은 느껴지지 않을 때보다 느껴질 때가 더 많았다. 그러므로 나는 그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요하네스와 입장이 달랐다. 이런 상황은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아앗….”

판단은 빠르게 섰다. 나는 발목을 부여잡은 채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유리 너머로 자신이 20년 전에 신전에 넘겼던 심장을 바라보고 있던 요하네스가 놀라서 뒤를 돌고 난 뒤 순식간에 내게 다가왔다.

“…발목이… 발목이 시큰거려서요.”

나는 왼쪽 발목을 잡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만… 잠시만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 더 걷는 건 좀 무리일 것 같은데….”

사실 내가 예전에 다친 발목은 오른쪽이었다. 곧바로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요하네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자신이 이곳의 주인인 것처럼 말했다.

“그래, 엘로이즈. 조금 쉬었다 가지. 여기서 더 걸을 수는 없으니까.”

그러면서도 무슨 속셈인가 싶은지 살짝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내가 징징거리며 발목을 문지르자 대신관이 정말 진상을 본다는 눈빛으로 다가와서 한숨을 쉬었다.

“어디… 의원을 불러 드릴까요?”

“아녜요. 조금 쉬다 보면 나아질 거예요. 의자만 하나 갖다 주세요….”

입구를 지키고 서 있던 사제가 빠르게 어디선가 의자를 하나 갖다 주었다. 나는 발목을 매만지며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은 뒤 대신관을 보며 말을 꺼냈다.

“그럼 굳이 응접실에 갈 필요도 없이… 여기서 ‘푸른 루비’에 대해서 말씀드려도 될까요?”

요하네스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가 눈치가 빨라서 다행이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원래 계획에 따른다는 표정이었다.

“말씀드려, 엘로이즈. 어차피 나는 다 아는 이야기이니.”

그는 별로 흥미가 없다는 얼굴로 다시 최상급 악령의 심장이 있는 곳에 다가갔다. 유리 너머로 다시 한번 심장을 바라보고 있는 그를 확인한 뒤, 나는 대신관에게 시선을 돌려 말했다.

“저는 남부에서 ‘푸른 루비’를 만난 적이 있어요.”

“…예?”

과연 대신관은 바로 반응했다. 내가 워낙에 자신만만하게 말해서 그런지 입구에 있는 두 사제의 시선 역시 내게로 쏠렸다.

“‘푸른 루비’가 남부에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이미 대신관이 디에고 황태자와 결탁한 이상, ‘푸른 루비’에 대해서 아예 모르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푸른 루비’가 ‘에이스’의 노예라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다만 신전의 권위를 떨어트릴 수는 없으니 요하네스 노아비크를 내세워 집요하게 추적하는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 줄 의도였다면.

그래서 그동안 요하네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대신관의 시선을 잡기 위해서는 결국 어느 정도는 사실을 이야기해야만 했다. 내가 꾸며 낼 수 있는 것은 ‘에이스’가 폭파된 이후뿐이었다.

사실 10개월 전까지만 해도 ‘푸른 루비’가 ‘에이스’ 소속이었으니 신전에서는 굳이 적극적으로 쫓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요하네스 노아비크가 추적하는 것만 놔두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또 이야기가 달랐다. 이제는 정말로 통제를 벗어난 ‘푸른 루비’가 얼마나 신전을 농락할지는 모르는 일이니. 그러므로 대신관의 표정이 심각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푸른 루비’는 젊은 여자예요.”

‘에이스’가 디에고에게 어느 정도의 정보를 주었는지 모르는 이상, 최대한 진실에 근접한 이야기를 해야 했다. 나는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으로 말을 이었다.

“그 여자는 동료와 함께 ‘에이스’를 직접 폭발시키고, 악령을 잡아 재산을 모은 뒤 바로 남부로 떠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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