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2/65)
  • “공작님도 참….”

    내가 부끄러운 듯 웃으면서 그의 손을 살짝 치웠다. 대신관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상상도 하지 못한 모습을 보았다는 듯 그의 표정이 아주 미묘했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신관에게 말을 이었다.

    “사실은 제가 ‘푸른 루비’에 대해서 제보하기 위해 요하네스를 찾아갔었는데요… 공작님이 제 말은 제대로 안 들으시고 냅다 결혼식 일정부터 잡으시더라고요. 그래서 빠르게 결혼했어요.”

    “아하하… 그러셨군요.”

    대신관이 표정 관리를 하고 있는 동안, 나는 어깨를 펴 보이며 자랑스럽게 대꾸했다.

    “그리고 제가 ‘푸른 루비’에 대해 드린 정보도 아주 정확했어요. 그래서 지금 거의 10개월 가까이 나타나고 있지 않잖아요. 전 다 이 사태를 예상하고 있었거든요.”

    “…흠, 공작님….”

    그제야 대신관이 조금 진지한 얼굴로 반응하며 난감한 듯 요하네스를 바라보았다.

    “그런 정보가 있었다면 왜 저희에게 알려 주시지 않으셨는지요. 사실 너무 독자적으로 행동하시는 것 같아 여러모로 신관들 사이에서도 말이 나오고 있었는데 계속 이런 식으로 행동하시면 저희도 곤란합니다.”

    요하네스를 당연히 신전의 아래로 보는, 다소 책망까지 담긴 말이었다. 솔직히 북부에서 견습 사제들만 파견하는 것도 모자라 개 한 마리를 신수라고 보내 놓은 대신전에서 할 말인가 싶었다. 내가 속으로 혀를 차고 있는데 요하네스가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가 이미 아내에게 빠져서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는데 뭘 보고합니까. 우리 귀여운 부인께서 지금 앞에서 기어 보라고 해도 당장 무릎 꿇고 발을 핥을 정도로 제정신이 아닌데.”

    지나치게 적나라한 대답이었다. 이미 시나리오를 다 짜 둔 나마저도 볼을 붉히며 레오의 귀를 막았다. 요하네스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이미 이 사람에 대해서 객관적인 판단이 불가능합니다.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다 제치고 북부로 달려가 못 참고 꼭 붙어 있었던 걸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나는 아무런 위화감 없이 느긋하게 거짓말을 하는 요하네스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역시 요하네스는 간교한 계략을 꾸미지 못해서 안 하는 게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저렇게 자기 자신을 낮추면서까지 판을 짤 수 있는 남자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한 기분이었다.

    요하네스가 느긋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어색한 분위기에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 신전에 보고할 수가 있어야지요. 이 사람이 가진 정보에 대해서는 대신관님이 직접 판단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대신관의 눈이 천천히 나를 향했다. 나는 침착하게 웃으면서 레오의 손을 꼭 잡았다. 어쨌든 우리의 계획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안 그래도 요하네스가 제게 대신관님께 직접 보고하라고 했었어요. 그런데 여기서 말씀드려도 되는 건가요?”

    나는 일부러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대신전의 한가운데에 있는 제단이었고 사제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다닐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다.

    “이야기가 좀 긴데요. 그리고 제가 다리가 좀 좋지 않아서….”

    “이런, 또 아파?”

    곧바로 요하네스가 내 허리를 감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안 그래도 발목 부상이 있었는데 오래 서 있으면 당연히 힘들지.”

    지금 여기 계속 세워 둘 것이냐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엘로이즈 님, 많이 아프세요?”

    영문을 모르는 레오까지도 내가 발목을 다친 건 기억하고 있었기에 걱정된다는 눈빛으로 나를 올망올망 바라보았다.

    “아.”

    대신관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시지요. 다행히 노아비크 공작가가 마지막으로 방문하는 귀족가이니 말입니다. 그다음 일정은 황태자 전하의 방문인데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으니, 지금 응접실로 안내하겠습니다.”

    “흠.”

    요하네스가 나를 과하게 부축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차피 신전에 들어가는 김에, 기부 전시관에 들르고 싶습니다.”

    “예? 기부 전시관에요? 그곳은….”

    기부 전시관이라는 말에 대신관은 미간을 찌푸리며 난감한 기색을 표했지만 요하네스는 곧바로 그의 말을 끊으며 유려하게 대꾸했다.

    “황족만 출입 가능한 곳이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엘로이즈가 몹시 가고 싶어 해서.”

    “…아니,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이면 애초에….”

    “본인도 기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더군요.”

    “기부요?”

    “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면서 사근사근 말을 이었다.

    “수도로 올라오면서 요하네스가 최상급 악령을 잡았거든요. 그리고 그 심장을 제게 결혼 선물로 주었는데… 20년 전에 요하네스가 대신전에 기부했다고 해서, 저도 그럼 기부할까 생각 중이거든요.”

    대신관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최상급 악령의 심장이라면 극도로 희귀한 물건이었으니 욕심이 나는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요하네스와 나의 추론에 따르면 그는 지금 디에고와 손을 잡고 악령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혹시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여 악령과 관련된 치료제로 손꼽히는 최상급 악령의 심장을 보유하고 싶을 게 뻔했다.

