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1/65)
  • 며칠이 흘렀다. 드디어 건국제의 폐회식 전날이 되었다. 바로 노아비크 공작가에서 신전에 방문하는 날이었다.

    레오의 손을 잡고 즐겼던 건국제가 마치 꿈처럼 아득했다. 내내 귓가에 자장가처럼 맴돌던 요하네스의 달콤한 속삭임까지도. 어쨌든 그 모든 것은 우리가 디에고를 막는 데에 성공해야만 이루어질 일들이었다.

    나와 레오, 요하네스는 함께 대신전에 들어가기로 했다. 레오가 걱정되었지만, 아프다는 서신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대신전에서는 축복을 받아야 한다며 방문을 강요했다. 더더욱 수상했다.

    ‘그들이 레오를 노리는 것 같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해 보았지만 나 역시 정확한 근거를 댈 수는 없었다. 그 말을 진지하게 듣는 사람은 요하네스뿐이었는데, 요하네스마저도 ‘정말 레오가 위험하다면 내가 곁에 있는 것이 낫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이 문제는 마무리되었다.

    여하튼 여러모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분명히 북부로 돌아가기 전에 무언가 레오를 목표로 한 함정을 준비했을 테니까.

    “엘로이즈, 준비 다 됐나?”

    문밖에서 요하네스가 느긋하게 질문했다. 하얀 정복을 차려입은 그는 평소보다 훨씬 더 근사했다. 그 역시 오늘이 아주 중요한 날이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겉으로는 아주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네.”

    물론 나 역시 담력에는 자신 있었다. 나는 가방을 챙겨 들며 야무지게 대답했다.

    “가죠.”

    “…거기엔 뭐가 들었지? 엘로이즈, 대신전에는 무기를 가져갈 수 없다는 걸 모르나?”

    “무기 아닌데요.”

    나는 가방 속을 보여 주며 태연하게 말했다.

    “장난감이에요. 이걸로 사람을 어떻게 해치겠어요.”

    내가 챙긴 것은 건국제 때 요하네스에게 사 달라고 조른 장난감 총이었다. 실제로 그 작은 총알에 피부를 맞아 봤자 살짝 따끔하기만 할 것이었다. 요하네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걸 왜 챙기는데?”

    “대신관님 보여 드리려고요.”

    나는 해맑게 말했고 요하네스는 묘한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냥 저한테 맡겨 주세요. 제 역할은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축제 때 즉흥적으로 받아 낸 장난감 총은 공작저 안에서 빈센트의 총을 지닐 수 없었던 내게 유일한 무기가 되어 주었다. 조잡하고 파괴력이 낮아서 남들에게는 무기가 아니라고 해도 내게는 무기가 될 수 있었으니까.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도움이 될 그 장난감 총을 챙겨 가는 건 당연했다. 대신전 같은 적들로 가득한 소굴에 어떻게 맨몸으로 갈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사실 이미 빈센트에게 얘기해서 어느 정도의 개조는 해 놓은 상태였다.

    “‘푸른 루비’를 안다고 하면서 최대한 시간을 끄는 거….”

    나는 가방을 툭툭 두드리면서 말했다.

    “그게 제 일이잖아요. 그때 이걸 가지고 조금 더 이목을 잡아 볼게요.”

    “…그래.”

    요하네스는 옅은 한숨을 쉬며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대가 하는 일은 위험하지 않은 것들이니 무리하지 마. 위험한 일은 내가 다 하도록 하지. 적당히 이목을 끌어 주는 것만 부탁해.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절대 무모한 일은 하지 말고.”

    “제가 무모한 일을 할 게 뭐 있겠어요.”

    “몸 사려. 무리하지 마. 조금이라도 그대에게 해가 되는 일이라면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가 내 옆머리를 넘겨 주며 당부하듯 말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 뺨을 비비다가 칭얼거리듯 대꾸했다.

    “지금 제가 몸 사릴 때인가요?”

    내게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반드시 요하네스에게 내 쓸모를 증명해 보여야 했다. 정말 최악의 상황에, 그가 딱히 내게 ‘시간의 돌’을 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더라도… 나를 어떻게든 곁에 둬서 이용하고 싶다는 충동이라도 들게.

    “그러다 다 망하면 어떡해요.”

    “다 망하면… 황궁에 잠입해서 황제 폐하와 디에고를 죽여야겠지.”

    “…네?”

    요하네스의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 태연해서 나는 그대로 그의 손을 놓아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은 부드럽게 내 뺨을 감쌌다.

    “벨리아나스가 모두 사라지면 악령이 날뛸 걱정은 안 해도 돼. 하지만 황족들을 몰살시켰으니 제국에 계속 있을 수는 없을 것 같고… 유제이 말마따나 북부 독립을 선언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 엄청난 말에 대꾸도 하지 못했다. 황제 폐하야말로 무고한 사람인데 그렇게 바로 죽여도 되는 것인가?

    게다가 황족이 다 죽으면 혼란에 빠진 제국은? 그리고 단테 노아비크가 후손들에게 의무처럼 덧씌웠던 제국에의 책임감은?

    “어… 그런데… 분명히… 제가 배우기로는….”

    역모나 되는 일을 요하네스가 가볍게 말했을 것 같지는 않아서, 심지어 너무나도 진심 같아서 나는 눈을 굴리며 당황한 채 말했다.

    “노아비크와 벨리아나스, 그리고 신전이 합심해서 다시 이계의 문을 닫아 악령을 몰아낼 거라고… 그게 북부가 독립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라고 했는데….”