    “하지만 적어도 남부에서는… 제가 기부한 물건이 어떻게 보관되고 있는지 모르는 채로 무작정 기부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여겨요. 그렇지 않나요?”

    나는 최대한 엉뚱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얼마나 소중히 보관되는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뭐, 알겠습니다.”

    대신관은 다소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온의 말대로, 수도 사람들은 ‘남부의 전통’이라고 하면 떨떠름한 얼굴을 하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부드럽게 넘어가 주었다.

    “함께 가시죠.”

    그렇게 우리 셋은 조용히 대신관의 뒤를 따라 신전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요하네스와 일부러 시선을 교환하지는 않았지만 일이 어쨌든 지금까지는 잘 풀리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기증한 것이라고 해도, 대신전에서는 절대로 보여 주지 않을 거야. 그쪽에서는 아쉬울 게 없거든. 그러니 어떻게든 혹할 만한 패를 내밀어야 해.”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최상급 악령의 심장은 꽤 좋은 미끼였다. 신전에서도 최상급 악령이 퇴치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도 기증관에 가 본 적은 없어. 하지만 거기서 무조건 바꿔치기를 해야겠지. 그동안 눈을 돌리는 것만 부탁해.”

    대신관을 따라 미로처럼 복잡한 신전 안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다시 한번 예전에 의논했던 작전을 상기했다.

    “아마 ‘푸른 루비’에 대해 설명하면 어떤 개소리라고 해도 들어 줄 테니.”

    그리고 그 ‘개소리’에 대해 아무거나 지껄이는 것은 전적으로 내 몫이었다.

    사실 신전에 오기 전, 페이건이 그럴듯한 대본을 써 준다고 했으나 정중하게 사양했다. 남들이 지정해 주면 오히려 더 말이 꼬일 것 같다며 나 스스로 혼자 하겠다고 공언했다. 어차피 ‘푸른 루비’는 나라서 괜히 남의 거짓말하고 섞이면 더 헷갈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만일… 만일 대신관이 미심쩍어하면 ‘진짜 정보’를 풀어서 시간을 끌어 볼 생각도 있었다. 어쨌든 이판사판이었으니까.

    다행히 대신관은 그다지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길을 안내했다.

    신전의 안쪽까지 들어가자 분위기가 또 완전히 바뀌었다. 외진 길로 들어서면 들어설수록 돌아다니는 사제들도 극히 드물어졌다. 레오와 손을 꼭 잡고 요하네스와 대신전의 뒤를 따라 걸어가는데, 레오가 눈을 크게 뜨고 어느 한 방향을 통해 손가락질을 했다.

    “저기 봐요, 엘로이즈 님!”

    레오가 가리킨 방향을 보니 이상한 아치형 모양의 입구가 보였다.

    “노아비크의 상징이에요…. 왜 저기 있을까요?”

    “그러게?”

    특이한 건 그 입구에 부조로 세 가지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신과 신전을 상징하는 태양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벨리아나스 황가를 상징하는 붉은 꽃이, 왼쪽에는 노아비크를 상징하는 붉은 월계수가 있었다.

    우리의 대화를 들었는지 대신관이 뒤를 돌아서며 인자하게 말했다.

    “저곳은… 단테 노아비크의 실험실이자 최초의 신탁이 내려진 공간입니다.”

    “아.”

    베이든과 공부할 때 비슷한 내용을 들은 적이 있었던 내가 작은 탄성을 질렀다.

    “단테 노아비크가 이계의 문을 열어 악령이 이 세상으로 오게 되었을 때, 신께서 그를 가엾게 여기어 최초의 신탁을 내리셨습니다.”

    “최초의 신탁이요?

    “노아비크와 벨리아나스에게 다시 신전과 합심하여 악령을 가둘 수 있는 힘을 주겠다고 했지요. 그래서 두 가문의 이능이 생겼습니다.”

    “신께서 왜 직접 해결해 주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인간이 벌인 일은 인간의 손으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께서는 저희의 뒤치다꺼리를 해 주시는 부모님이 아니니까요.”

    베이든에게 설명을 들었을 때 내가 진지하게 묻자 베이든은 신은 우리의 부모가 아니라고 설명했었다. 물론 부모가 없었던 나는 더 이상 묻지 못했다.

    “그래서 노아비크의 가언이 ‘책임을 다하라, 모든 것을 걸고.’이지요. 신전과 벨리아나스는 수도에서 언제나 악령을 내쫓을 수 있는 연구를 하고, 노아비크는 악령으로부터 북부를 직접 지키게 된 것입니다.”

    “그렇군요.”

    “아, 물론 제국이 아닌 곳에서는 다른 신들의 가호를 받아 악령을 무찌를 수 있는 특별한 힘을 받은 종족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에멘타 족 같은 종족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리 특이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스스로 악령을 가둘 수는 없지요.”

    여하튼 그 역사적인 장소를 지나치게 되다니 은근히 신기했다. 대신전에 다시 올 일은 없을 것 같았고, 그래서 나는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대신관에게 물었다.

    “관람이 가능한가요? 어쨌든 의미가 있는 공간인데 레오에게도 보여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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