    “먼저 그 합의를 깬 쪽은 벨리아나스인 것 같은데.”

    요하네스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

    “영원히 악령을 몰아내는 것보다, 당장 악령에게 지배당하는 일을 막는 것이 노아비크의 사명에 더 가깝지 않겠나?”

    말은 맞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황궁에 들어가서 두 사람의 목숨을 없애는 게 쉬울 리 없었다.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진지하게 대꾸했다.

    “그게 쉽겠어요? 황궁에 기사들만 해도 엄청나던데 아무리 노아비크라고 해도 목숨을 걸어야 할걸요.”

    “그러니 그 전에 그대의 생일 파티부터 해야겠지.”

    대답하는 꼴이 점점 더 가관이었다. 내가 입을 떡 벌리고 있자 요하네스가 장난스럽게 내 입술을 긴 손가락으로 쓸었다.

    “서류상 생일이 내일모레던데. 목숨 걸기 전에 부인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은 축하해 줘야지.”

    내… 생일?

    나는 진심으로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한 번도 나 스스로 언급하지 않았던 생일을 인지하고 있었다니. 물론 내 뒷조사를 해서 서류 정도야 빤히 꿰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생일을 챙겨 줄 마음이었다는 건 전혀 몰랐다.

    “여하튼 오늘의 전략은 그냥 가장 평화롭고 쉬운 방법을 선택한 것뿐이고, 다른 길은 많으니 절대로 무리하지 마. 그대의 안위가 가장 소중하니까.”

    달콤한 말이었지만 이상하게 이질감이 들었다. 요하네스가 무심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실은 딱히 성공할 거라는 기대도 안 해. 내가 이런 종류의 일을 많이 해 봐서 아는데… 첫 번째 시도가 성공해서 모든 일이 간단히 잘될 가능성은 아주 적어.”

    나는 요하네스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왠지 당신답지 않아요. 신전에 거짓말을 한다는 것도, 무고한 황제 폐하를 죽일 생각을 하는 것도.”

    “그래.”

    요하네스가 서서히 내게서 손을 물렸다. 그는 ‘나다운 게 뭔데.’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순순히 긍정했다.

    “나답지 않지.”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우리는 대신전으로 함께 출발했다.

    ⚜ ⚜ ⚜

    대신전은 웅장하고 아름다웠지만 꽤 삭막했다. 나는 레오의 손을 잡고 요하네스의 뒤를 따르며 정신없이 주변을 구경했다.

    우리의 공식 일정은 대단한 건 아니었다. 금으로 된 여신상 앞에서 헌금을 하고 제국과 가문의 번영을 기도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대신관에게 축복의 말을 몇 마디 나누면 일정이 끝났다.

    워낙에 건국제 기간 동안 수많은 귀족들이 다녀가서 그런지 사제들은 신전 안을 우르르 몰려다니면서도 우리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나는 흰 사제복을 입은 사제들을 바라보며 잠시 눈을 깜빡였다.

    “와, 엘로이즈 님. 신수도 돌아다니고 있어요! 우리 요한도 예전에는 이렇게 신전 안에서 돌아다녔겠지요?”

    확실히 신전 안에는 새나 고양이, 강아지나 사슴 같은 온순한 동물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아마 진짜 신수와 그냥 키우고 있는 동물이 섞여 있는 듯했다.

    “엘로이즈 님도 표정이 되게 복잡하시네요. 요한이 보고 싶으신가 봐요.”

    “보고 싶지.”

    나는 조용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신전 안에 돌아다니는 사제들을 보면서 묘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내가 일곱 살 때 보육원에서 성력을 발현하지만 않았더라도, 정상적인 절차를 걸쳐 지금 저 사제들 무리에 끼어 있었으려나.

    신전에 들어갈 때 있었던 몸수색에서 내 장난감 총이 걸렸으나, 나는 장난감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실제로 요하네스의 가슴에 한 발 쏘아 보이기까지 했다. 작고 가벼운 총알이 틱, 하는 소리와 함께 힘없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문지기가 고개를 갸웃하며 우리를 보내 주었다.

    그 뒤로 우리는 별다른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헌금을 하고 기도를 올렸다. 미리 베이든에게 교육을 받은 부분이라 별로 어렵지 않았다.

    우리가 모든 절차를 마치고 뒤로 돌아서자 어느새 다가온 대신관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대신관은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백발의 노인이었는데 초록색 눈동자를 빛내며 요하네스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공작님, 오랜만입니다. 북부에 올라가시고 나서 오랫동안 뵙지 못했지요.”

    ‘푸른 루비’ 때문에 요하네스는 대신관과 꽤 친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요하네스가 간단히 인사하자 대신관이 나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약식으로 결혼식도 올리셨다 들었습니다. 아니, 말씀만 하셨더라도 대신전에서 아주 성대하게 치러 드릴 수도 있었을 텐데요.”

    요하네스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고, 나는 싱긋 웃으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엘로이즈 노아비크입니다.”

    “허허, 직접 뵈니 노아비크 공작이 왜 그렇게 빨리 결혼을 진행했는지도 알 것 같군요. 꽤 미인이십니다.”

    “어머, 대단한 미인은 아니고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하자 대신관이 살짝 당황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요하네스가 피식 웃으며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대단한 미인이지. 그래서 그대에게 내가 한눈에 반하지 않았나.”

    요하네스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 아주 충격적인지 대신관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그 정도는 아닌데.’라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 내 얼굴을 살폈다.

    0